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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충북지역 두 번째 본당이었던 고마리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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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1-01 ㅣ No.483

[한국 교회의 사적지] 충북지역 두 번째 본당이었던 고마리 공소


1. 공소의 설립과 변화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 고요함이 흐르는 이 지역에 100여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고마리(일명 ‘높은 사랑’) 공소가 있다. 지명이 참 특이하다. 고(叩)는 ‘두드리다’, ‘잡아당기다’라는 뜻이고, 마(馬)는 ‘말’이다. 즉 ‘고마’는 ‘말을 멈춰 세우다’, ‘말의 고삐를 끌어당기다’라는 뜻이다. 이 지역이 고마리라 불리게 된 사연은 이렇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인 단종(端宗)을 보좌하던 김종서(金宗瑞) · 황보인(皇甫仁) 등을 역모죄로 몰아 죽였는데, 이때 좌참찬(左參贊) 허후(許?)가 간언하였다가 괴산으로 귀양을 갔다. 그래서 ‘충신의 간언’을 뜻하는 사자성어인 ‘고마이간’(叩馬而諫)을 따서 ‘고마동’ 또는 ‘고말기’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1)

이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시기는 1860년대로 추정되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1860년대 순교자들의 후손들이 지금의 문경 · 가은 · 상주 등 여러 지방에서 박해를 피해 고마리로 숨어들어 왔다고 한다. 이후 박해가 종식되자, 1887년경부터 연 베드로가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의 노력으로 고마리는 교우촌이 되었다고 한다.2)

이후 고마리에 공소가 설립되었는데, 그 시기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제각각 다르다. 먼저, 1980년 관할 본당인 괴산 본당이 편찬한 고마리의 내력과 연혁에서는 연 베드로 회장이 신자수가 늘자 1899년부터 고마리 956번지 자택에서 예산 지방 사목자 황 신부를 모셔 공소 예절을 치렀다고 하면서 설립 시기를 1899년경으로 추정하였다.3) 그러나 이는 정확하지 않다. 1899년 당시 예산에는 양촌 본당이 있었는데, 본당 신부는 ‘황 신부’가 아니라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퀴를리에(J. J. L. Curlier, 南一良, 1863-1935) 신부였다. 또한 양촌 본당 교세 통계표에는 ‘고마리’나 ‘높은 사랑이’라는 명칭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1899년설은 잘못된 것이다. 다음으로 1995년에 발간된 “천주교 청주교구 연감”(135쪽)을 보면, 연감에서는 설립 연도가 1920년 8월로 되어 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는 고마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된 연도였다. 따라서 이 또한 맞지 않다. 최근에는 임 가밀로, 즉 부이용(C. Bouillon, 任加彌, 1869-1947) 신부에 의해 1896년에 설립되었다고 보고 있다.4) 그러나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그 이유는 그 이전부터 고마리 공소와 관련된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마리 공소는 과연 언제 설립되었을까? 교회사 자료를 검토한 결과, 설립 시기는 적어도 1893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부엉골 본당의 1892-1893년도 교세 통계표를 보면 관할 공소 가운데 ‘높은 사랑이’가 나온다. 당시 신자는 24명이었고, 부엉골 본당 마르탱(L. Martin, 沈良, 1866-1919) 신부의 사목하에 있었다.

고마리 공소는 1896년 부이용 신부가 본당을 부엉골에서 장호원으로 이전하면서 장호원 본당(현 감곡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5) 신자수는 1901-1902년도까지 40-80명대 사이를 오고가다가 1902-1903년도에 120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처럼 신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1905-1906년경에 공소회장 서 안드레아와 신자들이 힘을 합쳐 약 20평 규모의 경당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906년 11월 28일과 29일에는 조선 대목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를 맞이하여 성사를 받는 기쁨도 얻었다.6)

(1906) 11월 28일 견진자 8명. 가까운 20리를 가서 높은 사랑이 공소를 지났다. 거기에는 아담한 경당이 지어져 있다. 마침 시간이 있어서 우리는 성사를 주었고 원하는 사람을 다 만나 주었다. 그 수가 60명이 좀 넘었다. 또 나는 12-13세가량의 소년에게 정식 세례를 주었다. 아이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

