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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전환기 기도의 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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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6 ㅣ No.286

전환기 기도의 정립

 

 

기도는 인간이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여 흠숭과 감사, 속죄와 청원을 발하는 종교 내지 신앙행위의 한 표현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그리고 기도는 언어로 표현되는 염경기도와 무언의 묵상 내지 관상기도로 대별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유형의 기도 속에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신앙행위가 명시적으로 표현된다. 기도가 이처럼 신앙생활의 본질을 구현하기에, 기도는 곧 신앙인과 비신앙인,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신앙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 기도가 오늘날 다양하게 의문에 처해지고 있다. “오늘날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기도가 여전히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참된 신앙인이 되고자 아직도 기도를 포기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비하여 기도의 형식과 요소에 대한 물음은 지엽적인 문제이므로 우선 오늘날  기도에 가해지는 비판을 먼저 간략하게 다루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수행되는 두 가지 유형의 기도관을 개괄적으로 약술하려 한다. 이어서 중심내용이라고 할 만한 전환기의 바람직한 기도의 관계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1. 기도의 문제성

 

하느님의 존재가 사회의 공동의식 속에서 자명하게 인정되었던 시대에는 기도하기가 쉬웠고 기도가 무엇인가를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신앙인이면서도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며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라고 물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과학과 기계기술이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을 거의 지배하는 이 시대에는 하느님의 발자취보다 인간의 업적이 더 많이 세계 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연세계는 유용도(有用度)의 관점에서 인간을 위해 철저히 도구화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실재는 측정이 가능하고 조형이 가능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은 인습적인 행동과 타성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온갖 생활영역에 자리잡고 있는 법칙을 따르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인간화되고 세속화된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기도의 위기는 우선 인간의 실재이해가 급변하였기 때문에 야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계적인 인과관계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은 삶 속에서 부딪치는 갖가지 문제들을 종교적으로 해결하기보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다. 벼락으로부터 보호되기 위하여 기도하는 대신 피뢰침을 사용하는 것이 그 한 예이다. 현대인들은 이처럼 인간의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해주는 과학의 힘에 모든 것을 의지하며 생활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는 기도가 아무런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로부터의 도피로 보일 수도 있다. 즉 기도가 신앙인으로 하여금 이웃과 사회를 위한 인간적인 책임을 소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브레흐트(B.Brecht)의 작품 「어머니의 용기」(Mutter Courage)에서의 한 장면은 이 문제를 극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이 작품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H시 교외에 살고 있는 몇몇 농부들은 적군들이 밤중에 H시를 기습공격하려는 것을 알고 몹시 당황한다. 그러나 농부들은 기습당하게 될 H 시를 위한 아무 조처도 취할 수가 없노라며 기도만 바친다. 그러데 그중에 벙어리였던 캐트린이라는 한 소녀가 북을 울려서 시의 수직군들을 깨웠으므로 시민들은 구출된다. 그러나 캐트린은 적에게 사살된다. 이 경우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키는 행동 대신 피안으로부터의 도움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알리바이가 된다.

 

이외에 기도를 극단적인 이기주의적 행위라고 지적하는 반론도 있다. 기도는 하느님이 당신의 세계통치를 기도자의 소원에 좌우되게 할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이기주의적 행위라고 비판된다. 또 인간은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이를 행사하려 드는데 이러한 기도는 자칫 마술에 가깝게 된다. 하느님이 기도자에 의해 요청되고 호출되기 때문이다.

 

