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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계제도 설정 50돌 (상)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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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10 ㅣ No.494

[한국 천주교회 교계제도 설정 50돌] (상)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회

한국교회 교계제도 설정은 '순교자 피의 결실'


교황 요한 23세가 교황청에서 '1962년 3월 10일자로 한국 천주교회의 교계제도를 공식 설정한다'는 교황교서를 발표했을 때 세계교회는 "순교자들의 피로 거둔 결실"이라며 기뻐하고 축하했다. 한국 천주교회 교계제도 설정은 세계교회에서 한국교회의 주권을 인정받고, 보편교회가 이를 공식 승인했음을 의미한다. 이전의 한국 천주교회는 '명의 주교'가 교황을 대리해 관할하는 대목구 체제였다면 교계제도 설정으로 한국 모든 교구장 주교들은 '정주 주교'로 교구를 독립 관할하게 됐다. 교계제도 설정을 계기로 한국 천주교회는 다시 한 번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한다. 교계제도 설정 50주년을 맞아 '순교자들의 피의 결실 한국 천주교회 교계제도'를 기획, 두 차례에 걸쳐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회', '교계제도 설정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을 알아본다.


- 교황 요한 23세가 발표한 한국천주교회 교계제도 설정 교황교서. 제공=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고.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회와의 공식 관계, 즉 보편교회 안에서 개별교회로서의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한 것은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임명되면서부터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미 그 이전부터 교황청과 직ㆍ간접으로 일련의 관계를 맺어 왔다. 교황청 문서에 조선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659년으로, 중국 남경교구를 설정할 때 그 관할 구역에 '고려'란 지명을 포함시켜 가톨릭교회 공식 관할 구역으로 조선을 언급했다. 이후 1690년 북경교구 설정과 함께 1702년 교황청은 조선에 대한 재치권을 북경 주교에게 허락했다.

그러나 조선에 사제를 파견하는 일은 중국 땅에서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이라는 난공불락의 큰 빙산에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만다. 선교 보호권은 교황이 15세기 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 두 국왕에게 식민지 개척 독점권을 인정해 주는 동시에 그 지역에 대한 선교 활동도 의무적으로 병행하도록 부여한 권한이다.

선교 보호권의 남용과 두 나라의 쇠퇴, 수도회 간의 불화가 심해짐에 따라 선교 업무를 중앙에서 직접 관장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래서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재위 1621~1623)는 1622년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을 설립, 교구장이 상주하는 정식 교계 제도가 아닌 명의 주교가 교황을 대신해 교구를 관할하도록 하는 '대목구'제도를 시행, 난관을 극복하고자 했다. 포교성성의 이러한 노력을 두 국왕과 선교 보호지 주교들은 선교 보호권에 대한 침해로 단정하고 대목구장들을 노골적으로 배척했다.

이런 와중에 1827년 조선 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1824년 유진길ㆍ정하상이 신자들을 대표해 쓴 서한)가 포교성성에 당도했다. 이 편지를 읽은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은 마카오 극동대표부 제안대로 "조선을 중국인 사제에게 맡긴다면 결국 멸하게 될 것이기에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연인지 섭리인지 조선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카펠라리 추기경이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1846)로 즉위했다. 그는 교황직에 오르자마자 조선에 단 한 명의 주교나 신부가 없는 상태에서 '교황대리감목구'를 설정하고, 파리외방전교회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했다. 이같은 조치는 지금도 '파격'이라 할 만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특별한 배려였다.

포르투갈과 선교보호지인 북경교구의 반발도 만만찮았다. 포르투갈의 거센 항의에 교황은 "대목구장이 조선에 입국해야만 북경교구로부터 독립한다"는 조건부를 교서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 주교와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사들에게는 숙소뿐 아니라 먹을 것도 제공하지 말라고 관할 지역 신자들에게 지시했다. 이를 어기는 자는 '파문'할 것이라는 위협까지 서슴지 않았다.
 
