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영성생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92

영성생활

 

 

영성생활 없는 그리스도인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신자들을 하느님 체험과 하느님 안에서의 삶으로 이끌어야 한다. 오늘날 이에 대한 강조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심화시켜 나가는 것으로서 라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 안에서의 책무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목적인 일들과 걱정들로 분주한 생활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체험을 공동체 안에서 생활화시킴으로써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개인적 관계는 성서 안에 담긴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에 뿌리를 두고 있고, 성체성사에 의해서 형성된 관계이며, 신망애의 삶으로 이어진 관계이다. 그리스도교적 체험을 윤리로 축소시키는 것은 신앙을 무익하게 하는 가장 직접적인 길이다.

 

반대로 신앙은 우리를 하느님께 대한 실제적인 체험으로 이끌며, 성령에 의해 인도된 삶, 곧 영성생활로 인도한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또한 하느님을 체험해야 한다. 즉 하느님에 관한 올바른 개념들을 갖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환시 안에서가 아니라 언제나 신앙 안에서 오는 체험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압도하는 어떤 것이다. 그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야곱과 함께 “주님은 여기 계시는데 나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구나!”(창세 28,16), 혹은 시편 저자와 함께 “당신은 앞뒤로 이 몸을 감싸주시고, 내 위에 당신 손을 감싸주시나이다... 당신 현존을 피해 갈 곳 어디이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시편 139,5이하) 라고 반복하게 한다. 또 한편으로 우리의 영적 체험은 공(空)으로, 하느님의 침묵으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욥의 다음 말들을 되풀이하게 하는 무미건조함으로 드러난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분은 계시지 않고, 뒤로 가도 그분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구나. 나는 왼쪽에서 그분을 찾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돌려보아도 그분을 보지 못하는도다.”(욥 23,8-9) 그렇지만, 일상의 침묵을 통하여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사실 하느님은 삶을 통하여, 우리의 체험을 통하여, 또한 삶이 우리를 이끌 수 있는 위기들, 어둡고 불확실한 순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역사 하신다.

 

영적 체험은 무엇보다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시며, 또 우리를 선행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다. 우리는 우리가 관계를 맺고자하는 분인 하느님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분은 이미 거기 계시지 않은가! 하느님 체험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아무도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요한 14,6)고 하셨다. 성령은 빛이시며, 하느님은 그분을 통해서 우리를 선행하시어 성화(聖化)를 향한 우리의 영적 여정을 인도하신다. 이 여정은 당신 아들에 대한 추종이다. 이렇듯 영적 체험은 세례 때, 인간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하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응답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녀들: 이것이 세례에 의해서 피어나기 시작한 약속이자 여정이 아닌가! 리용의 이레네오가 말한 것처럼 성령과 성자는 하느님께서 그것들로써 순명 안에서, 그리고 당신과 또 다른 이들과의 관계와 친교의 사건들 안에서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들로 빚으신 두개의 손과도 같다.

 

참된 영적 여정을 위해 거쳐야하는 본질적인 과정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상(像)의 위기이다. 이것은 고통스런 것이지만, 회개를 위해 필요한 시작이다. 또한 이것은 실제의 ‘나’가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나’가 부수어지는 순간이다. 이 위기 없이 성령에 따른 참된 생명에 들어가지 못한다. 만일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런 죽음이 없다면, 세례 때 따라 온 새로운 생명에로의 부활도 역시 없을 것이다(로마 6,4 참조). 그런 다음 현실을 향한 진실성과 현실에의 충실성, 즉 현실에 굳게 토대를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 안에서 그리고 일상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우리는 하느님을 인식하게 되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성장시켜나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성생활이 신망애의 삶 안에서 이 세상에 대한 충실성과 하느님께 대한 순명을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따라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추종을 뜻하는 신앙 여정에 몰입할 필요가 있다. 바울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분이 과연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성찰해 보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가운데에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깨닫지 못합니까?”(2고린 13,5).

 

영성생활은 내면에서, 즉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인 ‘마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마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존재의 진실성이 밝혀진다. 사실 그리스도인 삶은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즉 마음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사실 “마음으로 주님을 공경하는 것”이 중요하다(1베드 3,15 참조). 마음은 우리의 성화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즉 우리 안에 거룩한 성삼위적 삶이 실현되는 장소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우리는 그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입니다.”(요한 14,23) 영성생활의 목적은 우리가 신적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교부들은 이것을 신화(神化)라고 불렀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다. 또 고백자 막시모는 다음과 같이 훌륭한 방법으로 종합하고 있다. “신화는 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처럼 원수들조차 용서하는 신적 사랑의 고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실현된다. 당신이 하느님이 되는 것은 언제인가? 당신은 언제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처럼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을 위하여 제 생명을 내어드립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영성생활은 우리를 이것에로 끌어당긴다. 즉 창조주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신앙 안에 뿌리를 두고, 성화자이신 성령으로부터 충동되고 정향(定向)된, 그리고 친히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아들 안에 접목된 삶으로 이끈다.

 

- 엔조 비앙키의 「영성의 말씀들」중에서 -

Enzo Bianchi, Le parole della spiritualita: Per un lessico della vita interiore, Rizzoli:Milano 1999, 35-42 요약.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1,71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