기도에 대하여 과학적 무지와 무책임성과 이기주의라고 비난하는 이면에는 보다 심각한 신학적 기본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개념과 세계에 대한 현대인의 관계이다. 현대인은 이 세계가 독자적인 법칙에 따라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 안에서 재래적인 기도의 전제들은 붕괴되고 만다. 하느님이 세상사에 직접 개입하여 기아와 빈곤, 질병과 죽음, 홍수나 지진 등과 같은 재앙을 일소하시리라고 진지하게 확신하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없다. 세계는 전적으로 세속적이 되었으며, 그러한 세계는 인간의 책임에 내맡겨져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이러한 실재이해가 기도에 관하여 새로운 견해를 지니도록 요청한다. 인과율에 입각하여 증명된 전통적 유신론에서의 하느님이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2. 대조되는 두 기도관(祈禱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배적인 그리스도교의 신심에 의하면 기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대화이다. 여기서는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인격성과 이로부터 따라오는 일차적인 직접성이 기도의 전제로 규정되고 있다. 즉 하느님이 온전한 인격이시라는 점이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출발점이 된다. 하느님은 인격체로서 직접적으로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이다. 하느님은 인격체로서 이야기를 걸 수 있고, 면담을 허용하시고, 아버지에게 하듯이 취지와 소청을 말씀드릴 수 있는 분이다. 여기서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신뢰와 친숙함이 지배하고 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인간은 자녀이다. 지상의 아버지들이 자녀의 청을 들어준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어떻게 이를 채워주시지 않을 것인가? (루가 11,9-13 참조) 여기서는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마태 7,7)라는 순진한 확신이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신앙인은 하느님의 손에 의하여 인도되고 있으며, 자신의 힘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예측한다. 그는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예속시키고, 예수의 이름으로 청하는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청허(聽許)되리라는 확신 속에서 생활한다. 그 스스로는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 안에서 기도하는 분은  그리스도의 성령이라고 믿는다(로마서 8,26 참조). 이러한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데에서 시작하여, 절대적 확신과 신뢰에로 성장하고, 하느님의 성의(聖意)에로의 무조건적 봉헌 속에서 완성된다. 이 기도는 항상 하느님의 임재(臨在)와 현존을 전제한다. 이처럼 기도는 신앙의 구현이다. 이 단계에서는 마치 하느님을 인간처럼 의인화(擬人化)하여 기술하는 성서내용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 존재론적 해석은 기도의 완전주의라 할 만한 관점에로 이끈다.  자녀가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아버지 하느님의 임재를 체험한다. 여기서는 의심이 들어설 자리라고는 없다. 의심은 어리석은 불신앙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재래적인 기도관에 대조되는 견해가 그리스도교계의 일각에서 대두되고 있다. 의인화한 하느님의 인격성을 의문시하면서 성서에서 묘사되는 인간과 하느님간의 관계를 하느님의 인격성에 대한 존재론적 진술로 들어올리고 이를 유일한 그리스도교적 진술로 만드는 것을 비판한다.

 

이 새로운 기도관에서는 기도가 구체적인 인간의 일상적 체험과 긴밀히 유대되어 있다. 기도가 하느님을 상대방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행위라기보다 인간 자신의 사유와 체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사념(思念)이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사념 가운데에 절대적인 존재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존재는 ‘당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인격적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물음으로서 그리고 신비로서만 나타난다. 이에 의하면 기도는 체험이 사유되고, 사유된 체험이 이야기되는 하나의 사고행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더 이상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대화가 아니다.

 

그러나 진정 기도 속에서 인간존재의 근본적 성취가 이루어 진다고 보여진다.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을 언어로 이끈다는 것을 뜻한다… ‘주의 기도’ 속에서 우리 자신이 언어화된다. 아주 먼 하늘에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우리, 하느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필요로 하지만, 곁에 모시고 있지 않은 우리, 굶주리고 잘못을 짊어지고 유혹에 빠져 있는 우리, 이를테면 우리의 기도 내용은 우리 자신이다.”

 

