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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교구 사제의 영성: 친교의 인격적 표지인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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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5 ㅣ No.327

교구 사제의 영성 - 친교의 인격적 표지인 사제

 

 

사제로 살아오면서 다수의 독특한 영성과 신학들이 각기 다른 시기에 내게 영향을 주었음을 느낀다. 신학교에서 먼저 나를 형성시켰던 영성은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 영성이었다. 이 영성은 사제가 모든 면에서 중심이 되는 기본적인 교회 신학과 관련되어 있다. 신학적으로, 교회법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성품 받은 교역자의 사명은 교회의 사명과 동일시되었다. 우리는 여기에 부응하도록 훈련되었다. 제2의 그리스도인 사제는 그리스도를 공동체로 오시게 하는 사람이다. 성품 받은 교역자는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 권위, 신분,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의미나 정체성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필자가 한참 이 영성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 공의회를 통해 이와는 다른 사고 양식이 생겨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은 사제가 아니라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의 공동체이다.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얼굴, 구원의 성사는 성품 받은 교역자가 아니라 전체 공동체이다. 교회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성사인 것이다.

 

이 급격한 변화의 빛 안에서, 우리는 아직도 교구 사제에 대한 신학과 영성에 대한 기존의 이해와 투쟁하고 있다. 이 논의를 전개시키는 하나의 방식은 먼저 성직주의적 관점에서 성품 받은 사람을 중심에 놓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다. ‘세례 받은 신자들에게 남겨진 역할은 무엇인가?’ 사실상 그 질문은 늘 있어왔다. 그런데, 공의회 이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시작되었다. ‘만일 세례 받은 사람이 정말로 교회라면 이 공동체 안에서 성품 받은 직무자의 고유한 역할은 무엇인가?’

 

기능적인 면에서 이 질문에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씀과 성사의 교역에 의해 사제를 정의할 수 있다. 가르치는 임무는 분명히 성품 받은 교역자의 직무와 영성에서 핵심적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에서 “사제들은 주교들의 협력자로서 하느님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는 것이 첫째 직무이다.”(「사제품」, 4항)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르치는 임무가 성품 받은 교역자에게 중요한 역할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품 받은 교역자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성찬례를 주례하도록 불린 사람으로만 사제의 신원을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성찬례가 사제의 소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필자는 그것이 교구 사제만의 독특한 직무라고 이해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찬례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성품 받은 교역자로서 나의 실존에 핵심적인 것이지만, 지역교회의 사제로서 나의 신원은 내가 어떻게 성찬례에 참여하고 있는지에 달려있지 않다. 

 

사제 교역의 정체성은 사제가 실천하는 기능들에서보다는 다른 어떤 곳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성품 받은 직무의 신학적 비전이 필요한데, 이것은 가르치고 성찬례를 주례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역할들이 이해될 수 있는 전망을 제시한다. 

 

필자가 보기에 교구 사제의 신학적 정체성은 지역교회와 공식적으로 일체감을 갖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직무는 지역교회의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의 공적 표지이자 행위자로서 주교와의 일치 안에서 지역 교구 공동체에 속한다. 지역교회는 근본적으로 지역적 영역 안으로 오신 하느님의 관계의 성사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인 분으로서의 하느님과 관계의 성사로서의 교회에 대한 성찰을 포함할 것이다. 사제는 그러한 교회 안에서 다양성 안의 일치의 공적 표지이다.

 

 

관계의 성사인 교회

 

성서에서 관계적인 분으로 하느님을 보는 시각은 요한복음 14장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14,20)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역동적 관계의 네트워크에 사로잡힌다. 예수님과 성부 사이의 상호 관계는 인간 존재를 포옹하는 것에 이른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14,23). 

 

예수님과 성부 사이의 이런 관계는 내적인 하느님의 세계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이해를 토대로 해서 본다면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 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서로를 향한 새로운 태도를 요청한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15,2; 12,17). 이 상호 사랑은 제자들의 공동체가 세상을 향해 제시하는 표지이다. 

 

이와 같은 주제가 17장의 예수님의 기도에서 다시 나타난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17,21). 다시, 외부를 향하는 삼위일체적 친교의 아름다운 구조가 분명해진다. 예수님과 성부 사이의 상호 내재는 인간 존재를 포함하는 것에 이른다. 이제 인간 존재가 세상을 향한 하느님 공동체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17,`22-23). 

하느님의 단일성은 여기서 성부와 예수님 사이의 친교로 이해된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의 역동적이고 관계적인 위격들의 일치이다. 성령의 삼위일체적 역할은 아직 충분히 표명되지 않았지만, 신자들을 하느님 사랑의 친교 안으로 부르는 분이 성령임은 분명하다(14,15-24).

