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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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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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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7-16 ㅣ No.285

[기도, 한 걸음 더] 주님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하지만 ‘주님의 기도’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바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 가지만 생각해 보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하늘’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구름 위 저 높은 곳을 말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고층빌딩에 살거나 옥탑방에 사는 사람이 하느님과 더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일까? 이 같은 궁금증도 풀고, ‘주님의 기도’에 담긴 의미를 더 잘 이해하고자 교부들을 찾아가 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주님의 기도’는 전반부와 후반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에는 하느님께 대한 세 가지 청원 내용이 들어있다. 첫 번째 청원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이고, 두 번째 청원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이고, 세 번째 청원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이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현세 삶에 필요한 네 가지 청원 내용이 담겨있다. 첫 번째 청원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이고, 두 번째 청원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이고, 세 번째 청원은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이고, 네 번째 청원은 “악에서 구하소서.”이다. 이 가운데 중요한 몇 부분만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특권이며 이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이들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이 같은 특권을 믿음의 어머니인 교회로부터 배운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아우구스티노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하늘’을 단순히 공간적인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만일 하늘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새들이 우리보다 하느님과 더 가까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하늘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거룩함과 의로움이 다스리는 곳’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과 겸손한 이들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마음이 부서진 이들과 겸손한 이들이야말로 하늘에 있는 이들이며 하늘 가까이에 있는 이들인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가 자신 안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의 영혼 안에서 다스리신다고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또한 치프리아노는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이시라고 강조한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거룩해지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나날이 우리 안에서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라고 치프리아노는 말한다. 교부들은 우리의 기도로 하느님께서 거룩해지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하게 우리가 살아야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삶을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테르툴리아노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다거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려면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의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듯이 죄인들도 회개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의인들뿐만 아니라 죄인들까지도 회개하여 모든 이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과 같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교부들은 “일용할 양식”이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기르는 ‘참된 양식’이며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라고 설명한다. 구원의 성찬인 이 양식을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는 유혹에 떨어지지 않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 많은 교부들이 이처럼 “일용할 양식”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하루치 양식’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양식만을 청하기를 바라신다고 설명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치프리아노는,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날마다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비록 우리가 세례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 할지라도, 세례 이후에 계속 죄를 짓기 때문에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계속해서 바쳐야 한다고 설명한다.

 

날마다 용서해 달라고 청하는 이 기도는 믿는 이들만이 바칠 수 있는 기도이다. 또한 용서를 청하는 이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양육하는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나날이 용서를 발견하는 믿는 이들의 기도이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세례 이후에도 계속해서 용서를 받게 된다.

 

교부들은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곧 나에게 잘못한 이를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로부터 나 자신도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용서할 때 하느님을 가장 닮게 된다고 말하고, 테르툴리아노는 이미 저지른 죄의 용서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십사 하고 우리는 기도한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노는 우리가 하느님께 이미 용서를 받았으므로, 용서에는 남을 용서하겠다는 하느님과의 확고한 계약이 담겨있다고 설명한다. 만일 이 계약을 소홀히 한다면(곧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모든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큼 중차대한 계약이 바로 이 계약인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을 닮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설명하면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가장 큰 죄라고 강조한다.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받았으므로,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용서해야 한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때, 하느님을 가장 빨리, 가장 쉽게 닮고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고 하느님을 닮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인간이 감히 하느님과 조건부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것은 이 기도뿐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해 왔다.

 

그러나 테르툴리아노는 이 같은 ‘소극적이고 약간 부정적인 뉘앙스’(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구태여 시험해 보시려고 그렇게 하셨을까?)를 풍기는 해석이 아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해석(“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만을 편애하시고 총애하신다.”는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시기 위한 것)으로 설명한다. 곧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라 입증해 주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이 한마디는 우리의 모든 청원이 포함된 말이다. 왜냐하면 악에서 벗어나 구원받는다면, 더 이상 청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짧은 청원은 하느님께 올리는 우리의 모든 청원을 포함하는 말이며 요약하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이 잘못된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던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일에 대해선 결코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우리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다. 그것은 하느님께 상습적으로 거짓말하고 사기를 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주님과 조건부 계약을 맺는 청원기도, 곧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라는 기도는 말 그대로 ‘저희가 용서했으니, 하느님께서도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조건부 청원기도이다. 이 말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용서를 결코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 노성기 루보 - 신부. 1993년 사제품을 받고 로마 아우구스티노 대학에서 교부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영국에서 ‘영성상담 지도자과정’을 연수했다. 광주 풍암동성당 주임을 거쳐 2001년부터 광주 가톨릭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학원장 겸 교학처장을 역임했고 현재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0년 7월호, 노성기 루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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