이제 기도 속에서 하느님께 영향을 미치려는 소원은 사라진다. 여기서 인간은 곤궁한 자로서, 아직 체념하지 않고 희망하는 자로서 마음속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기도는 아주 깊은 인간적 행위이며, 예수의 삶 속에서도 주역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하느님이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방으로서 기다려지지 않는다. 청원기도는 인간의 상황을 하느님께 들어올리고, 이 상황을 기도자로 하여금 숙고하여 의식하게 하며, 다른 인간들의 운명이 좌우되는 사건에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것을 뜻한다. 기도는 참여자들로 하여금 보다 인간적이게 하고, 여하한 조력행위에도 보다 개방적이게 하여 세계가 개선되도록 함께 기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기도는 종교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 종교적이라는 말은 세속적이라는 말과 반대되는 의미로 이해되고, 세속과는 대조되는 삶의 특수 부분에 관련되어 있고 거룩한 장소에서 행하여지는 일들을 모두 포괄한다. 그러나 성공회의 주교 로빈슨(J.A.T. Robinson,1919-)에 의하면 세속적인 것은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심층으로부터 분리되고 이탈된 세계를 의미하며, 성스러운 것은 세속적인 것의 심층을 뜻한다. 그러기에 기도의 목적은 세속적인 것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세속적인 것의 피상성을 꿰뚫고, 이를 그 이탈상태로부터  구속할 수 있는 자를 향하여 자신을 개방시키는 데 있다. 이제 기도는 이 세속을 떠나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속을 통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위해 내 심혼을 기울일 때,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하느님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하느님의 영’이 말로서는 표현될 수 없는 우리의 신음을 기도로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순간, 즉 이 구체적인 산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기도는 나의 전부를 가지고 남을 만나야 하는 책임, 조건적인 것 안에서 무조건적인 것을 만나며, 이 길을 떠나서가 아니라 바로 이 길에서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이와 같은 책임에 대한 연습 또는 심층에서의 내적 잠심(潛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기도는 남을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남 안에서 인식하며, 일상생활을 그 심층에서 체험함을 뜻한다. 그리고 기도는 공간적이나 시간적 또는 대상적으로 한정된 행위가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 즉 깨어 있음과 수면, 노동과 오락, 생산과 소비를 포괄하는 어떤 것이다. 여기서는 세상과 동료 인간을 지나쳐 가는 비약적인 기도는 부정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관상기도의 핵심인, 그리스도를 보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길 자체도 이웃, 즉 ‘가장 가까이 있는 너’를 무조적 사랑하는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3. 전환기 기도의 정립 시도

 

신과 인간과의 일차적인 직접성 속에서의 재래의 인격적인 기도관을 오늘날 아무런 이의 없이 통용케 할 수는 없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도관에는 현대의 삶의 체험과 이로써 야기된 급변한 기도상황이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종교적이고 순전히 인간학적인 기도관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할 수도 없다. 여기서는 기도의 본질적인 차원들로 ‘하느님의 죽음’이거나 ‘종교시대 이후’ 등과 같은 유행어들로써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이 기도관에서는 성서적 근거도 빈약하다.

 

이에 반하여 하느님께 향한 의탁행위로서의 기도를 시련과 회의를 통해서 가능케 된 ‘이차적 직접성 속에서의 기도’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기도관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과학과 기계기술이 지배하는 선진산업사회를 살아가면서 인간은 보다 더 자신의 비구원과 실재의 비통합성을 체험하고 있다. 사회의 비인간화와 다양한 형태의 부조리, 그리고 범람하는 환경오염과 문명질환 속에서 인간은 소외된 삶을 영위한다. 그리고 사랑과 신의, 기쁨과 공포, 실망과 질투와 고독 등과 같은 실존적인 문제들은 합리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는 현대에도 인간의  삶에 여전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처럼 소외된 실재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의 기본상황은 고금을 막론하고 도움과 구원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에 내재하는 고독과 죽음과 같은 소외나 인간에 의해서 야기된 역사적인 소외상황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자기를 완전한 자유에로 해방시켜줄 ‘질적으로 다른 절대자’를 동경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걸인’이다. 이 기본상황에서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인간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걸인이 백만장자라고 망상하는 것보다 더 가관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이 외견상 부재하는 듯이 보이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무신론이 팽배하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은 도전당하고 시련에 직면하여 있다. 기도는 숨어 계신 하느님께 일단 자신을 내맡기는 신앙행위에 속한다. 그러나 신앙인이라고 해서 기도해야 할 내용을 환히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 시련에 처할 때는 기도 역시 이러한 시련 속에서의 기도임을 보여준다. 예수는 작별인사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이름으로 바쳐지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청허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요한 16,23; 루가 11,9.13). 그런데 이 약속이 십자가의 면전에서,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만사를 상실한 처지에서 발해지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바쳐지는 기도는 십자가의 면전에서 그리고 십자가의 조건하에서의 기도이다. 만사가 베풀어질 것이라는 약속은 역설적으로 전적인 거절과 함께 서 있다. 수난의 잔은 지나쳐 가지 않기 때문이다(루가 22,42). 바울로 역시 자신의 기도의 불확실함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2고린 2,7-9). 우리의 나약함과 시련당함이 기도상황의 성격도 형성한다. 또한 죄인으로서도 항상 기도하고 청하는 우리 마음안에는 신앙과 불신앙이 공존하고 있다(Simul justus et peccator). 때문에 기도란 단절되지 않은 신앙의 표현인 것만은 아니다(“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기도가 하느님과 나누는 신앙의 언어라는 것이 이론상으로는 맞을는지 모르나, 실제로는 아주 다르게 보여진다. 즉 기도 속에 신앙이 이론적으로 언어화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실재 속에서 시련받는 구체적인 신앙인의 자아가 언어화되는 것이다.

