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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예수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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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7-06 ㅣ No.284

[기도, 한 걸음 더]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7-8).

 

복음서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기도의 여러 모습들을 살펴보고 그분께 기도를 배우고자, 히브리서의 이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아본다. 이 말씀을 떠올리면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우리는 기도에서 하느님의 역할과 예수님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고 예수님의 역할이 거의 기도를 “하는” 편이라기보다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기도를 하셔야 했으며, 그분의 기도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아버지께 바치신 아드님의 기도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에도 복음서들에서는 분명 예수님께서 자주 기도하셨다는 것을 증언한다. 일반적으로 기도라는 주제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다음 기도하셨고(3,21), 치유를 행하신 다음에도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으며(5,16), 산에서 기도하며 밤을 새우기도 하셨다(6,12).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이나(9,20)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와 같은 중요한 사건들도,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에 일어났다(9,29). 겟세마니에서 하신 기도는(22,41.44) 이러한 기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들에서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할 수 있겠는데, 그 첫째는 하느님과의 친밀함이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에 하느님을 늘 “아버지”라고 부르신다. 기쁨에 넘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을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고 부르실 때에도 그러한 호칭은 “아버지”라는 평소의 호칭과 함께 사용되며(루카 10,21), “아버지”보다 더 친밀한 호칭인 “아빠!”라는 단어까지 사용하신다(마르 14,36). 이렇게까지 친밀하게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구약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겟세마니에서까지도, 아니, 그곳에서 더욱 예수님께서 기도를 드리는 하느님은 그분의 “아버지”셔야 했다(루카 22,42).

 

다른 한편으로,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은 아버지와 분명히 구분된다. 아들이신 예수님의 인간적인 의지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의지가 구분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예수님의 여러 기도들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사명을 시작하시기 전에 기도를 하시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 어떤 사명을 선택하거나 계획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당신 뜻에 따라 명하시는 것을 받아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기도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찾으셨고, 또 기도하는 가운데 그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시고 그 뜻을 당신의 뜻으로 받아들이신다. 예수님께서 기도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신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기도가 하느님 계시의 장소가 된다는 것은 찬미의 기도에서도 표현되는데, 루카 10,21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그분께서 “성령 안에서”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때문이고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이다.

 

기도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겟세마니의 기도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다. 이 기도는 더 자세히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여기서 “제 뜻”과 “아버지의 뜻”은 강한 대조를 이룬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고뇌에 싸이시고,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22,44). 여기서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아들의 순종”이다.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탁월한 의미로 하느님의 아들이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서두에 인용한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셔야”(히브 5,8)했던 것이다.

 

아드님이라는 친밀함과 고난을 통해 배우는 순종, 이것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아마도, 이 두 표현의 순서를 바꾸어놓음으로써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곧 당신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고 고난까지를 감수하는 순종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유일무이한 관계, 그 절대적인 친밀함 때문이리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아버지이시기에 그분 손에서 고통과 복종까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말이다.

 

 

기도를 가르쳐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당신의 모범을 통해서, 그리고 직접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심으로써(루카 11,1)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인 주님의 기도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펴볼 것이므로, 이 자리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예수님의 기도의 모범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에 질문을 한정해 둔다.

 

다시 루카 복음서로 돌아가면, 실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18,1). 겟세마니에서도 그분은 제자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당신과 함께 기도하기를 바라셨다(22,40.46). 그들도, 우리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기도하기를 바라신 것이다. 사실, 기도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과 인간적인 나의 뜻이 일치하지 않을 때이다. 이때에 우리는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행하실 수 있으려면 기도가 필요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는 기도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밀함을 확인하는 것이고 바로 그 친밀함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었기에, 기도는 그분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잔”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어떤 경우 반대의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고 아무런 갈등도 없어서 특별히 기도의 필요조차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올바로 식별하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새 “나의 뜻”이 “아버지의 뜻”을 대체하게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나의 뜻을 행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생략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신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겟세마니의 기도가 언급되지 않고 그 대신 17장에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바치신 긴 기도가 들어있는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 자신을 위하여(17,1-5), 곧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주시기를 청하시고, 그 다음으로 제자들을 위하여(17,6-19),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며(17,17),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 바로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신다(17,20-26).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청하신 것은 우리가 당신 안에 그리고 하느님 안에 있는 것,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다른 말을 덧붙이는 것은 사족이리라.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그것은 순종하시는 아드님의 모습이다. 아드님이시기에 더없이 하느님과 가까우시면서, 기도 안에서, 아버지와의 그 친밀함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시고 수락하시며 세상의 누구보다 깊은 순종으로 아버지께 대한 아들로서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이신 이 관계 안에 당신을 믿는 우리 모두를 끌어들이신다. 당신과 함께 있던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들까지도 당신 기도에 포함시키심으로써 말이다.

 

* 안소근 실비아 -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수녀. 성서학을 공부하였고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구약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히브리어를 강의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0년 6월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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