결국 마카오에서 요동 땅까지 갖은 박해와 방해를 받은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객사했다. 다행히 포교성성은 브뤼기에르 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조선교구장직 승계를 보장하기 위해 앵베르 신부를 조선대목구 부주교로 임명하는 안전책을 마련해 뒀다. 앵베르 주교의 조선 입국으로 조건부로 내걸었던 조선대목구 독립과 파리외방전교회에 대한 조선대목구 관할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됐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조선 입국로를 확보하기 위해 브뤼기에르 주교가 생전에 제안한 만주와 요동 지방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해 1838년 '만주대목구'로 설정,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겼다. 이후 포교성성은 몽고ㆍ홍콩ㆍ하남ㆍ절강ㆍ귀주ㆍ서장ㆍ양광ㆍ호광ㆍ하북ㆍ하동ㆍ하서ㆍ강남대목구를 북경과 남경교구에서 분리 설정해 독립시켰다.
 
조선 천주교회는 유럽 선교사의 선교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역 서학서를 통한 자발적 연구 과정을 거쳐 믿음을 수용하면서 설립됐기에,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교황청이 조선에 대한 관할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다.
 
결국 조선 교회 탄생은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으로 인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선교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던 포교성성이 선교권을 되찾는 데 중요한 돌파구를 제공했다. 교황청은 한 명의 선교사도 없던 신생 조선 교회를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 아래 있던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된 교구로 설정하는 파격적 결정을 내리고, 조선대목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만주대목구를 북경교구로부터 분할하는 것을 시작으로 중국에서 선교권을 강화해 나갈 수 있게 됐다.
 
조선대목구 설정은 북경교구와 선교 보호권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며 중국으로부터의 독립도 의미한다. 또 로마교회에 결합하고 보편교회에 참여, 교류하게 됐고 개별교회가 설립됨으로 해서 천주교 수용이 완성됐음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조선대목구는 교황 비오 10세(재위1903~1914)에 의해 1911년 '경성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할됐다. 교황 비오 10세에 이어 즉위한 교황 베네딕토 15세(재위1914~1922)는 1920년 원산대목구를 설정, 1909년 한국에 진출한 독일 상트 오틸리엔 성 베네딕도수도회에 위임해 함경도를 관할하게 했다.

교황 비오 11세(재위1922~1939)는 1927년과 1928년에 연이어 평양과 북간도 '의란'과 '연길'에 지목구를 설정해 메리놀외방전교회와 베네딕도회에 위임, 한국인을 사목하도록 했다. 연길지목구는 1937년 '연길대목구'로 승격됐고, 같은 해 '전주'와 '광주'에 새로운 지목구가 설정됐다. 특히 전주지목구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인 사제가 지목구장으로 임명돼 첫 한국인 자치교회가 됐다.
 
교황 비오12세(재위1939~1958)는 1939년 '춘천지목구'를 설정하고 평양지목구를 '평양대목구'로 승격시켰다. 아울러 1940년 원산대목구를 '함흥대목구'로 승격시키고 '덕원자치수도원구'를 신설했다. 1948년에는 대전지목구를 새롭게 분할했다. 1957년 전주와 광주지목구를 대목구로 승격시키고, '부산대목구'를 신설했다. 이어 1958년 '청주'와 1961년 '인천'대목구가 탄생했다. 한편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된 북한 지역 평양ㆍ함흥ㆍ덕원자치수도원구는 남하한 성직자들에 의해 명맥만 유지하게 됐다.

한국 천주교회 11개 대목구와 1개 자치수도원구는 1962년 교계제도 설정으로 서울ㆍ대구ㆍ광주대목구가 대주교구로 관구를 이루고 춘천ㆍ대전ㆍ인천ㆍ부산ㆍ청주ㆍ전주대목구가 주교구로 승격했다. 침묵의 교회인 평양ㆍ함흥대목구 또한 주교구로 승격했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3개 관구 하에 11개 교구 1개 자치수도원구를 갖추게 됐다.

[평화신문, 2012년 3월 4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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