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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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최양업 신부 서한에 담긴 신앙과 영성: 첫번째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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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1 ㅣ No.667

[오늘날 교우들 보아라 - 최양업 신부 서한에 담긴 신앙과 영성] 첫번째 서한


“단 몇시간이라도 신부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낸 일은…”

 

 

최양업 신부의 초상. 절두산 순교 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첫 번째 서한 전 행적

 

최양업 신부의 서한 내용을 이해하려면, 우선 첫 번째 서한이 작성되기 전까지 그의 행적을 이해해야 한다.

 

1821년 태어난 최양업은 1836년,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동료 최방제, 김대건과 라틴어 수업을 받고 정하상, 조신철 등의 인도를 받아 변문으로 출발한다.

 

1837년 그들은 중국 대륙을 남하해 마카오에 도착,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조선 신학교에서 수학한다. 그해 8월, 마카오의 민란으로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했다가 1838년 마카오로 돌아오지만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한다. 이듬해 또 다시 일어난 마카오의 민란으로 마닐라로 피신한 후 11월 마카오로 귀환한다.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최양업 신부의 첫 번째 서한은 1842년 4월 26일 작성된 서한으로 마카오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가 1821년생임을 감안할 때, 21살의 나이에 라틴어로 된 첫 번째 서한을 작성한 것이다.

 

첫 서한의 수취인인 르그레즈와 신부는 최 신부가 1837년 마카오에 처음 도착했을 때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대표로서 그를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스승에게 보내는 그의 첫 번째 서한은 처음을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눴을 때, 얼마나 외로워하고 애달파했는지를 회상하시면, 제가 신부님의 여행에 대하여 얼마나 조바심을 가지고 염려했는지 충분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는 하루라도, 아니 단 몇 시간이라도 신부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낸 일은 없다고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르그레즈와 신부는 1842년 초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지도자로 선임돼 귀국한다. 그러므로 최 신부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순명’과 ‘애정’이 각별히 담긴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최 신부의 첫 서한에서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는 점은 김대건 신부와 스승 매스트르 신부가 세실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의 에리곤 호에 승선해 마카오를 출발한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서 떠나고 또 저의 유일한 동료 안드레아(김대건)와도 떨어져 있는 저는 작은 방에 외톨이로 남아있습니다만 하느님과 홀로 있기가 소원입니다. 신부님이 떠나신 다음 우리 조국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들려 온 것이 없습니다.”

 

그는 서한을 통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작은 아들’인 자신을 기억해 줄 것과 한 가지 부탁을 더 청한다.

 

“또 한 가지 신부님께 바라는 바는 진짜 십자가 나무의 한 조각이나 성인들의 유해를 주셨으면 합니다.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신부님, 항상 편안하십시오. 신부님께 대한 추억은 제가 살아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지극히 비천하고 순종하는 아들 토마스 양업이 엎드려 절합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6월 14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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