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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역사적 가치 재조명 받는 신암리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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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31 ㅣ No.482

[한국 교회의 사적지] 역사적 가치 재조명 받는 신암리 성당


1. 공소의 설립

신암리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에서 북서쪽 끝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으로는 황방리 · 한산리, 북서쪽으로는 파주시 적성면, 남쪽으로는 매곡리 · 신산리와 인접해 있다. 조선 후기에는 적성군 남면에 속했으나 1914년에 단행된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적성군 남면 전체가 연천군 남면으로 바뀌면서 신암리 일부 지역이 신산리로 편입되었다. 이후 1945년 9월 미군정 포고령 제22호에 의해 파주군에 속하였다가 1946년 2월에 양주군 남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1)

신암리라는 지명은 이 마을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감악산(柑嶽山) 바로 밑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세한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조선시대에 신을 모신 바위가 있었다는 설과 이곳에 남선굴(南仙窟)로 불리는 신선바위가 있으므로 여기에서 신선바윗골 · 신암골 · 신앙골 · 신암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곳에 감나무가 많아 감나무골, 즉 시낭골로 불렸는데, 남을진2)이 감악산으로 들어오면서 귀신바위를 붙들고 울었다 하여 귀신 ‘신’(神)자와 바위 ‘암’(巖)자를 따서 신암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3)

이러한 신암리에 천주교 신앙이 언제, 어떠한 과정으로 전파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신암리에 공소가 설립된 시기는 1909년인데,4) 다음의 자료가 그러한 사실을 말해 준다.

신암골
원당리의 건실한 일부로 1909년 봄에 설립되었습니다. 사실 이곳이 현재 옹기마을이기는 하지만, 농사에 전념하기 위해 주민들 거의 모두가 옹기 만드는 일을 조금씩 그만두려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훌륭한 신자들입니다.

원당리
옹기마을. 바카스 신(역주 :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이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면, 이곳에 와서 살 것입니다. 이 나쁜 음주벽을 고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 술 마시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또한 그 이름에 걸맞는 옛 회장과 신자들 대부분은 원당리를 떠나 신암골로 갔습니다. 원당리는 해체될 것 같은데, 필요한 경우에 그런 방향으로 저는 밀어주고 있고 또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뤄졌으면 하는 한 가지 바람이 바로 각 가정이 절주하며 따로따로 자리잡는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 자료는 개성 본당의 2대 주임이었던 르 장드르(L.-G. A. A. Le Gendre, 崔昌根, 1866-1928) 신부가 제8대 조선 대목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에게 보낸 1910년 4월 17일자 보고서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당시 개성 본당은 파주 · 양주 · 장단 등 경기 북부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5) 이 보고서에 따르면, 신암리 공소는 1909년 봄에 설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원당리 공소의 신자들이 원당리를 떠나 신암리로 이주하였고, 이를 계기로 하여 신암리 공소가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원당리 공소는 신암리 인근 황방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6) 원당리 공소 신자들이 신암리로 이주한 이유는 음주벽 등의 악습으로 인해 원당리에서 신앙생활을 온전히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와 함께 옹기 제작이 주요 생계 수단이었기에, 옹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좋은 점토와 나무 등을 찾아 신암리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르 장드르 신부가 1911년 4월 24일자 보고서에서 신암리로 이주자들이 계속 오고 있고, 주민들 대부분이 옹기장이이거나 과거에 옹기장이였다고 한 점을 고려해 보면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요컨대 원당리 공소 신자들은 신앙생활과 옹기 제작을 위해 신암리로 이주하였고, 이를 계기로 하여 1909년 봄에 신암리 공소가 설립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

신암리 공소가 설립된 이후에도 타 지역에서 신자들이 계속 신암리로 이주해 왔다. 이에 대해 르 장드르 신부는 1912년 4월 18일자 보고서에서 신암리를 “다른 곳에서 온 이주자들로만 거의 이루어진 새 옹기마을”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에 따라 신자수도 꾸준히 늘어났다. 설립 당시인 1909-1910년에는 61명이었으나 1910-1911년에는 115명, 1911-1912년에는 156명, 1912-1913년에는 195명으로 증가하였고, 1916-1917년에는 213명에 이르렀다. 1909-1924년까지 신암리 공소의 신자수는 평군 174.9명으로, 당시 경기도 북부 지역에 있었던 공소 가운데 파주 칠울(갈곡리) 공소의 196.6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7)

신암리 신자들의 주요한 생계 수단은 옹기를 제작하여 판매하는 일이었다. 신암리에 점말(점촌) · 가마터 · 독점 등과 같이 옹기와 관련된 지명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과거 옹기 제작이 얼마나 활발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8) 하지만 옹기 제작이 쇠퇴함에 따라 농사가 주요한 생계 수단이 되었다. 1918년 12월 2일 사목 순방을 위해 신암리 공소를 방문한 뮈텔 주교가 “주민은 세 집이 옹기를 만들고 있고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있는 혼합된 마을”9)이라고 한 것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준다.