 

시련에는 회의가 따른다. 이 회의는 하느님과 관련하여 그의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행동을 의문에 붙이는 회의이다. 지금도 여전히 기도하거나, 기도하기를 이미 포기한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다음의 물음은 스스로를 시험케 한다: “우리는 기도하였지만 하느님은 응답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절규하였으나, 그는 벙어리인 양 잠잠히 계셨다… 우리는 우리의 청원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기에!” 이어서 하느님의 침묵했던 상황들이 열거된다: “기아로 죽어 가는 유아들, 능욕 당한 처녀의 비탄,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구타당한 어린이들, 수탈 당하는 작업 노예들, 기만당한 부인들, 불의에 시달리는 사람들, 파산자들과 불구자들을 위한 기도가 청허되지 않았을 때 …” 그렇다면 항상 찬미되는 하느님의 도움의 손길은 어디 있는가?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제기되는 회의를 불신앙이라고 낙인찍고서 그런 것은 기도가 아니라고 단정해야 할까? 아니면 이러한 회의도 기도 자체의 한 현상으로 간주해야 될 것인가? 여기서는 후자의 입장이 해답인 것처럼 보인다. 예레미야서와 욥기에서는 시련과 회의, 불신앙과 고발, 반항과 기도가 뒤섞이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해야만 아직도 기도가 가능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하느님의 부재나 죽음에 관해서는 거론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의 침묵에 관하여는 말할 수 있다. 실제로 하느님이 침묵하신다는 사실은 새롭지 않다. 우리는 구약에서 시련 당하는 사람들의 비탄을 쉽사리 들을 수 있다“ 야훼…이 몸이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귀를 막지 마소서.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이 몸은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사람과  다름없사옵니다.”(시편 28,1). “야훼여,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히 계시렵니까? 나의 주여, 제발 모르는 체하지 마소서”(시편 35,22).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 적들 앞에 서시고 저들이 그를 비난하고 정죄(定罪)하며 조롱하는 현장에서도 하느님은 침묵하신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고통스러운 절규를 내뱉는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르 15,34) 이때에도 하느님은 침묵하신다.

 

이처럼 하느님이 침묵하시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날 극도로 날카롭게 체험하고 있다. 우리가 고통스럽게 체험하는 하느님의 침묵은 우리가 이미 항상 알고 있었으면서도 망각하였거나, 충분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하느님의 이타성(利他性) 내지 탁월성이 무엇인가를 새삼 깨닫게 한다. 하느님은 현세 재물과 권력을 증가시키고,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시는 긴급사태의 구호자이거나, 인간이 바로 알지 못하거나 행하지 못하는 곳에 나타나 메워주시는 임기응변의 신(Deus ex machina)이 아니라는 것을 하느님의 침묵으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침묵으로 인하여 생겨난 시련과 회의가 극복된다면, 이 경위는 하느님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처지에 이르게 된 기도자에게는 하느님께 향한 새로운 직접성이 주어질 수 있다. 이렇게 시련과 회의 속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직접성을 이차적 직접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느님께의 헌신과 신뢰는 일차적 직접성의 순진한 단계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시련과 회의를 거친 이차적 직접성의 단계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헌신과 신뢰는 가능하다. 시련과 회의, 불신앙과 죄, 투쟁과 신고(辛苦)를 자체 안에 통합한 실존단계를 하느님께로의 이차적 직접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단계에서 행하여지는 기도를 성숙한 기도라 할 수 있다. 이 이차적 직접성 속에서의 기도가 인격적 기도의 형식으로 새롭고 적절하게 표현될 수 있다.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당신’이라고 부르며 인격으로 대할 수 있는가는 신중히 취급해야 할 문제이다. 인격은 타인격과의 구별을 뜻하며 유한성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인격범주를 하느님께 적용할 때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인격적 인간의 최종근거가 비인격적인 물(物)실재라 할 수는 더욱 없는 일이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격들이 만나는 유비적(類比的) 양식으로 인간과 만난다. 우리는 인격범주의 비적합성을 알면서도 보다 적합한 다른 용어를 알지 못하기에 인격적 호칭으로 하느님을 대하고 묘사할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도 하느님의 호칭으로서 ‘아빠,아버지’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가장 확실히 드러난 성서증언에 속한다.

