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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교구 사제 영성을 찾아서: 교구 신부 영성의 샘은 공동체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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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358

[교구 사제의 영성] 교구 사제 영성을 찾아서 - 교구 신부 영성의 샘은 공동체 생활

 

 

1. 교구 사제는 누구인가?

 

자신들의 영성을 찾는 교구 사제는 누구인가? 무엇보다도 주교의 협력자들이다. 주교는 열두 사도의 후계자이며, 열두 사도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의 일을 계속하라고 직접 사명을 받은 이들이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느님의 현존으로 말미암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사도들이 가서 성체성사를 집전하면서 온 세상에 퍼져나갔고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교구 신부로서 주교의 협력자가 된다는 것은 그들 자신이 직접 교회를 건설하면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성사로서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기에 교구 신부는 매우 중요하고 값진 성소를 사는 것이다. 교회는 유기체와 같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건강하게 자신을 지켜나가려면,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인 신부들은 어디서 힘을 얻으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

 

 

2. 교구 신부들은 어디서 힘을 얻으며 살 것인가?

 

육체적으로만 건강하거나, 물질적으로 안정된다고 해서 신부들의 웰빙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런 요소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사제생활의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이른바 영성적 차원에서 그리고 매우 넓은 범위에서 그 대답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곧 하느님의 말씀과 사제생활, 성체성사와 사제 영성, 기도와 사제 영성, 복음적 권고와 사제 영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교구 신부의 영성의 샘인 공동체 생활’로 제한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교구 신부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교구 신부들은 함께 생활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인하고, 또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간다. 요즘 가정이 해체의 위협을 많이 받기도 하고, 한 지붕 아래에서 산다고 모두가 공동체 생활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인을 하고 가정 공동체를 이룬다. 그리고 수도자들 역시 공동생활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수도자들의 공동체는 막강한 복음적 힘을 발휘하면서 자신들의 카리스마를 훌륭하게 완수한다. 

 

그런데 교구 신부들은 대부분 혼자 산다. 사람들은 신부들이 독신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니 혼자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교구 신부들 자신도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구 신부들이 독불장군처럼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본당 사제관은 주임신부와 보좌신부가 함께 살고 있기는 해도 그저 기숙사와 같은 형태를 이루는 경우가 허다하다. 본당에서 신부들의 사이가 좋다고 해도 그것을 공동체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특수 사목을 하는 신부들이 함께 모여 살아도 여러 가지 이유로 기숙사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구 신부들은 쉽게 지치고 힘을 잃어도 회복이 어려우며 빨리 늙어버린다.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기는커녕 오히려 짐이 되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구조로 볼 때, 신부들이 얼마나 힘차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신자들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구원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3. 교구 신부들이 이루는 공동체 생활의 원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주십시오”(요한 17,21). 교구 신부들이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는 근본 이유는 이처럼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있다. 교구 신부들이 일치해서 공동체를 이루도록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아버지 옆에서 기도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일생 동안 제자들을 양성하시고 늘 그들과 함께 계셨다.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마르 3,14)라는 성서의 말씀처럼 늘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파견하실 때도 짝지어 보내셨다. 수난의 길에서 도망가고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모으신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다(루가 24,33-35). 성령 강림을 체험한 것도 제자들이 함께 모여있을 때 일어난 일이며, 그때를 교회 창립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가리옷 사람 유다의 자리를 이어서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도 ‘줄곧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사도 1,21)이 식별의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다른 제자들과 늘 함께 있는 것은 운명과 같다. 

 

교구 신부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이들이다. 그러기에 스승 예수님과 동료 제자들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 자체가 첫째 과제이며 직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목자인 신부들은 자신들도 공동체를 이루면서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헌신해야 한다. 자신들은 공동체를 꾸리지 못하면서 신자 공동체를 위해서 활동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래서 본당에서도 주임신부와 보좌신부가 형제같이 함께 살아갈 때 사목활동은 좋은 결실을 맺는다.

 

 

4. 공동사목의 성공 여부는 신부들의 공동체 여하에 달려있다

 

요즘 ‘공동사목’이 교회 안에서 화두가 되었다. 갈수록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는데, 필요한 만큼 본당을 다 지어낼 수 없다. 그러니 공동사목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 다른 나라에서는 성당은 있는데 사목자들이 부족해서 공동사목을 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사목자는 있는데 성당이 부족해서 공동사목을 한다. 출발점이 좀 다르다. 필요에 따라서 공동사목을 해야 하는데 그 성공 여부는 공동사목에 참여하는 ‘신부들의 공동체 생활’ 여하에 달려있다. 

