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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신약성경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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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24 ㅣ No.283

[기도, 한 걸음 더] 신약성경의 기도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기도, 특히 주님의 기도를 제외한 신약성경의 기도에 관한 원고 청탁을 받았다. 사실 신약성경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 특히 주님의 기도를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기에 그 부분을 제외한 신약성경에 나타난 전반적인 기도를 다룬다는 것이 좀 당황스러웠다. 며칠 동안 도서관, 시내 서점들을 다녔다. ‘신약성서’와 ‘기도’라는 주제를 가진 천오백여 권 정도의 책이 내 손을 거쳐갔다. 그러나 이 주제에 알맞은 자료가 아주 적다는 사실이 나를 더 당황스럽게 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전인적인 만남

 

기도에 관한 책들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기도는 꼭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과 기도는 응답받는다는 것이다. 기도의 형태에 대해 어떤 작가는 “기도는 전투”라고까지 말하기도 하는데 치유기도, 창조기도, 삶을 변화시키는 기도, 부르짖는 기도, 그리스도인의 땅 밟기 기도, 파수꾼 기도, 심지어 선제공격 기도 등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어떤 책들은 기도는 어떠한 형태이든 응답받는다는 것을 다루는데 그 가운데 재미있는 것 하나는 “하나님(하느님)은 뻔뻔한 기도에 응답하신다”라는 책으로, 표지에 아주 작은 글씨로 ‘결과 보장 못함’이라고 적혀있다.

 

이처럼 기도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개인적으로 기도는 하느님과의 전인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곧 하느님과 인간이 전 존재로 만나는 것이다. 하느님도 당신의 반쪽만 가지고 인간을 만나러 오시지 않고, 인간도 육체만 또는 영혼만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하지만 만남은 언어에 한정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만날 때 그 만남이 깊어지면 말하지 않고, 눈빛만 보아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적 통교가 없어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존재적 일치감을 맛본다. 무엇을 계속해서 설명해야 하는 관계는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 하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나를 잘 아시는 분인 하느님과의 만남인 기도는 전인적이다. 이 만남에서 하느님은 전적으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신다.

 

그러면 신약성경의 기도에 나타나는 기도는 어떤 것이 있을까?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기도를 크게 ‘마음으로 표현한 기도’, ‘감사의 기쁨을 드리는 기도’, ‘부르짖는 기도’, ‘이웃과 만나는 기도’, ‘함께 드리는 기도’ 등 다섯 가지로 나누어보았다.

 

 

다섯 가지 기도 유형

 

우선 ‘마음으로 표현한 기도’는 요셉(마태 1,18-25)과 하혈하는 여인(마르 5,25-34)에게서 볼 수 있다. ‘마음으로 표현한 기도’의 당사자들은 그들이 놓인 어려운 상황, 곧 요셉은 약혼자에게 파혼을 할 마음을, 하혈하는 여인은 병을 고치고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뒤 지친 마음에서 치유의 은혜를 언어적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표현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말로 표현하지 않은 그들을 만나시고 현실의 상황을 바꾸어 놓으신다.

 

‘감사의 기쁨을 드리는 기도’는 마리아(루카 1,46-55)와 시메온(루카 2,28-32)이다. 이 두 사람은 하느님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기쁨을 드리는 기도를 하고 있지만, 한 사람은 자신의 소명의 시작단계에서, 한 사람은 자신의 소명이 완수되는 단계에서 기도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받은 소명으로 어쩌면 목숨까지 바쳐야 할 수도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여 구세주를 잉태하게 될 소명을 주심에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기쁨을 드린다. 이에 반해, 시메온은 일생 동안 드린 기도에 대한 생의 마지막 시기에 받게 된 응답으로 감격에 찬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부르짖는 기도’는 예리코의 눈먼 이(루카 18,35-43)와 가나안 여자(마태 15,21-28)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 주위 사람들이 그들의 요구를 저지시키는데도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상황을 드러낸다. 주위 사람들은 당사자의 고통보다는 사회적 그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당사자들은 부끄러움도 없이 큰 소리로 말한다. 곧 그만큼 그들의 내적 상태는 부르짖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들은 응답받는다.

