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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구심기도(Centering Prayer): 마음으로 기도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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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87

구심기도(Centering Prayer) - 마음으로 기도하는 법

 

 

"주님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루가 11,1). 제자들의 이 요구는 오늘날 점점 더 자주 듣게 되는 요구이다. 기도에 대한 널리 확대되고 점증하는 관심은 사람들의 깊은 영적 굶주림에 대한 하나의 표지이다. 예수께서는 당신 백성의 성서(신명 8,3)를 인용하시면서 "인간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루가 4,4)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선택가능한 다른 종류의 것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한, 사람들은 빵만으로도 살 수 있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육체의 요구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투자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요구들에 대해서는 너무 자주 소홀히 한다. 그 결과는 영적인 영양실조와 굶주림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체험하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아는 그 방법으로 그분을 알고자 한다. 이 갈망은 카리스마적인 다른 기도 모임들이 유행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또한 외래의 종파들과 제의들, 그리고 묵상 방법들에 대한 널리 확산된 관심 이면에 숨어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이러한 것들은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가장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환각제를 복용하는 사람들조차 육체적인 것 못지 않게 영적인 굶주림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톨릭 영성은 이러한 영혼의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풍부한 보화들을 가지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별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신앙심이 깊고, 영세 받은지 오래된 가톨릭 신자들(많은 사제들과 수사.수녀들을 포함하여) 조차 종종 그들의 풍부한 영적 유산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기도는 단순히 기억이나 또는 기도서를 통해서 드리는 "구송 기도들"을 의미한다. 깊게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기도하도록 배운 사람들은 너무 소수이다. 하지만 그와 같이 깊은 기도만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우정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단지 그분과의 이러한 인격적인 우정만이 사도 바울로에게서 마더 데례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그리스도교인들에게서 명백히 나타나는 전염되는 기쁨을 낳는다.

 


공적인 기도와 개인기도

 

가톨릭 신자들에게 있어 기도의 가장 중요한 형태는 하느님 백성의 공적인 예배이다. 하지만 주일미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깊이, 친밀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다고 느끼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사를 단순히 지루한 법적 의무 수행으로 경험하는가? 특히 젊은이들은 그들이 '미사로부터 어떠한 것도 얻지 못한다'고 불평한다. 그들은 하느님을 체험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미사에 오지만, 너무 자주 영적인 굶주림을 채우지 못한 상태로 돌아간다. 만일 전례가 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단조롭고 지루하다면,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개인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전례가 우리에게 중요하듯이 성전과 회당의 공적인 예배는 예수에게 중요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또한 개인기도의 필요성을 주장하신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은밀히 여러분의 아버지께 기도하시오"(마태 6,6).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는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을 물리적으로 분리시키는 네 벽으로 막힌 방에 대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생각들이 닫혀 있고, 당신의 감정들을 담고 있는 장소인 당신 내면의 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기도의 방은 어제나 당신과 함께 있고,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 하느님 홀로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신다(카인과 아벨에 대하여, B 1:34).

 

이 "은밀한 장소"에 들어가는 하나의 길이 우리 시대에 재발견되고 있다. 그것은 구심기도(Centering Prayer)라고 불려 진다. 이 이름은 새롭지만, 그 방법 자체는 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고전적인 개인기도의 형태이다. 적어도 마지막 4세기 동안 이 가톨릭 영성의 보화는 단지 소수의 관상 수도 공동체들 안에서 소수의 남녀 수도승들에게만 유용한 것이 되어 왔다. 기도에 대한 많은 가톨릭 서적들은 이 고대의 기도 형태가 평범한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소수의 진보한 영혼들을 위한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 결과 자주 영성체를 하지 않고 소홀히 하게 할 정도로 영적인 상실은 엄청나게 컸다.

 

 

묵상

 

이 고대 가톨릭 기도 형태에 대한 현대의 재발견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 우리는 그렇듯 오랫동안 그것을 대신해 왔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개인기도가 묵주신공이나 기억 또는 책으로부터 기도문들을 암송하는 차원을 뛰어 넘은 가톨릭 신자들은 어떤 추론적인 묵상 형태를 가장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묵상을 하는 중에 선택된 자료에 대한 정신적인 숙고를 포함한다. 그 자료는 성서의 한 구절이나 예수 생애의 한 사건 또는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신 예수, 성체성사 안에서 그분의 참된 현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 또는 자비와 같은 하나의 종교적 진리일 수 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현존 안에 위치시킨 후, 우리는 이 목적을 위해 상상과 기억, 그리고 이성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선택된 기도 자료를 숙고한다. 그 다음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사용하여 이러한 숙고들에 대한 정감적인 응답을 불러일으키고자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미래의 우리 의지와 행위를 이끌기 위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결론들을 도출해 낸다.

 

추론적인 묵상은 능동적 형태의 기도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우리는 한 번 읽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새로운 측면의 의미들을 발견하면서 그 편지를 거듭해서 읽는다. 그 동안 줄곧 우리는 사랑과 감사의 감정을 체험하면서, 그리고 우리의 응답을 생각하면서, 상상으로 상대방의 모습을 그린다. 이러한 종류의 묵상은 보통 우리 자신의 편지로 응답하고 단념하려는 결심으로 끝난다.

