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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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주문모 야고보 신부, 지황 사바, 윤유일 바오로, 윤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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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3-12 ㅣ No.779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주문모 야고보 신부, 지황 사바와 윤유일 바오로, 그의 동생 윤유오 야고보

 

 

새해를 시작하면서 사제의 해(2009년 6월-2010년 6월)를 지내고 있는 이때, 이땅에서 순교한 중국인 주문모(1752-1801년) 신부님과 을묘박해(1795년) 때 순교한 순교자들을 만나보겠습니다.

 

1794년 12월에 입국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은 “밖으로 다니며 전교를 하였는데 밤으로 성사를 거행하고 낮엔 성경책을 번역하는 등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고, 먹고 잘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재를 지키고 오직 고신극기하기를 힘쓰고 정성을 다해 노력하였으며, 지덕과 재능이 매우 출중”(1811년 신미년 백서)한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3월 12일 자수하였습니다. 신문을 받으면서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라며 이 땅에 온 목적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해 4월 19일 오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고 번갯빛이 번쩍였습니다.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은 슬퍼하는 신자들에게 주 신부님이 “이제 순교하셨으니, 천당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힘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훨씬 더할 것이오. 그러니 우리의 의탁과 그대들의 소망이 오히려 전날보다 배로 늘어나서, 털끝만큼이라도 실망해서는 안 되오.”라고(백서 85-86행) 위로했습니다.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난 윤유일 바오로(1760-1795년)는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면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교회 지도층 신자들은 그를 1789년에 북경 구베아 주교님에게 보내는 밀사로 선발하였습니다. 이듬해 초에 북경에 도착하여 구베아 주교님에게 조선 교회의 상황을 보고하였고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1790년에 성직자 영입문제로 북경에 다녀와야만 했습니다. 1795년에 주 신부님의 입국이 알려진 뒤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지황과 최인길 마티아(본지 2008년 8월호)와 함께 굳셈으로 관리의 분노를 부추겼으며, 지혜로운 답변으로 관리의 책략을 좌절시켰습니다. 주 신부님에 대한 신문에서 한 유일한 대답은 명백하고 용감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심한 매질, 팔과 다리를 뒤틀고 무릎을 으스러뜨렸으나, 그 어느 것도 용기를 굽히지 못했으며 인내를 꺾지 못했습니다. 그해 5월 12일 지황 · 최인길과 함께 감옥에서 참수되어 강에 버려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구베아 주교님은 세 순교자들에 대해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순교자 윤유일에 관한 책은 하성래가 지은 “순교자 윤유일 · 정은 평전”(성황석두루가서원, 1988년)과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자료집” 1~5(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1996-2000년), 차기진이 쓴 “고난의 밀사: 하느님의 종 윤유일 바오로와 그 동료들”(어농성지, 2003년) 등이 있습니다.

 

충북 단양 고을 출신으로 궁중 악사였던 지황 사바(1767-1795년)는 서울에 살았습니다. 그의 천성은 순박하고 온화하며 공손하고 근면하였습니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면밀히 검토한 뒤, 지체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793년 교회 밀사로 북경에 도착하여 구베아 주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구베아 주교는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라 하였습니다. 1794년 12월 주문모 신부님을 입국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윤유일의 동생인 윤유오 야고보는 형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형이 순교한 뒤에는 조동섬 유스티노 ·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등을 만나서 기도 모임을 갖고 교리를 연구하였습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양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는 “형이 가르쳐 준 십계명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로 알았습니다. 교회서적을 밤낮으로 외우고 익혔으며, 진실로 배교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1801년 3월 15일 경기도 양평 양근 관아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길가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조선 사람을 사랑하려고 오셨고, 복음을 전하고자 온갖 노력을 하였으며, 하느님과 조선인을 위해 심한 고문을 견디고 순교하신 주문모 신부님, 신부님을 체포하려다 일어난 박해로 순교한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 그리고 윤유일의 동생인 윤유오 야고보의 신앙과 순교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경향잡지, 2010년 1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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