 

‘이웃과 만나는 기도’는 주로 사도행전에 많이 나온다. 사울(바오로)과 하나니아스의 경우(9,10-19),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10,1-33)이다. 하나니아스와 바오로는 기도 중에 서로에 대해 알게 된다. 코르넬리우스와 베드로 역시 기도 중에 서로를 만나라는 메시지는 들었지만 처음에는 그 이유를 다 이해할 수 없었고 이후 만남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서로를 알게 되고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된다.

 

바오로와 하나니아스,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는 처음에 그들 서로가 현실적인 만남을 가지기에 부적절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하나니아스는 바오로를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두려운 사람으로 여기고, 베드로는 코르넬리우스를 만나는 일에 대해 “유다 사람에게는 다른 민족 사람과 어울리거나 찾아가는 일이 불법”(10,28)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이들이 생각하는 모든 현실적인 장애는 극복된다.

 

또한 신약성경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이웃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다는 것도 보여준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와 실라스는 감옥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함께 있던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16,25) 있었다고 한다. 분명 바오로와 실라스는 자신들의 필요 때문에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 있던 수인들에게 그들의 기도가 영향을 주었음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함께 드리는 기도’도 사도행전에 많이 나타나는데 주로 공동체의 은사와 연관된다. 예수님 승천 이후 공동체가 함께 드릴 때 성령의 은총을 가득히 받고 선교를 담대히 할 수 있었다(4,31). 또한 공동체의 지도자를 선출할 때도(1,15-16), 협력자들을 선출한 뒤에도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였다(6,1-7).

 

 

더 크게 응답하시는 하느님

 

이 다섯 가지 범주에 들지 않지만 하느님과 개인의 만남의 예들은 많다. 살다보면 아무런 말도, 마음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냥 전 존재로 하느님 앞에 있을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이러한 예는 루카 복음서의 ‘죄 많은 여자’(7,36-50)에서 볼 수 있다. 본문을 보면 그 여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어떠한 생각을 했다고도 표현되지 않는다. 다만 그냥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고,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발라드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응답을 주신다.

 

마리아 막달레나 또한 자신의 슬픔에 젖어 예수님(하느님)께서 자신 앞에 서계시는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요한 20,11-18). 그러나 이런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자신을 먼저 드러내시어 눈물로 얼룩진 마리아의 애탄 마음에 위로를 안겨주신다. 기도는 우리가 어떤 정형화된 틀 속에 갇혀있을 때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먼저 드러내시어 우리를 그 속에서 빠져나오게 하여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모든 기도가 다 응답받지는 않는다. 2코린 12,8을 보면 바오로 사도는 세 번이나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간청하였지만 응답받지 못한다. 주님은 바오로가 기도한 그 몸의 가시는 없애주시지 않았지만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려주셨다. 바오로에게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라고 하신 것이다(2코린 12,9). 곧 바오로가 요청한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았지만 바오로에게 더 크게 응답해 주신 것이다.

 

 

기도는 있는 상황 그대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

 

인간이 하느님과 만날 때 만남의 대화가 언어일 수도 있고, 감사의 마음일 수도 있고, 어떨 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마저도 할 수 없어 그냥 존재 하나로 그분 앞에 있을 때도 있다. 신약성경은 하느님께서 위에서 언급한 것 가운데 어느 것을 더 선호하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인간이 그분을 만나러 온 상황 그 자체를 아무런 선입견이나 판단 없이 받아들이신다. 신약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전 존재, 있는 상황 그대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기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약성경에서 어린양께 바친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들은 성도들의 기도”(묵시 5,8)라는 표현이 있다. 그리고 ‘모든 성도의 기도’를 금 제단에 바침으로써 천사의 손에서 향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느님 앞으로 올라갔다고(묵시 8,3-4 참조) 한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이렇듯 귀하게 받으신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을 전인적으로 연결해 주는 강력한 연결고리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10;마태 7,7-11)라고 확실하게 말씀해 주셨다. 신약성경의 인물들은 그 하느님의 역동성에 힘을 받아서 자신들의 삶을 힘 있게 변화시켜가는 것을 보여준다.

 

하느님은 인간을 만나시고자 언제나, 어디서나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신약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다만 한 가지 ‘하느님은 조용한 곳과 고요한 소리’를 선호하신다는 것을 성인들을 통해 살짝 알려준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 허귀희 글라라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서울 공동체 책임자 수녀. 신약성서신학을 공부하였으며 예수회 영성 센터에서 ‘성서와 영성’을 강의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0년 5월호, 허귀희 글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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