 

추론적인 묵상은 예수의 인격과 활동 그리고 가르침을 우리 앞에 붙들어 놓는다. 그것은 신앙의 진리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심화시키며,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예민하게 한다. 그러한 묵상이 고무하는 찬양, 감사, 회개, 그리고 청원의 행위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 충실하게 남아 있도록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관대하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경험은 초기의 새로움이 사라진 후, 추론적인 묵상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상당한 정신 집중을 요구한다. 분심과 잡념들이 지속적인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전혀 묵상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추론적인 묵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복잡해서 그들은 처음부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같다. 이는 특별히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부류의 사람들 즉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신 하느님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실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구심기도는 그들을 위한 기도이다.

 

 

구심기도

 

능동적인 추론적 묵상과는 달리 구심기도는 수동적이다. 선택된 묵상자료에 우리의 생각, 상상력, 감정 그리고 의지를 집중하도록 가르치는 대신에 구심기도는 하느님 앞에 침묵 중에 기다리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이 활동이 어떠한가는 구심기도의 다음 세 가지 규칙 안에 잘 묘사되어 있다:

 

1. 우리는 일 분 내지 이 분 동안 고요히 앉아 있음으로서 기도를 시작한다. 그런 다음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거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로 나아간다. 우리는 몇 분 동안 정신으로 "주의 기도"나 다른 어떤 기도를 바침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마친다.

 

2.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에 대해서 인식한 후, 우리는 우리의 응답을 표현하는 하나의 짧고 단순한 기도-말을 속으로 반복한다.

 

3. 기도 중에 우리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단순히 기도말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의 기도에로 조용히 되돌아간다.

 

그 기도-말은 이 방법의 핵심 부분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시도록 우리 마음을 비우게 해준다. 그 기도-말은 우리가 내적인 침묵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그 침묵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기다린다. 그것은 예수, 하느님, 사랑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말마디와 같이 하나의 단순한 단어이어야 한다. 그것은 생각이나 상상을 쉽게 흐트러트리는 단어여서는 안된다.

 

구심기도는 마음의 기도이다. 만일 묵상이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 숙고하는 것과 같다면, 구심기도는 친한 친구와 함께 조용히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서로를 마음으로 알고 또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 간에는 말이 필요 없다. 말없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그 두 사람은 침묵 중에 서로의 우정을 나누면서 함께 있는 것에 행복해 한다.

 

구심기도는 하느님께 이르는 가장 짧고 가장 직접적인 길이다. 그 이유는 14세기 영국 작품 '무지의 구름'을 쓴 익명의 작가에 의해서 잘 설명되고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을 잘 사랑할 수 있지만, 사유할 수는 없다. 그분은 결코 생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붙잡혀지고 소유되실 수 있다."

 

 

자기-부정

 

구심기도의 가장 큰 장점들 중 하나는 그것의 단순성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복잡화된 것들을 습득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성취감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좋아한다. 구심기도는 너무 단순해서 자축(自祝)을 위한 근거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가 9,23). 구심기도는 다음의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자기-부정에 대한 요구를 성취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하고자 원하는 어떠한 놀라운 일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 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생각들이 아무리 유용하거나 아름답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들 역시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단지 우리가 마음을 비우게 되는 정도로만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실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방법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을 얻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하느님께 내어 드리는 시간이다. 추론적인 묵상 후, 우리는 그것이 잘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도움이 되는 많은 생각들을 하였는지의 여부를 안다. 구심기도는 그러한 평가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결과를 하느님께 맡겨 드린다. 만일 그분이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우리가 체험하기를 원하신다면 그 결과는 훌륭하다. 만일 우리가 너무 산란해져서 기도-말을 계속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그것 역시 훌륭하다.

 

구심기도를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것이 기도시간 외의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과 사랑, 그리고 내적 평화를 심화시킨다. 그것은 관대해지고 죄를 피하는 것을 더 쉽게 해준다. 그러나 구심기도의 이러한 결실들은 단지 우리가 얻고자 하지 않고 주려고 하는 한에서만 주어진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셨다. "주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받을 것입니다. 좋은 되를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한 되를 여러분의 품에 안겨 주실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되어 주는 되만큼 여러분에게 도로 되어 주실 것입니다"(루가 6,38). 예수께서는 거기서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의 말씀들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더욱더 적용된다.

 

 

하느님 사랑의 체험

 

묵상 중에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한다. 구심기도 중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체험한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기도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낭비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침묵과 사랑 중에 그분을 기다림으로서 우리가 그분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안다.

