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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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서울대교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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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01 ㅣ No.689

124위 시복시성 기원 특별기획 - 이슬은 빛이 되어 (5)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서울대교구 ②


‘서소문 밖’ 서울 지역 최다 25명 순교

 

 

서울대교구 관할 지역에서 신자들이 가장 많이 순교한 곳은 ‘서소문 밖’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지금의 의주로와 서소문로가 교차하는 사거리 부근, 즉 의주로 2가와 합동 사이에 있는 서소문 공원과 인근을 말한다.

 

124위 가운데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이는 모두 25명이다. 갖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포도청에서 죽는 이들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대부분 참수됐다고 볼 수 있다. 서소문 밖은 성 밖이자 형조나 포도청과 가까웠던 까닭에 주로 한양의 형장으로 이용됐다.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여인들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여성 신자들 중 가장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순교자는 ▲ 강완숙(골롬바)이다. 그는 덕산 지방 홍지영의 후처로 살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됐다.

 

이후 강완숙은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했는데 1791년 신해박해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히기도 했다.

 

성직자영입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이를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경제적 뒷받침이 됐으며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세례를 받고 ‘여회장’으로 활동했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집에 주 신부를 피신시켰다. 또 신자들의 집회장소로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1811년 북경 주교에게 보낸 조선 신자들의 편지’는 “강완숙 골롬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했으며 열심한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다”고 전한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바로 포도청으로 끌려갔지만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형벌을 참아내며 주 신부의 행방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 40세의 나이로 참수됐다. 강완숙의 마지막 진술은 이러하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강완숙 골롬바 이외에도 서소문 밖에서 목숨을 다한 여성 순교자들은 참으로 많다. 이 여성 순교자들은 당시 여회장이었던 강완숙과 모두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강완숙 골롬바’의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강완숙의 집에서 세례를 받고 함께 순교한 김연이(율리아나) ▲ 강완숙과 왕래하던 집주인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된 동정궁녀 강경복(수산나) ▲ 함께 여성공동체를 이끌어갔던 한신애(아가타) ▲ 자신의 집 마당 한 켠에 집회소를 짓고 주 신부의 주례로 미사를 봉헌한 윤운혜(루치아) ▲ 교우 사이의 연락을 도맡았으며 교회 서적을 팔기도 했던 정복혜(칸디다) ▲ 병에 걸려 궁궐을 나왔다가 천주교 신앙을 알고 강완숙의 집에서 공부한 문영인(비비안나) 등이 그 예다.

 

 

그 밖에 서소문 순교자들

 

여회장 강완숙을 비롯한 여성공동체 외에도 많은 신자들이 서소문 밖에서 스러져 갔다.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 최창현(요한)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일부 지도층 신자들이 교회를 멀리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꿋꿋이 교회를 지켜나갔다. 그는 동료들과 의논해 성직자 영입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이 일을 앞장서서 추진했다.

 

계모 강완숙의 아들인 ▲ 홍필주(필립보)는 어머니의 덕행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고 그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1795년 어머니 강완숙이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자 그는 복사가 돼 여러 일을 도왔다. 또 ▲ 홍익만(안토니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함께 교회 일을 돌봤다.

 

1801년 포도청으로 끌려간 홍필주가 형벌을 받으며 마음이 약해지자 어머니 강완숙이 “너는 어찌 예수께서 네 머리 위에 임하시어 비추고 계심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그릇된 길로 가려고 하느냐”며 권면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외에도 ▲ 정약종과 정철상 부자 ▲ 정철상의 장인 홍교만 ▲ 사촌 관계인 최필공과 최필제 ▲ 천주교를 배척하다 뉘우치고 순교한 홍낙민 ▲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제사도 폐지한 정인혁 ▲ 김현우, 이현, 최인철, 김종교, 현계흠, 손경윤, 이경도, 김계완 등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가톨릭신문, 2009년 7월 5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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