 

카파도치아의 바실리오와 그의 형제 니사의 그레고리오, 그리고 친구인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삼위를 관계적인 분으로 보는 데 중요한 신학적 기여를 했다. 그들의 첫 번째 중요한 공헌은 삼위에 대해 “hypostasis”라는 실체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위격의 개념에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들의 신학에서 모든 것은 위격, 특히 창조되지 않은 기원인 첫 번째 위격에서 나온다. 그들의 두 번째 공헌은 그들 사이의 상호 관계 안에서 삼위를 구별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방식 안에서 삼위는 완벽히 하나이고 단일한 분이다.

 

하느님의 위격들은 상호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관계적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발터 카스퍼는 이에 대해 “마지막 말은 정적인 본체나 하느님의 자기 폐쇄가 아니라, 서로에게서 말미암는 존재 그리고 서로를 위한 존재에 속한다.”(The God of Jesus Christ, SCM, 1983년, 280면)라고 말한다. 실재의 핵심은 주로 본체 용어에서 이해되지 않고 상호적 관계 안의 위격에서 이해된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삼위일체의 친교를 표현하기 위해 perichoresis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다. 이 단어는 삼위일체의 상호 내적 존재, 상호적 역동적 내재를 묘사한다. 이 단어는 perichoreo에서 왔는데, 둘러싸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perichoreuo와 구별되는 말인데, 이는 춤추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는 뜻이지만 하느님의 춤의 이미지는 perichoresis 개념의 어떤 활동력을 보존하고 있다. 이 단어는 삼위일체 위격들 사이의 내밀한 친교 - 이 친교는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여기에는 하나의 신적 본성만이 있다. - 를 묘사하고 있다. 

 

다양성과 일치는 이런 친교의 유형에서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참된 개별성은 사랑 안의 상호 현존 안에서 증가한다. perichoresis는 하느님의 위격들 사이의 사랑의 주고받음을 표현한다. 그것은 최고의 개별성 안에서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자유 안에서의 상호 내재적 존재를 표현한다. 각 위는 기쁘고 역동적인 공유된 생명의 일치 안에서 다른 위에 존재한다. 

 

현대신학에는 이 관계적이고 상호 위격적인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접근이 있어왔다. 만일 하느님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관계적이라면, 이때 이것은 창조된 존재가 근본적으로 관계적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관계적 신학은 관계적 세계관 그리고 관계적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을 제시한다고 한다. 본체의 존재론은 뒤로 물러가서 관계의 존재론에 포함될 수 있다. 삼위일체의 신학은 역동적 관계들에 집중된 형이상학을 제시한다. 궁극적 실재는 개별적 특질과 경탄, 자아 초월적 친교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존재는 관계 안의 존재로 이해된다. 

 

이 상호 친교 안의 위격들에 관심을 갖는 신학은 교회로서의 우리의 자기 이해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교회로서 우리의 사명은 우주의 핵심에 있는 상호적이고 동등하고 놀라운 사랑의 신적 관계들의 표지이며 대리자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 메시지이다. 교회의 존재는 친교이다. 교회의 존재는 상호적 관계이다. 교회는 관계적 하느님의 증인이 되도록 불린 관계의 성사이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는 은총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인류의 빛」, 1항)이다. 공의회는 치프리아노의 말을 인용하면서 교회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에 바탕을 두고 모인 백성”(「인류의 빛」, 4항)으로 보고 있다. 

 

교회는 실재의 역동적 핵심인 동등하고 상호적인 사랑의 상호 내재적 관계들에 상징적 표현을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와 전 우주가 창조를 위한 하느님의 선택 안에서 하느님의 이러한 관계들에서 나오고, 우주는 이런 하느님의 상호 내재(perichoresis)와 관련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나자렛 예수님 안에 하느님 지혜의 강생과 성령의 나타나심에서 우리와의 구원적이고 은혜로운 관계로 들어가심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증언된다. 우리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인간, 다른 피조물, 하느님의 위격들과 상호 관계를 항상 필요로 하는 근본적으로 관계적인 피조물이다.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우리의 소명과 운명은 상호내재적 사랑의 역동성 안에서 다른 피조물들과 얽혀진다는 것이 표상된다. 

 

만일 교회가 하느님의 관계성, 상호성과 동등성의 관계들을 증언하면, 이때 이것은 교회생활의 여러 측면을 내포한다. 그것은 교구 안에서 사제의 역할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성립시킨다.

