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ㅣ 봉헌생활
성 베네딕도의 길3: 노동(Labor manu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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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의 길 3 - 노동(Labor manuus) 우리는 잠을 자면서도 일을 한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하고 끝기도를 바치는데, 무의식 속에서 거룩한 일(성무일도)이 계속된다. 새벽에 다시 의식으로 돌아와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로 자신을 깨우며 이 거룩한 일은 밤에서 낮으로 이어진다. 수도승들이 미사와 더불어 하루 일곱 차례에 걸쳐, 약 4시간 동안 하느님의 일인 공동 성무일도가 만만치 않아 우리들끼리 우스갯말로 ‘중(僧)노동’ 중 ‘중(重)노동’이라 부른다. 힘들기는 성독(聖讀, 렉시오 디비나) 역시 매한가지이다. 베네딕도 수도규칙에 이런 어려움이 여실히 드러난다. ‘형제들이 독서에 전념하고 있는 시간에 한두 사람의 장로들에게 책임을 맡겨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하여, 혹시라도 한가함이나 잡담에 빠져 독서에 힘쓰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무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해가 되는 게으른 형제가 있는지 살피게 할 것이다.’(RB 48,17-18) 만일 독서가 TV 보는 것처럼 쉽고 재미있는 일이라면 장로들이 이렇게 수도승들을 살피러 돌아다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 베네딕도는 이런 이들에게 적절한 일을 부여하여 놀지 못하도록 조치한다. “만일 누가 너무나 무관심하고 게을러서 공부나 독서를 하려고 하지 않거나 할 수 없거든, 그런 사람에게는 할 일을 맡겨 놀지 못하게 할 것이다.”(RB 48,23) 사실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나 성독, 육체노동만 힘든게 아니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수도생활 자체 또한 힘든 일이다. 수도승들의 모든 수행은 결국 ‘수도승다운 생활(conversatio morum)’ 안에, 즉 ‘일’에 포함된다. 그러니 우리 수도승의 삶에 수행 아닌 것이, 일 아닌 것이 무엇이 있는가? 수도승들에겐 일이 있다면 ‘하느님을 찾는 일’,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 하나만이 있을 뿐이며 모든 일은 이 하나의 일을 지향하고 있다. 어느 수도승이 마더 데레사에게 ‘내가 세상을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물었을 때 성녀의 핵심을 꿰뚫는 대답은 ‘참으로 좋은 수도승이 되십시오(Be a really good monk).’라는 말이었다. 사실 수도승은 무엇을 ‘하기 위해’, 또 어느 특정한 일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수도승이 되기 위해’ 수도원에 왔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게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이다. 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은 일정 기간에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일이기에 수도승들에겐 정년퇴직이나 명예퇴직이 있을 리 없다. 어찌 수도승들뿐이겠는가. 참으로 믿는 모든 이들 역시 죽는 날이 정년퇴직일이요, 그 때까지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은 계속된다. 일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일을 한다. 일에는 귀천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전까지 목수 일을 하셨다. 일이 문제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 문제요, 사람이 우선이다. 만일 수도승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항구히 부지런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한다면 그가 하는 일 모두는 기도가 되고 그 자신의 치유와 성화는 물론 그 모든 일도 성화될 것이다. 그러나 수도승이 일선의 현장에서 물러났다 하여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일에는 퇴직이나 은퇴가 있지만 수도생활의 일에는 퇴직이나 은퇴가 있을 수 없다. 살아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돈이 되든 안 되든, 좌우간 무슨 일이든 부지런히 해야 한다. 믿는 이들 역시 이런 자세로 살아야 영육의 건강하고 품위 있는 노년을 맞이할 수 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게으름에 빠지면 썩는다. 게으름만큼 우리 몸과 마음을 쉽게 망가뜨리는 것도 없다. 청소를 하든, 쓰레기를 치우든, 설거지를 하든, 바느질을 하든, 그 무슨 일을 하든 부지런히 정성껏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면 된다. 설혹 몸이 불편하여 이런 일 저런 일을 하지 못하면 가만히 주님을 바라보며 머물러 있는 자체도 일이다. 이런 이들은 산이나 나무처럼 존재 자체가 일이 된다. 소화 데레사의 시성 문제로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에게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주신 ‘성녀는 평범한 일상의 작은 일 하나하나에 큰 사랑을 담아 실행했으며 이게 시성의 이유다.’라는 요지의 통쾌한 답변이 생각난다. 제 삶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충분하다. 누구나 똑같은 일이나 육체노동에 종사할 수는 없다. 공주 수도생활은 하나의 종합예술이며 사람에 따라 일의 분야도 다양하다.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삶의 진리이다.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뿐 아니라 필히 육신의 생산적인 일도 해야 한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2테살 3,10)”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있고,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즉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불교 백장(百丈) 스님의 청규(淸規) 말씀도 있다. 그러니 수도승들은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각자의 수준에 맞게, 무리하는 일 없이 모든 일을 적절히 행해야 한다. 수도원 안에서 모든 일 역시 겸손의 수행으로서, 수도승들은 이 일들을 통해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간다. 그러므로 수도원의 기술자들은 온갖 겸손을 다하여 그 기술을 사용할 것이며, 자기의 기술이 수도원에 어떤 공헌을 하는 줄로 알고 교만하거든 지체 없이 그 기술직을 중지시켜야 한다.(RB 57,2) 또한 수도원에서 생산된 물품의 가격을 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탐욕의 악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다른 세속 사람들이 파는 것보다 언제나 싸게 하여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할 것이다.(RB 57,7-9참조) 수도승은 물론 믿는 이들의 모든 일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의 영광이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가가 그 일의 잣대이다. 수도승이 평생 부지런히 겸손하게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에 항구할 때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날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 받으소서!”(Ut in Omnibus Glorificetur Deus; RB 57,9) [분도, 2009년 가을호, 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사진제공 역사자료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0 1,80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