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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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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와 신앙: 아들의 방 - 일상에 숨어있는 작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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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7 ㅣ No.351

[영화와 신앙] 일상에 숨어있는 작은 기적 - 아들의 방

 

 

어느 날 내게 찾아온 불행으로 내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린다면?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면?

 

사람이 살면서 불가피하게 피해갈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은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슬픔과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자신과 주변에 상처를 주거나 해치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극복할 힘을 얻어 마음의 평화를 회복한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아들의 방>(2001년)은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으로 슬픔과 고통 속에 빠져드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과장하지 않는 슬픔이 고통의 깊이를 더하다

 

정신과 상담의 지오반니(난니 모레티 분)는 출판일을 하는 아내와 착한 아들과 딸을 둔 행복한 가장이다. 지오반니의 가정은 단란하고 사랑이 넘쳐 보인다. 그런데 이 가정에 슬픔과 고통이 스며든다. 아들 안드레아가 잠수를 하다 사고로 죽게 된 것이다. 아들의 죽음 이후 이 가정은 황폐하고 우울한 곳으로 변해간다. 

 

<아들의 방>은 아들의 죽음 이후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고통받게 되는지를 지극히 담담하게 보여준다. 난니 모레티의 영화 분위기나 화법상 이례적이라 할 만큼 진지하고 사실적이며 무겁다. <아들의 방>에서 난니 모레티는 슬픔을 과장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깊이는 더하다. 특히 아들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 지오반니의 죄의식과 상실감은 아버지라는 존재의 무게를 각인시키면서 깊은 감정적 울림을 체감하게 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아들과 같이 있어주지 못하여 아들이 죽게 되었다고 스스로 책망한다. 사실 환자와의 약속 때문에 아들과의 조깅을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고, 아들은 친구들과 바다로 나갔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자신이 같이 있었더라면 아들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분노한다.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신에 대해서. 아들을 위한 미사에서 “생을 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며, 이유는 알려주시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라고 사제가 말할 때, 그는 분노를 터뜨린다(지오반니는 신자가 아니며, 난니 모레티는 좌파 감독이다.).

 

지오반니는 환자에게 대단히 이성적인 의사이다. 그의 환자 한 사람은 그런 그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사람’으로 평가하며 교감을 가질 수 없다고 비난한다. 사실 이 부분은 지오반니가 의사로서 결격 사유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환자가 누군가를 비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에 대한 만족을 얻는 유형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설정이다. 그런 한편 지오반니가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 또한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오반니의 이러한 성향은 영화 초반 환자와의 상담에서 잘 드러난다. “당신은 책임감 때문에 매사에 죄의식을 갖지만 인생은 뜻대로 되진 않아요.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죠. 조급하기보다는 좀 느긋하게 기다리는 삶을 배운다면 세상을 좀 더 편안하게 보게 되죠.”

 

그러나 지오반니는 아들의 죽음 이후 이 같은 냉정함과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는 환자 앞에서 울어버리고, 어떤 이들의 말은 듣지 못하며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 자신인 듯 동화되어 버린다. 또 자살충동에 빠졌던 환자가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자 ‘환자가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쳐도 정해진 운명은 절대 바꿀 수 없다’며 마음에 품고 있는 분노를 차갑게 내뱉기도 한다. 이제 지오반니는 더 이상 의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여긴다.

 

가정에서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단란하고 행복으로 충만했던 가정은 삭막하고 우울하며 불안한 기류에 휩싸인다. 지오반니는 음악을 듣다가 자꾸만 중간으로 되돌리며 아내와 딸은 각자의 방에서 이를 바라보기만 한다. 아내는 아들이 입던 빨간 티셔츠를 부여잡고 울음을 토해내고, 딸은 농구경기에서 공격적인 태도 때문에 퇴장당한다. 식탁에서의 대화는 “어떻게 지내니?(-아버지)”에 “그럭저럭(-딸)”이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고, 서로의 고통 때문에 마주하기를 꺼린다. 각자 감당해야 하는 슬픔의 무게 때문에 서로 상처주고 고통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슬픔은 나누면서 적어지고 고통은 받아들임으로써 극복된다

 

죽음은 사람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때문에 생긴 상실감은 절망적일 것이다. 지오반니의 절망과 분노는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인간적인 대응으로만 본다면 당연한 것이다. 그가 사제의 강론에 분노하는 것도 사람으로서의 한계를 알면서도 아직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절망과 고통으로만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으셨을 때 하느님과 성모님의 슬픔과 고통은 얼마나 극심하셨겠는가?

 

아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인간적인 욕망으로만 보자면 하느님께서도 아드님 그리스도의 육신의 죽음을 어찌 비껴가게 하고 싶지 않으셨겠는가?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희생제물로 삼으시어 사람과 세상을 구원하려 하시고, 성모님은 그 같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셨다. 그러므로 ‘이유를 알려주시지 않아도’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그 표징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믿고 따르는 것이 신자의 길일 것이다. 

 

지오반니 가족이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게 되는 것은 아들의 여자친구 아리안나를 만나면서이다. 그녀를 통하여 죽은 아들을 다시 만나면서 - 사진을 통하여, 아리안나와의 추억을 통하여 - 지오반니와 가족은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된다. 지오반니는 아들이 아닌 다른 남자친구와 프랑스로 무전여행을 떠나는 아리안나를 자동차로 국경까지 데려다주면서 뒷좌석에 잠들어 있는 딸과 아리안나, 그의 남자친구의 모습을 바라본다. 비록 아들은 거기에 없지만 아들과 같은 아이들이 거기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슬픔과 분노에서 벗어나 주변에 마음을 열게 된다.

 

슬픔은 나눌 때 적어진다. 지오반니는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슬픔을 나누려 하지 않았기에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아리안나를 데려다주면서 아내에게 도움을 청한다. ‘당신은 자면 안 돼. 서로 깨워줘야지.’

 

나는 주님께서 아리안나를 보내셨다고 믿는다. 아리안나를 통하여 지오반니 가족이 다시 서로 사랑하고 추스를 힘을 주신 것이라고 믿는다. 지오반니가 믿음을 가지든 그렇지 않든 근본적인 치유의 힘은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믿는다. 작은 기적들은 우리 일상 곳곳에 숨어있다.

 

[사목, 2005년 6월호, 조혜정(영화평론가 · 수원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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