 

 

친교의 공적 표지인 사제

 

사제는 지역교회의 일치의 표지이고 동인(動因)이며, 또 그 안에서 사랑의 삼위일체적 관계의 표지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개별 주교들은 자기 개별교회 안에서 일치의 가시적인 근원과 토대가 된다”(「인류의 빛」, 23항). 개별교회에서 주교는 친교의 표지이며 동인이고, 주교를 통해서 지역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친교 안에서 일치한다. 

 

사제의 정체성은 주교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다. 지역교회 안에서 주교의 협력자가 되는 것은 사제 정체성의 본질적 차원이다. 사제들의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도 또한 그들 정체성의 일부이다. 공의회는 주교와의 일치 안에서 지역교회의 사제들은 단체적인 정체성, 곧 사제단(presbyterium)을 구성한다(「인류의 빛」, 28항)고 가르친다. 

 

각 지역 신자들의 회중 안에서 신부들은 주교를 어느 모로든 현존하게 하며, 주교의 임무와 관심사를 떠맡아서 사목을 수행한다(「인류의 빛」, 28항). 신부들은 모든 성사 거행에서 주교와 교계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사제는 신자들의 모든 모임마다 어느 모양으로든 주교를 현존하게 한다(「사제품」, 5항). 그들은 지역교회 안에서 보편교회를 볼 수 있게 만든다(「인류의 빛」, 28항). 이때 신부는 지역교회 안에서 주교의 일치시키는 역할을 신장시키고 드러냄으로써 친교의 표지이며 도구가 되도록 불린다. 

 

친교의 인격적 성사인 사제는 친교의 가장 큰 전례 행위인 성찬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성찬례 안에서 교회는 종말론적 행위를 완수한다. 집회에 모인 공동체는 이제 종말론적 공동체를 반영하게 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삶의 모상이 된다. 우리가 성찬례 안에서 고대하고 맛보는 이 종말론적 친교는 인간만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도 포함하고 있다. 

 

성찬례는 근본적인 포괄성과 관계성의 사건이다. 인종, 성, 연령, 직업, 사회 계층에 차별적인 성찬례는 스스로의 종말론적 본성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친교의 성사가 되지 못한다. 성찬례는 선취된 종말론적 관계의 사건이다. 그것은 삼위일체적 사랑의 표현이고, 교회가 삼위일체의 삶을 맛보는 행위이다.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교회는 포괄적 사랑의 올바른 실천을 통한 친교 안에서 자신의 본성을 살도록 요청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제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관계적 교회의 공적 표지로서 이 포괄적인 사랑을 증언하도록 불린다. 이 증언은 일치와 다양성 모두를 끌어안는 것이다. 교회는 생각이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서 다양성에서 일치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친교의 다양성은 인종, 성, 연령의 차이를 포용하고, 부, 권력, 그리고 사회적 지위, 그리고 영성적 은사의 차이를 극복한다. 사제는 일치의 표지이지 획일성의 표지가 아니다. 차이와 근본적 포괄성을 포함하고 있는 가톨릭 정신은 성품 받은 교역에 대한 삼위일체적 접근의 양 측면이다. 성품 받은 직무에 대한 이러한 삼위일체적 접근은 직무 신학이 성령이나 그리스도 어느 한쪽에만 집중할 때 일어나는 왜곡을 극복할 수 있다. 순수한 그리스도 중심적 접근은 “위에서 오는” 직무로, 그리고 교회 공동체 위에 있는 직무로 성품 받은 직무를 이해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직무신학에 대한 순전히 성령 중심적인 접근은 “아래에서 오는” 직무로, 그리고 단지 공동체로부터 생겨나는 직무로 바라보는 위험이 있다. 

 

성품 받은 직무에 대한 참된 삼위일체적 신학은 마치 교회 그 자신처럼 “위에서 오고” 또 “아래에서도 오는” 직무로 성품 받은 직무를 이해할 것이다. 직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작용이다.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존재하신다. 그리스도는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신다. 공동체를 마주 보고 공동체 위에 서 계신 분으로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는 직무 신학은 성품 받은 직무를 왜곡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독단적으로 건설하는 사람으로서만 사제를 바라보는 것도 역시 성품 받은 직무를 왜곡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공동체에서 생겨난 직무로,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 공동체에 위탁된 직무로 성품 받은 직무를 바라보는 삼위일체적 시각이 필요하다. 