11월 29일 모든 교우가 보다 편안하게 참석할 수 있도록 안마당에서 10명에게 견진성사를 주었다. 우리는 60리 상거의 청주 새내(또는 진들)를 향해 출발했다. (이하 생략)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소에서는 종 대신 나팔소리로 주일과 삼종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그리고 대축일이면 신자들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걸어서 장호원 본당으로 가 미사에 참례하였다고 한다.7)


2. 본당 승격

장호원 본당의 부이용 신부는 1914년 5월경부터 이미 본당의 분할을 계획하였다. 그 이유는 홀로 2천 616명에 이르는 본당 신자들을 사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 부이용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14년 5월 26일자 서한에서 “현재 1천여 명의 신자가 있는 남부에 새 본당을 분리, 세우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앞으로 수년 내에 본당 여러 곳을 새로 분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이를 선 듯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선교사들 가운데 일부가 소집령을 받아 프랑스로 귀국하여 본당을 맡을 사제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8) 따라서 본당의 분할은 일단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본당의 분할이 지체되는 동안, 장호원 본당의 신자수는 꾸준히 늘어 1918-1919년도에는 3천 260명에 이르렀다. 관할 공소도 경기 남부와 충북에 걸쳐 33개나 되었다.9) 그런데 이처럼 많은 신자들을 부이용 신부 홀로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건강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목하는 데에 어려움은 더욱 컸다.10) 이에 부이용 신부는 본당의 분할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뮈텔 주교에게 요청한 듯하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참전했던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되돌아왔고, 한국인 신부들도 꾸준히 배출되어 이전과 같이 사제들의 수가 부족하지 않았던 터라, 본당의 분할이 가능하리라고 여긴 것 같다.

부이용 신부는 1920년 5월 이전에 관할 지역의 넓이와 신자수를 거의 동일하게 나누어 본당을 분할하였다.11) 하지만 신부가 아직 부임하지 않은 터라, 정식으로 본당이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본당 신부는 같은 해 9월에 부임하였는데, 그가 바로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1889-1950) 신부였다. 그는 같은 해 9월 18일에 뮈텔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장호원 본당의 보좌로 발령을 받았지만, 곧바로 고마리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12) 이로써 고마리 본당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당시 본당의 관할 구역은 괴산 · 보은 · 청주 · 음성 · 진천이었고, 공소는 21개였다. 고마리 본당의 신자수는 147명이었고, 공소를 포함한 총 신자수는 1천 471명이었다.13)


3. 본당의 발전과 윤의병 신부

본당이 분할될 즈음, 고마리 공소 신자들은 성당을 건립하였다. 성당의 건립 시기는 자료에 따라 1918년14) 혹은 1919년15)으로 되어 있지만, 1920년이 확실하다. 이는 윤의병 신부가 작성한 1923년도 연말 보고서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초가였다가 1923년에 지붕을 기와로 교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당이 완공되자, 이듬해인 1921년에는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사제관도 처음에는 초가였다가 1923년에 지붕을 기와로 교체하였던 것 같다.16)

한편 윤의병 신부는 학생들의 교육에 관심을 갖고 1923년 숭애의숙(崇愛義塾)을 설립하였다. 의숙에서는 6세에서 12세 정도까지의 아이들에게 한글 · 일본어 · 산수 · 노래 · 교리 등을 가르쳤다. 학생수가 늘어남에 따라 1925년에는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교실 12칸짜리 일본식 교사(校舍)를 지었다. 윤 신부는 강습회를 맡아 교육에 전념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들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수녀회가 이를 받아들여 1928년 8월 21일 강복시 마리 데레즈 수녀와 이 공사가 수녀를 파견함으로써 고마리 본당 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었다. 이 공사가 수녀는 주로 본당일과 전교를, 강복시 수녀는 강습소 일을 하였다. 2년 후 강 수녀가 신병으로 이곳을 떠나게 되자, 송 에밀리아 수녀가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으로 인해 1930년 7월 21일 수녀회는 고마리 본당으로부터 철수하고 말았다.17)