 

우리는 오늘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자명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인간 존재와 함께 소여된 유한성과 소외 속에서 인간이 자포자기를 하지 않고, 자기 존재와 세계의 의미를 긍정하면서 생활하고, 여기서 그를 존재케 하는 파악할 수 없는 신비와 해후하고 있다고 체험할 때에 하느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체험하고 기도를 성취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의식하건 않건 상관없이 이 신비의 지평하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이 기도를 가능케 하는 상황이다. 기도 속에서 하느님 지향의 인간관련성이 표출된다.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는 존재자임을 의식하고,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받아들이기 위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길 때에 신앙행위와 기도가 성취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께로의 의탁행위가 이루어질 때에, 하느님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무조건 내맡기고 신뢰하는 인간은 구체적 인간이다. 그는 일상적이고, 세속적이요, 통속적인 삶의 요청과 두려움을 지닌 인간이다. 유한한 이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하느님이 누구이며, 자신이 누구인가가 명백히 드러난다. 그렇지만 구체적 청원이 언제 어떻게 허용되는가는 이차적인 문제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청원하는 특정한 현세적 선과 자산(資産)들이 더 이상 절대적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된다. 인간이 자신의 온 존재를 하느님께 내맡겨 부분적이고 개별적인 세력에 예속되지 않을 때에 인간은 비로소 자유에 이르게 된다. 만사가 -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 세력이나 무력,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적인 것이 절대적이기를 멈춘다. 하느님께 의탁하는 행위인 참된 기도 속에서 인간은 현세에 있으면서도 궁극적인 종말론적 그리스도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는 흠숭과 감사, 속죄와 청원을 모두 포함하는 기도일 것이다.

 

 

4.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기도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대한 경외를 언행으로 표시하는 종교행위들은 인류역사의 시작과 함께 계속되어 왔다. 따라서 종교행위의 본질을 구현하는 기도는 인류가 생존하는 어느 것에서나 바쳐져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비단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도 기도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비그리스도인은 우리 그리스도인과는 다르게 하느님의 실재를 이해하거나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며 구세주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은총은 창조 이래 존재하는 모든 실재의 진수(眞髓)이다. 어떠한 일도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전혀 무관한 상태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비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현존재와 인류를 신앙과 희망과 사랑 속에서 영원한 신비에 감싸여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명을 죽음의 내부에서 지탱되고 있는 신비로 받아들인다면, 그 자신은 알지 못하더라도 인류의 일원인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 아들 속에서 인간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바치고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 우리의묵상이나 관상기도도 결국에 가서는 바울로가 요약하는 저 복음의 진수를 구현하는 데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 5).

 

그리스도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한다는 것은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골로 3,9 :에페 4,22),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로마 13, 14 ; 갈라 3,27),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필립 3,10). 그리스도의 자태는 일차적으로 관조(觀照)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상대방이려 하기보다는, 우리 자신 속에서 당신의 자태를 드러내려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지상목표에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6-8). 이러한 하느님의 ‘비허’(卑虛, κ?υωσι?) 모습이 바로 인간이다. 하느님 비허의 정점은 하느님의 자기 비허와 인간의 자기 비허가 극단적이고 전적으로 상응하는 데에서 구현된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자기 비허가 부합되고 있다. 세계에로의 하느님의 비허에 극단적이고 전적으로 상응하는 인간의 비허는 성부께 대한 예수의 전적인 헌신의 순명 행위로 구현된다. 이 순명의 삶은 예수의 죽음 속에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의 정체는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계시된다. 그리고 죽음[허무]속에서 영생[충만]에 도달된다는 역설적인 구원의 진리가 계시된 것이다.