신자들은 비록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못하였으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모범적이었다. 르 장드르 신부는 1913년 4월 14일자 보고서에서 신암리 공소는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특히 아이들의 교육면에서 매우 좋다고 하면서 만족해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청년회가 조직되었는데, 회원들의 열성이 대단하였다.

경기 연천군 신암리 공소는 열심한 교우촌인데, 금년 부활 대첨례를 당하여 본 공소 청년회의 발기로 남녀 교우 근 50인이 1원씩 몇 십전씩 수합한 것이 합 22원이라. 망자 이 루치아 부인을 위하여 연미사 2대를 드리고 금년 로마에서 반포될 조선 치명자들의 시복식이 복되이 거행되기 위하여 미사 6대를 드리고 또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 규칙대로 연합 본회에 5원을 납부하였더라.10)

위 자료를 보면,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신암리 공소에 청년회가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년회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각 개인의 신앙 성숙과 사목 활동 지원 및 선교와 봉사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다.11) 이러한 청년회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22년 6월 3일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이하 ‘청년회 연합회’)가 창립되면서부터였다.12) 신암리 공소 청년회는 청년회 연합회에 회비를 납부한 사실을 볼 때 청년회 연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암리 공소 청년회는 선종한 신자를 위해 위령미사를 봉헌하였고,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자들의 돈독한 신앙심은 이후 본당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3. 본당 승격과 폐지

신암리 공소는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였지만,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있어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소가 개성 본당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본당을 찾아가 성사를 받는 것이 이만저만 고충이 아니었다. 특히 임종이 가까웠을 때 종부성사를 받는 것이 더욱 힘든 일이었다. 이에 공소 신자들은 본당을 설립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그 결과 1927년에 신암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고, 그해 5월에 초대 주임으로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1881-1952) 신부가 부임하였다.13) 공소 신자들은 1927년 2월부터 강당을 성당으로 개조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6월 28일에 끝내고 29일에 성당의 낙성식 겸 강복식과 최문식 신부의 환영회를 개최하였다.14)

관할 공소는 본당 설립 당시에는 양주의 우고리(가라비) · 기산리 · 송굴암 · 자일리 · 남방리, 파주의 갈곡리 · 노파 · 쇠골 · 가목리 · 오미 등이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초에 접어들어 관할 구역이 포천과 가평 지역까지 확대되어 포천의 송우리 · 설운리 · 정교리 · 신팔리 · 화대리 · 오가리, 가평의 현리 · 신상리 등의 공소도 관할하였다. 다음으로 신자수를 보면, 본당 설립 당시에는 정확한 통계 자료가 없고, 다만 신자 가구수가 40여 호였다고 한다. 1929-1930년에는 287명, 1930-1931년에는 264명, 1931-1932년에는 244명, 1932-1933년에는 226명이었다.15)

그러나 신암리 본당은 불과 5년 만인 1932년 9월경16)에 본당이 폐지되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를 참고할 만하다.

노파, 가목리, 쇠골, 송굴암, 오미, 자일리 등지에는 혹 산골에서 혹 평야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교우들이 많고, 다른 지방에는 옹기점 일을 하는 교우들이 많습니다. 농사하는 교우들이나 옹기점 교우들이나 모두 극도로 가난하여 전부가 남의 빚으로 살아갑니다. 이렇듯 가난한 중에도 내게 위로가 되는 것은 모두 순직하고 열심 수계하는 것입니다. (중략) 모두 생활난에 빠져 주일학교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위 자료는 최문식 신부가 뮈텔 대주교(1926년 대주교로 승품)에게 보낸 1928년 4월 5일자 보고서의 일부이다. 최 신부는 신자들이 극도로 가난하여 주일학교와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다고 토로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신암리 본당이 폐지된 주요한 원인은 신자들의 곤궁함으로 인해 본당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신암리 본당이 폐지되자, 그 관할 공소는 행주 본당과 평강 본당(강원도 평강읍 서변리 소재)으로 분할되었다. 이때 신암리 공소는 행주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 그러다가 1934년 양주군 회천면 덕정리에 덕정리 본당이 설립됨에 따라 그 관할 공소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46년 11월 김피득(金彼得, 베드로, 1907-1954) 신부가 의정부 지역의 발전 가능성을 내다보고 덕정리 성당을 매각한 뒤에 의정부로 본당을 이전하자, 의정부 본당(현 의정부 2동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17) 그 후 1959년에 동두천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18)


4.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

신암리 공소는 한국 전쟁 당시 신암리가 폭격을 받아 초토화되면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1953년과 1955년 사이에 박복선을 비롯한 신암리 신자들의 노력과 영국 군인들의 도움으로 공소가 곧 재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두천 본당 9대 주임 임덕일(林德一, 아마투스, 1940- ) 신부(현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담당) 재임기인 1976년 6월부터 1979년 12월 사이에 보수 공사를 통해 공소를 단장하였고, 성모 동굴도 조성하였다.19)

그러나 이와 같이 공소 신자들의 노력과 동두천 본당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신암리 공소는 여느 농촌 지역의 공소와 같이 신자수의 감소, 낙후된 공소 시설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정부교구와 동두천 본당은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신암리 공소가 어려움을 타개하고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이를 실행해 나갔다.