고마리가 산골이었던 까닭에 신자들의 삶은 넉넉지 못하였다. 게다가 신자들 대부분은 옹기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이사를 해야 했다.18) 하지만 1927년 자료에 따르면, 가구 38호 가운데 단지 3호만을 제외하고 모두 신자 가족이었을 정도로 신앙에 대한 열성만은 뜨거웠다.19) 1928년 본당에서는 <괴산 천주교회 소식>이라는 월보를 등사판으로 발행하여 신자들에게 교회 소식을 전하였다.20) 또한 신자들은 여러 단체들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다음의 자료는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괴산 고마리 지방은 거의 다 산골이요, 교우들도 다 빈한하여 교중 사업을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아 보이나 우리 교중 사업은 재물과 인격과 인력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천주를 위하여 성의와 성력과 정성으로써 이루는 바이라. 괴산 지방 본당 윤 신부와 그 소관 교우들이 함께 성의와 성력을 합하여 일심합력으로 진행하는 고로 적지 않은 좋은 결과를 거두는도다. 충분 완전치는 못하나마 강습소, 도리강습회, 소년회, 소년대표회, 이러한 단체로써 정성을 갈진히 하여 점점 진행하는도다.21)

이 단체들은 신자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전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교리를 연구하고 토론함으로써 신앙심을 더욱 돈독하게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고마리 본당이 기틀을 잡아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윤의병 신부의 노력이 컸다. 그러나 윤 신부는 잦은 공소 순방과 본당 사목 등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고마리 본당에 부임한 지 12년 만인 1932년 9월에 경기도 행주 본당으로 전임되어 요양하였다. 그는 특히 교회사에 큰 관심을 갖고 박해시대의 숨은 이야기들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은 1939년 1월부터 ‘죽총’(竹叢)이라는 필명으로 5촌 조카인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1903-1979) 신부가 주관하던 “경향잡지”에 군난 소설 <은화>(隱花)를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은화>는 일제 말기 “경향잡지”가 1년여 휴간되었던 기간을 제외하고 1950년 6월까지 총 125회(상권 69회, 하권 56회)가 발표되었다. 윤의병 신부는 1935년 1월부터 황해도 은율 본당에서 사목하다가 1950년 6월 24일 한국 전쟁 발발 직전에 북한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다.22)


4. 다시 공소로

윤의병 신부가 행주 본당으로 전임되고, 그 후임에 이천 포내 본당에서 사목하던 정원진(鄭元鎭, 루카, 1900-1976) 신부가 부임하였다.23) 그런데 1936년 4월, 정 신부는 고마리가 본당의 입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본당을 괴산군 증평면 증평리로 이전하였다. 그에 따라 고마리 공소는 본당 승격 16년 만에 다시 공소로 되돌아갔다.24)

고마리 공소는 증평 본당의 공소였다가 1954년에 충주 본당(현 교현동 본당), 1956년에 음성 본당의 사목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57년 6월 8일부터 괴산 본당의 소속 공소가 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25)


5. 공소 활성화를 위한 노력

1960-1970년대 고마리 공소와 관련된 자료는 찾기가 어렵다. 여느 농촌 지역의 공소들과 같이 고마리 공소 또한 경제 개발로 인한 농촌 인구의 감소라는 시대적 흐름을 피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1980년 고마리 공소는 뜻깊은 행사를 가졌다. 5월 1일, 본당 승격 및 성당 축성 60주년 기념식을 개최하였던 것이다. 기념식에는 청주 교구장 정진석(鄭鎭奭, 니콜라오) 주교(현 서울 대교구장, 추기경)를 비롯한 교구 사제단과 관내 기관장 및 신자 5백여 명이 참석하여 고마리 공소의 역사를 회고하고 교회의 발전을 이룩한 신앙 선조들의 신앙심을 음미하였다. 그리고 주보성인인 성모 마리아 동굴과 성모상을 조성하여 축성하였다.26) 또한 고마리 본당의 초석을 세웠던 윤의병 신부를 기리는 공적비도 세웠다.27)

1991년에는 새 경당의 건립 사업이 추진되어 10월 4일에 기공식을 가졌다. 괴산 본당의 지원을 받아 경당을 완공하고 1992년 5월 23일에 축복식을 거행하여 경당을 한국 순교성인들에게 봉헌하였다.28)