 

단순히 역할 분담만으로 공동사목이 가능할까? 독신 남자들인 신부들이 함께 같은 공간에서 돌아가면서 강론을 하고 미사를 집전하고 여러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과연 심리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각 신부들 사이에 있는 특성의 차이를 어떻게 신부들 자신이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사제들이 형제적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제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아니 ‘형님’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다음 성서 말씀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히브 2,11). 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마태 28,10; 요한 20,17 참조).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형제가 되었다. 많은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목자인 교구 신부들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형제 공동체’를 형성해서 이 복음 말씀을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야 한다. 그것은 상하 위계나 선후배를 따지는 세속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5. 교구 신부들은 어떻게 형제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는가?

 

교구 신부들이 형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데 서투르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생활을 새롭게 배워 익혀나가야 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이다. 과거에 한국사회가 춥고 배고플 때는 농경사회였고 많은 국민이 농촌에서 살았기에 자연스럽게 가정과 사회가 공동체적이었다. 그러나 급격한 경제 성장과 함께 우리 사회의 공동체 생활은 빠른 속도로 와해되어 가고 있고, 이러한 사회 현상은 성직자들의 생활 형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미래의 신부들인 신학생들은 대부분 가족 공동체와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인 본당에서 사제 성소를 받고 신학교에 들어가지만, 신학교에서 과연 복음적 형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여튼 사제 수품 후에 젊은 신부들은 하느님의 큰 선물로서 대부분 본당 공동체로 파견된다. 이때 형제 공동체 정신이 희박해진 오늘날의 사제단에서 젊은 신부들은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살아가면서 혼란을 많이 겪고 고통스러워한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의 실제적인 해답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으면서 살아야 하듯이, 교구 신부는 운명적으로 형제적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부터 필요하다. 

 

신부들이 형제 공동체 생활을 하려면, 먼저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야 한다. 그분께서 각자의 중심이 되셔야 하고, 사제단(교구, 지구, 본당 등)에서도 중심이 되셔야 한다. 말로만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라고 하고 간단하게 여기며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신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음으로써 사람들이 신부들을 보고 오늘 세상에 살아계시는 주님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5).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말씀하셨듯이(요한 14,9) 신부들도 사람들에게 “우리를 보았으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라고 말씀하셨다. 교구 신부들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어야 형제 공동체가 형성된다. 

 

“늘 기도하십시오.”(1데살 5,17)라고 권고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와 깊은 우정을 쌓아가야 할 것이다. 신부들의 공동체 생활의 원천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치이며 그들은 기도 중에 분명하게 이 일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 4,4)는 스승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제들의 공동체여야 한다. 신자들이 신부들의 공동체를 보고, 하느님 말씀의 식탁의 풍요로움을 사제관에서 발견할 수 있을 때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그리고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드러나듯이, 복음적 사제 공동체의 뿌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파견에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서 투신하셨으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루가 4,18-19)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복종시켰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루가 10,17-24) 예수님도 기뻐하셨다. 이처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 교구 신부들의 형제 공동체이다.

 

 

6. 나약한 신부들의 공동체 생활

 

깨지기 쉬운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2고린 4,7)와 같이, 신부들은 형제적 공동체 생활을 하기에는 나약한 사람들이다. 공동체 생활이 매우 이상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또한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부부로서 결합한 남녀 부부도 함께 생활하기 힘들어하고 때로는 그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는데, 하물며 교구 신부들이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열두 제자들, 그리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고, 제자들 사이의 불화는 교회 역사에 계속해서 나타나며 그리스도교의 분열은 역사 속에서 큰 추문으로 남아있다. 이처럼 공동체 생활은 무겁고 어려운 것이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자들이나 비신자들은 신부들을 베일에 가려진 존재라고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은 신부들이 형제 공동체 생활을 할 줄 모르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신부들은 형제 사제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자신을 만나는 아픔을 맛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어려움을 이겨내며, 마음을 열고 다른 형제를 받아들이는 고통을 겪어내야 한다. 

 

신부들은 날마다 성체성사를 집전하면서 성체 안에서 교회의 일치, 세상의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고 외친다. 성체성사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톨릭 교회의 교구 신부들에게 자신들의 공동체 생활이 얼마나 긴박하게 요구되는 일인지 미사에서 잘 드러난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서로에게 “너희는 나를 받아 먹어라.”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철저하게 성령을 청해야 할 것이다.

 

“모든 거룩함의 샘이신 아버지, 

성령의 힘으로 저희 교구 신부들을 거룩하게 하시어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아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 공동체를 이루게 하소서.”

 

[사목, 2005년 8월호, 주수욱(서울대교구 신부 · 특수 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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