동두천 본당은 2005년 4월 10일에 신암리 공소 본당 승격 8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여 신앙 선조들의 신심을 되새기고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였다.20) 그리고 의정부교구에서는 2008년 9월 12일자로 신암리 공소를 준본당으로 승격시켰다. 또한 2008년 10월 5일에는 신암리 출신인 서울대교구 이경훈(李庚薰, 바르톨로메오, 1957- ) 신부(현 흑석동 본당 주임)가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성당을 건립하여 신암리 지역의 순교자로 전해져 오는 박 다미아노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였다.21) 현재 신암리 준본당은 역사적 가치가 재조명되면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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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주군 · 양주문화원, “양주 : 땅 이름의 역사”, 2001, 527쪽.
2) 남을진(南乙珍, ?-?). 고려 말의 문신으로, 1368년(공민왕 17)에 현량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쳤다.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양주의 사천현 봉황산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조가 조정에 나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신하된 자로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적성의 감악산 석굴에 은거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33쪽).
3) 양주군 · 양주문화원, 앞의 책, 2001, 527쪽.
4) 현재 신암리 준본당에서는 공소 설립 시기를 1907년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공소에 문의해 본 결과, 선조들의 증언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자료에 근거하여 1909년을 공소 설립 시기로 하고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5) 양인성, <개화기 · 일제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교회사연구” 3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53-66쪽.
6) “교세 통계표”와 르 장드르 신부의 보고서에는 신암리와 원당리가 적성군 지역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지도서” 등의 읍지 자료를 검토해 보았으나 원당리라는 지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명 관련 자료를 검토해 보았는데, 적성군 남면 지역이었던 황방리에 원당리(元堂里, 일명 ‘원댕이’)라는 마을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한글학회, “한국 지명 총람” 17(경기편 상), 1985, 499-500쪽).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일단 원당리 공소는 황방리에 있었던 것으로 하고 논의를 전개한다.
7) 양인성, 앞의 글, 2008, 61-66쪽.
8) 양주군 · 양주문화원, 앞의 책, 2001, 527-539쪽.
9)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6(1916-1920), 2002, 234쪽.
10) <신암리 교우와 청년회의 열성>, “경향잡지” 564(1925. 4. 30).
11) 김가람, <한국 가톨릭 청년 운동>, “한국가톨릭대사전” 12, 한국교회사연구소, 9411-9415쪽.
12) 양인성,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 연구>, “교회사연구” 28,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31-47쪽.
13) “동두천 본당 30년사”, 1990, 27쪽에는 1925년 3월에 신암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고, 최문식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신암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된 시기는 1927년이었고, 최문식 신부는 그해 5월에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경성교구에 신부 전임>, “경향잡지” 613(1927. 5. 15) : <새 본당의 새 경사>, “경향잡지” 617(1927. 7. 15) : <구 본당 신부께 대한 열정>, “경향잡지” 637(1928. 5. 15)를 참고할 것.
14) <새 본당의 새 경사>, “경향잡지” 617(1927. 7. 15).
15) 양인성, 앞의 글, 2008, 66-75쪽 ; <구 본당 신부께 대한 열정>, “경향잡지” 637(1928. 5. 15)
16) “동두천 본당 30년사”, 1990, 27쪽에는 최문식 신부가 1930년 4월에 경기도 안성군 미리내 본당의 주임 신부로 떠나면서 신암리 본당이 다시 공소로 환원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최문식 신부가 미리내 본당으로 전임한 시기는 1932년 9월이었다. 따라서 신암리 본당이 공소로 격하된 것은 1932년 9월경으로 보아야 한다(<경성교구에 신부 전임>, “경향잡지” 742(1932. 9. 27).
17) 양인성, 앞의 글, 2008, 66-75쪽.
18) “동두천 본당 30년사”, 1990, 29쪽.
19) 위의 책, 1990, 29, 76-77쪽.
20) ‘의정부교구 신암리 공소 본당 승격 80주년’, <가톨릭신문> 2005년 4월 10일자.
21) 오영환 · 박정자, <신암리 성당>, “순교의 맥을 찾아서”, 가톨릭출판사, 2009, 354-355쪽.

[교회와역사, 2010년 9월호, 양인성(대건 안드레아 ·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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