최근 고마리 공소는 청주교구 공소사도회29)(이하 ‘공소사도회’)의 노력으로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공소사도회는 2007년 10월, 공소 살리기 첫 대상으로 고마리 공소를 선정하여 매주 공소를 찾아가 신자들과 함께 묵주 기도를 바치고 공소 예절을 이끌며 교리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신자수가 20명 남짓할 정도로 쇠락하던 고마리 공소는 다시 생명력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공소사도회는 2008년 4월 20일에 고마리 공소에서 ‘사랑 나눔 잔치’를 열어 의료 봉사 활동, 국악 한마당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이날 사랑 나눔 잔치에는 소수면 9개 마을 신자와 현지 주민, 괴산 본당과 관할 공소인 목도 · 세평 · 칠성 공소 신자들도 함께 참여하여 지역 축제의 장이 되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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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지명 총람” 3(충북편), 한글학회, 1970, 47쪽 ; 김우철 역주, “여지도서 - 충청도 3”, 디자인 흐름, 2009, 199-200쪽.
2) ‘선열의 얼 담긴 고마리공소’, <가톨릭신문> 1980년 5월 11일자.
3) ‘선열의 얼 담긴 고마리공소’, <가톨릭신문> 1980년 5월 11일자.
4) ‘청주교구 고마리공소, 일제 공소예절 재현’, <가톨릭신문> 2008년 1월 6일자.
5) 감곡본당 90년사 편찬위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감수, “감곡본당 90년사”, 천주교 감곡교회, 1986, 66-77쪽 ; 장호원 본당의 교세 통계표(1896-1897).
6) ‘1906년 11월 28일’ “뮈텔 주교 일기” 4,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101쪽 ; ‘선열의 얼 담긴 고마리공소’, <가톨릭신문> 1980년 5월 11일자.
7) ‘선열의 얼 담긴 고마리공소’, <가톨릭신문> 1980년 5월 11일자.
8) 감곡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편, “감곡(매괴의 성모) 본당 100년사”, 감곡(매괴의 성모) 본당, 2000, 128-129쪽.
9) 장호원 본당의 교세 통계표(1918-1919).
10) 감곡본당 90년사 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1986, 433-434쪽.
11) 감곡본당 90년사 편찬위원회 편, 위의 책, 433-434쪽.
12) <윤의병>, “한국가톨릭대사전” 9, 한국교회사연구소, 6847쪽.
13) 고마리 본당의 교세 통계표(1920-1921).
14) ‘성당 순례기 3 - 괴산 성당’, <천주교회보> 8호(1927년 11월 1일자).
15) ‘선열의 얼 담긴 고마리공소’, <가톨릭신문> 1980년 5월 11일자.
16)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 편, “서울 교구 연보” II, 천주교 명동교회, 1987, 175쪽. ‘1922년도 보고서’에서도 ‘성당은 2년 전에, 그리고 사제관은 1년 전에 건립’되었다고 하였다.
17) 윤의병 신부의 1923-1924년도 연말 보고 ;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편,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91, 969쪽.
18)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 편, 앞의 책, 1987, 175쪽.
19) ‘성당 순례기 3 - 괴산 성당’, <천주교회보> 8호(1927년 11월 1일자).
20) <괴산천주교회 소식>, “경향잡지” 632호(1928. 2).
21) <괴산교구에 성의와 성력>, “경향잡지” 646호(1928. 9).
22) <윤의병>, “한국가톨릭대사전” 9, 6847쪽.
23) <경성교구에 신부 전임>, “경향잡지” 742호(1932. 9).
24) 홍연주, <증평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0, 7944-7945쪽.
25) ‘선열의 얼 담긴 고마리공소’, <가톨릭신문> 1980년 5월 11일자.
26) ‘80년 역사 자랑’, <가톨릭신문> 1980년 5월 11일자.
27) ‘한국 교회 사제 열전 13 - 윤의병 신부(상)’, <평화신문> 2009년 12월 20일자.
28) “천주교 청주교구 연감”, 천주교 청주교구청, 1995, 23쪽, 137쪽 ; 경당 머릿돌.
29) 청주교구 공소사도회는 2006년에 조직된 신자 단체이다. 2004년 교구 사도직 학교에서 교장 강희성 신부가 숙제로 ‘교구 내 공소 실태 조사’라는 주제를 내어주었는데, 조사 과정에서 공소의 어려운 상황을 알게 된 신자들이 ‘공소 살리기’를 다짐하며 공소사도회를 조직하였다(‘공소 재건 앞장서는 공소사도회’, <가톨릭신문> 2008년 2월 3일자).
30) ‘청주교구 괴산 본당 관할 고마리 공소 잔치’, <평화신문> 2008년 4월 27일자.

[교회와역사, 2010년 12월호, 양인성(대건 안드레아 ·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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