 

우리가 이러한 방법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랑스런 하느님의 자녀임을 보여준다. 구심기도의 가장 뛰어난 현대의 스승들 중 하나인 배절 페닝턴(Basil Pennington) 신부는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아버지는 자기의 어린 아들이 그의 장난감과 친구들을 떠나 자기에게로 달려와 자신의 팔에 메달릴때 기뻐하게 된다. 그는 자기 아들이 주위를 둘러보는지, 하나의 사물에서 또다른 사물로 주의를 집중시키는지, 또한 그가 자기 아버지께 몰두하는지 또는 잠을 자기 위해 안정되어 있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그 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사랑, 관심, 안정에 대한 확신으로 자기 아버지와 함께 있고자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의 그러한 휴식은 그렇듯 많은 사람들을 무능케 하는 부정적인 자아상(自我像)에 대한 하나의 강력한 치료제이다. 우리 자신이 "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를 대단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할지라도, 구심기도 중에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하느님께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내적 상처를 치유하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큰 일들을 할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구심기도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냐고 묻는다. 이러한 형태의 기도가 적합하지 않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 번째 부류는 하느님과 그들의 관계에 있어 유일한 관심사가 '최소한의 의무'를 채우는 데 있는 가톨릭 신자들이다. 그들의 종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율법의 종교이다. 그들은 구심기도의 기초인 하느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성서독서, 충실한 성사생활, 추론적인 묵상, 그리고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보다 더 관대해 지고자 하는 노력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됨으로써 이러한 사랑을 향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

 

구심기도는 또한 다른 형태의 기도들 예컨대, 묵주신공, 추론적인 묵상, 은사적 기도, 또는 교회에 의해서 공인된 어떤 다른 종류의 기도들로 위안을 얻는 사람들에게도 적합하지 않다. 모든 이를 위해 유효한 하나의 기본 규칙이 있다: 당신이 할 수 있을 때 기도하시오.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없을 때 기도하지 마시오.

 

모든 시대에 가톨릭의 위대한 기도의 스승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즉 하느님과 그들의 관계를 심화시키고자 진지하게 갈망하는 사람들(달리 말하자면, 율법의 종교에서 사랑의 종교에로 나아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추론적인 묵상을 실천할 수 없음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관상에로 불리고 있다. 구심기도는 이러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하나의 단순한 방법이다.

 

 

초심자를 위한 규칙

 

우리가 구심기도를 시작할 때, 다음 두 가지가 중요하다. 즉 몸의 자세와 규칙성이다. 구심기도를 위해 정해진 자세는 없지만, 긴장과 과로를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척추를 곧게 세우고 앉는 것이 가장 좋다. 긴장을 풀고 편안한 자세를 취해야 하며, 흉식호흡이 아닌 단전호흡을 해야 한다. 등과 허벅지, 그리고 무릎을 잘 지탱해 주는 견고한 의자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좋다.

 

규칙성은 기도의 규칙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고 싶을 때만 기도한다면 우리는 별로 진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무미건조함을 느낄 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도하고자 노력할 때 시련이 온다. 이것은 우리를 영적으로 진보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인 기도 규칙을 세우는데 있어 너무 많이 시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에 10분, 일주일에 5일 충실히 실천하는 것이 7일의 분량을 일주일에 두 번에 시도하여 우리가 너무 많이 시도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포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다.

 

모든 위대한 일에서와 같이 영적인 일들에서 우리는 천천히 시작할 만큼 충분히 인내롭고 겸손해야 한다. 스위스의 전문 등반 안내자들은 언제나 초보 등반인들을 가려낼 수 있다. 초보자들은 너무 빨리 시작한다. 경험 있는 산악인들은 매우 천천히 등반하지만, 피로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다. 따라서 기도의 규칙을 세우는데 있어 우리가 쉽게 지속해 나갈 수 있는 확실한 규칙을 세우고자 노력해야 한다. 여러달 동안 매우 적당한 목표를 위해 충실히 노력한 후 그것을 늘이는 것을 고려해도 좋다. 처음에는 쉬운 것처럼 보이던 것이 오랜 시름 끝에 종종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작은 것은 작은 것이다. 그러나 작은 것에 충실함은 큰 것이다.

 

몸의 자세와 규칙성에 대한 이러한 의견들은 단지 지침(指針)일 뿐이다. 이 지침은 각 개인에게 적용될 필요가 있다. 기도 중에 각자가 체험한 영적인 지침은 하나의 큰 도움이 된다. 당신을 그러한 지침에로 이끌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라. 만일 당신이 신앙과 인내심을 갖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에 대해 보다 깊은 독서를 위한 제시들이 뒤에 주어져 있다.

 

당신이 영적 여정에 착수하거나 또는 당신이 이미 시작한 여정을 계속할 때, 당신은 어려움과 실패를 예상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들을 인내롭게 극복하고자 하는 투쟁이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너희는 모르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힘이 솟구쳐 피곤을 모르시고,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겠고

장정들도 비틀거리겠지만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 나리라.

날개쳐 솟아 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이사 40,28-31

 

보다 깊은 독서를 위한 안내:

- Johnston, William, ed. The Cloud of Unknowing and The Book of Privy Counseling. Garden City,N.Y: Image Book, Doubleday & Company, 1973.

- Pennington, M. Basil. Centering Prayer: A New Approach to Meditation. Garden City, N.Y: Image Book, Doubleday & Company, 1980.

 

(Hughes, J. John. Centering Prayer: How to Pray from the Heart. U.S.A. 1981. 전문 번역)

 

[글 John Jay Hughes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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