 

우리는 죽음 속에서 도달되는 영원한 삶에 이르기 위하여 비허의 삶, 십자가의 삶을 살도록 불리웠다. 이 자기 비허의 삶은 예수의 생애가 보여주듯 소외된 현세로부터 벗어나 홀로 자아 속으로 침잠하여 자족하는 고고한 삶이 아니다. 이 삶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나머지, 소외된 실재 속에서 시달리는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악의 세력에 의하여 수난을 다하고 죽음에 처해지는 위타적(爲他的) 자기 비허의 삶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자기 비허가 우리 자신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묵상 및 관상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철저한 자기 비허에 이르러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생활 속에서 이를 구현할 수 있도록 행해져야 할 것이다.

 

비그리스도교의 기도형식 중에는 심신 집중에 의한 철저한 자기 각성(自己 覺醒)을 통하여 온갖 유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활케 하는 데 이바지하는 특정양식들이 있다. 힌두교에서 주로 실천되는 요가(yoga)와, 불교에서 실천되는 선(dhy?na: 드야아나, 禪那)이 대표적인 수행방법이다. 요가에서는 꽤 어려운 몸의 자세, 호흡 및 집중양식이 요청되며, 선에서는 이보다는 간단한 묵상자세가 있다. 불교도들이 행하는 염불이나 간경(看經)도 앉거나 서는 간단한 자세로써 순수한 집중을 거쳐 마음을 맑게 한다[自淨其意]. 요가나 선, 염불이나 간경과 같은 기도를 통하여 사람들은 모든 사물에 대한 집착을 끊고 마음을 비워서 열반의 경지에서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소승교(Hina y?na)에서는, 열반이 “소극적이며 이기적이어서 작고 옅은 것”이라 일컬어지고, 대승교(Mah?y?na)에서는 열반은 “적극적이며 이타적이어서 크고 참된 것”이라고 평가된다. 한 중생도 남김없이 제도(濟度)한 후에야 자기가 성불하겠다는 비원(悲願)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기도의 관계를 피상적으로 일별하는 지금, 서로 관련되는 교리 내용을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도가 이루어지는 과정과 기도를 통해서 도달되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위에서 열거한 비그리스도인의 기도 사이에 우연이라 할 수 없는 놀라운 공통점들을 본다.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워서[卑虛] 그리스도로 하여금 생활하도록 기도를 통하여 노력하는데, 힌두교들이나 불교도들은 선이나 염불 등을 통하여 자기를 비워서 구원의 경지에 이르려한다. 죽음[無]에까지 이르는 자기 비허를 통한 자아구현이라는 역설적인 구원의 진리가 이렇게 상이한 종교의 기도 속에서 함께 추구되고 있는 것이다.

 

수년 전부터 수도자들을 포함하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요가나 선과 같은 비그리스도교적 묵상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일부 그리스도교 신비가 내지 영성가들이 요가나 선의 방법을 이용하여 기도를 실천하고 전수하기도 한다. 바로 비그리스도 종교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우리가 여기서 언급된 문제들을 아직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하지 못하고 있음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루라도 속히 이 방면의 연구가 전개되어, 하나의 구원진리를 추구하는 다른 구도자들과의 형제애가 넘치는 대화와 교류가 이루어지기를 희구할 뿐이다.

 

 

5. 맺는 말

 

우리는 인간이 실재세계의 운명을 수중에 널은 듯이 살아가는 세속화 시대에 기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고찰하였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이 침묵하신다고,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상황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느님께 말씀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인간의 잠잠함이 오히려 침묵 중에 듣고 계신 하느님 앞으로 이끌리어 기도가 될 수 있다. 이 잠잠함이 기계적으로 경문을 외우는 형식적 기도보다 진실한 기도일 수 있다. 실상 기도가 될 수 없을 인간적 상황이란 없다. 즉 하느님께 다다를 수 없는 인간적 상황이란 없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어 우리에게 다가와 있는 손을 잡으면 된다. 하느님에 대해 묵묵한 현세대에 어떤 양식으로든 다소간 우리도 참여하고 있으므로 이 잠잠함이 우리를 통하여 기도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는 온 시간을 오로지 자신들을 위한 시간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우리의 시간을 하느님의 시간이 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 침묵하는 가운데 만사를 선하게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 시대의 침묵이 변모하고, 우리를 변모시키고, 세계가 변모함을 보게 될 것이다.

 

* 각주가 첨부된 내용은 첨부 파일을 참조하세요.

 

[심상태 신부 /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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