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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와 신앙: 희생 - 삶의 끝에서도 놓지 않은 구원에 대한 희망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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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5 ㅣ No.329

[영화와 신앙] 삶의 끝에서도 놓지 않은 구원에 대한 희망과 믿음 - 희생

 

 

영화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과 그들이 살아가는 삶과 그들이 몸담고 있는 시대와 사회를 떠나지 못한다. 문제는 이러한 관심이 인간답게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지킬 수 있는 쪽으로 나타나느냐, 오히려 인간성을 황폐화시키고 인간다움을 말살하는 쪽으로 나타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진정한 인간다움이야말로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에덴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살았다 하지 않았던가. 에덴에서 추방된 인간이 다시 돌아가려면 인간을 위해 죄를 감당하고 대속할 희생이 필요한 법.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려 했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셨다.

 

 

세상의 파멸을 멈추기 위하여 희생하는 남자 이야기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1932-1986년)는 희생하는 인간의 고귀함을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영화 속에는 희생하는 이의 고통과 그가 받는 경멸이 생생하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며, 그의 안간힘은 미친 짓으로 치부되기 일쑤이다. 세상은 황폐하고 메말랐으며, 파괴와 파멸로 가득 차있다. 타르코프스키는 광인 도미니코를 통하여(<향수>), 침묵을 서원한 알렉산더를 통하여(<희생>) 세상에 희생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희생>(1986년)은 타르코프스키의 유작이다. 그는 줄곧 향수병과 암으로 고통받으면서 <희생>을 만들었고 영화의 개봉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 영화 속에는 그의 세상에 대한 근심과 구원에 대한 강한 희망과 확신이 담겨있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의 엔딩 자막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아들 앤드류사를 위해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듭니다.”

 

삶의 끝에서조차 놓지 않은 아들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근심과 기적과 구원에 대한 믿음은 보는 이에게 커다란 울림을 준다. 누군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한데 하물며 세상에 대한 근심과 희생을 담고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지 않은가.

 

<희생>은 세상의 파멸을 멈추기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극작가였던 알렉산더는 세상에 대한 근심에 차있다. 자신의 생일을 맞은 날 세상은 전쟁으로 파멸의 기운이 가득하다. 알렉산더는 기도한다. 세상의 파멸을 막을 수 있다면, 인류를 구원해 준다면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고 난생처음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알렉산더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오고 다음 날 세상은 파멸에서 벗어난다. 

 

알렉산더는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이행한다. 그는 가족과 이별하고 침묵함으로써 세상과도 격리된다. 알렉산더의 삶의 흔적이자 총체인 집을 불태우는 행위는 충격적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그것이 가진 상징성 때문에 더욱 빛나는 대목이다. 알렉산더에게 집은 그와 가족의 터전이자 흔적이다. 이 공간은 사랑의 공간이자 타락과 절망의 공간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세상은 인간과 하느님의 친교의 공간이었으나, 인간이 죄를 지어 에덴에서 추방되자 타락과 절망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렇듯이 알렉산더의 집도 사랑과 배려의 공간에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음습하고 절망적인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알렉산더의 집은 세상의 축도인 셈이다. 

 

알렉산더가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 약속을 실천하고자 집을 불태우는 행위는 그래서 중의적이다.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흔적을 지우며, 절망의 기운을 뿜어내는 공간을 정화하는 의미인 것이다.

 

 

기적은 희생에 대한 응답

 

알렉산더는 희생과 기적을 믿지 않는 세상 때문에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며 정신병원으로 끌려간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지 않는다. 침묵할 뿐이다. 하느님의 응답이 부정되고 왜곡될 것을 경계하며 자신을 온전하게 바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의 희생에 대한 응답으로 세상은 건재할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의 아들에게서 기적이 일어난다.

 

알렉산더에게는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있다. 실어증에 걸려 말을 잃은 아들과 함께하며 알렉산더는 오랜 러시아의 우화 하나를 이야기해 준다. 바로 죽은 나무를 살리는 수도승에 대한 이야기다. 수도승이 죽은 나무에 매일 정성스레 물을 주었더니 3년이 지난 어느 날 꽃이 피어나더라는 것이다. 알렉산더의 집에도 죽은 나무가 하나 있다. 알렉산더는 이 수도승의 우화를 들려주며 아들과 함께 날마다 물을 주었다. 

 

말을 잃어버린 어린 아들과 이별해야 하는 아버지의 근심이 얼마나 클까? (영화를 만든 타르코프스키 자신이 죽음 앞에서 아들을 근심하는, 바로 그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구원해 달라는 자신의 기도가 받아들여졌을 때 아들에 관한 것도 아마 하느님께 맡겼을 것이다. 하느님은 기적으로 응답하셨다. 알렉산더의 어린 아들이 말을 되찾게 된 것이다. 아이가 말문을 열었을 때 아이의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아빠 그게 무슨 뜻이죠?”

 

아버지와 함께 심고 물을 주었지만 이미 죽어버린 나무에 혼자서 물을 주던 어린 아들은 그 나무 밑에 누워 올려다본다. 카메라는 누워있는 어린 아들을 보여주며 나무를 따라 천천히 수직 상승한다. 카메라가 맑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햇살에 반짝이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잡아줄 때 불현듯 죽은 나무는 되살아난 듯 생생하다. 

 

영화 오프닝에서와 같이 바하의 “마태수난곡” 중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아리아가 흐를 때 반짝이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노라면 기적의 응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가슴 벅차오르는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종교적 진실의 의미는 희망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종교적 진실의 의미는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구소련의 억압적인 사회주의 체제에서 예술가로서의 고뇌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이탈리아로 망명하고 불과 3년쯤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의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했고, 그의 심성과 예술적 영감의 바탕인 러시아의 문학과 종교(러시아 정교)를 잊지 않았다. 

 

특히 그의 영화 속에서 발견되는 희생과 구원 그리고 희망은 그의 종교적 성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병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스스로 감당하면서 세상을 근심하고 인간 구원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 점은 그가 얼마나 강한 종교적 심성을 지닌 존재였는지를 절감하게 한다. 종교는 인간에게 구원과 희망을 주는 역할을 해야 된다는 가장 원론적인 덕목을 타르코프스키에게서 새삼 발견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목, 2005년 3월호, 조혜정(영화평론가 · 수원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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