 

이런 삼위일체적 직무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과 교회 중심적 또는 성령 중심적인 신학 사이의 이분법을 초월한다. 그것의 강조점은 기능이나 존재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표징에 있다. 그리고 상징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이다. 성품성사는 한 사람을 교회의 친교의 표지이며 동인이 되도록 공적으로 따로 세우는 것이다.   관계적 영성 이 모든 점을 고려할 때 교구 사제로서 나의 영성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이고 친교적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을 선포하고 전례를 거행하도록 교회에 요청하신 하느님은 모든 이해력을 뛰어넘는 우정의 하느님, 친교의 하느님이시다. 나의 기도생활은 함께 나누는 삶의 지속적인 운동, 이 주고받는 역동성에 끌려 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이 이전보다 더 명확해졌다. 나의 영성은 더욱더 삼위일체적인 것으로 되어가고 있고, 더욱 의식적으로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존재로, 그리고 충만한 샘이며 모든 존재의 원천이고 모든 창조물의 부모인 분을 향하도록 지시된 존재가 되어간다. 이런 종류의 삼위일체 영성을 의식하면서 얻게 되는 기쁨 중 하나는 그것이 이미 전례 안에 있다는 새삼스런 발견이다. 

 

나는 이제 나의 매일의 직무를 관계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이 직무는 신자들이 지역교회에 속하고, 그들이 친교이신 하느님 안에 속한다는 것을 증언함으로써 그들과 함께하도록 불린다. 사제로서 나의 역할은 모든 측면에서 교회 공동체의 진정한 경험을 모든 면에서 건설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넘어서 공동체를 건설하면서 다른 사람의 모든 행위를 격려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것은 세상에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우리의 친교의 더욱 깊은 의미를 지적하는 것도 포함한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찬례 안에서 하느님의 종말론적 친교에 대한 우리의 참여를 경축하는 것도 포함한다. 

 

직무에 대한 삼위일체적 접근은 필수적으로 상호 협조적인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 특히 다양한 종류의 팀 사목을 통한 모범적인 공동체의 구성을 포함할 것이다. 삼위일체의 친교에 중심을 두는 직무 신학은 모든 종류의 성직주의와 피라미드와 같은 계급적 사고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영성을 제공할 것이다. 이 신학을 지배하는 사고방식은 상호적이고 동등한 관계의 그것이다. 그것은 상호 내재적 사랑의 전망으로 힘을 얻는다. 

 

이러한 영성과 생활방식은 협력적이고, 능력을 부여하고, 모든 것을 포괄한다. 상호적이고 동등한 관계의 기준은 사제로서 우리의 삶과 직무에 근본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친교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상황에서, 권력의 운용은 변화를 경험한다. 여기서 권력의 본성에 대한 버나드 루머(Bernard Loomer)의 통찰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일방적인 권력과 관계적 권력을 구분한다(“Two Kinds of Power,” Criterion 15, 1976년 겨울 호). 일방적 권력은 단지 자신의 목적을 촉진하려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 권력은 자신의 영향력이나 지위를 유지하거나 증가시키려는 하나의 목표 안에서만 작동한다.

 

반대로, 관계적 권력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기 위한 포용력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통찰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감정과 가치를 고려하는 역량이다. 관계적 권력은 협박을 받거나 자신의 정체성과 자유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영향을 받고 협력적으로 행동하도록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루머는 예수님을 일방적 권력의 위계 맨 아래에 있는 분으로, 그러나 관계적 영성의 관점에서 이해된 삶의 절정에 있는 분으로서 예수님을 보았다. 관계적 영성은 “아래에서 오는” 힘이다. 그것은 난폭하지 않고, 참여적이고, 권한을 부여한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지배하는 권력을 금지시키고(마르 10,42-45), 단지 봉사자의 지도력만을 허용하는(요한 13,1-15) 복음서에 충실한 지도력을 반영한다. 나는 신앙인과 사제 직무를 위한 핵심적 시험 중의 하나는 권력을 일방적으로 사용하는지 아니면 관계적으로 사용하는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생활과 직무는 침묵과 기도 속에서 오는 자유 안에서 유지될 때만이 참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주교와 교구 사제단과의 밀접한 친교의 마음에 의해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나는 삶의 성찰, 기도, 그리고 전례를 위한 소모임에서 다른 사제들과 정기적인 만남의 기회를 갖는 것이 아주 필요하고 대단한 은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나는 공동체에서 살아갈 필요 - 현재의 구조에서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지는 않은 선택이다. - 를 인식하게 되었다. 

 

사랑 안의 친교이신 하느님께 대한 나의 인식이 성장함에 따라, 사람들과의 친교가 나의 영성과 존재에 더욱더 중심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친교는 이전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이 친교는 궁극적 실재를 표현하고 거기에 참여한다. 상호 사랑의 관계는 교회의 메시지를 구성한다. 관계는 교회 그 자체이다. 지역교회 안에서 사제 직무로 불린 우리는 이 상호 사랑의 관계의 공적 표지이며 동인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성을 근본적으로 형성시킨다. 우리는 교회의 실존인 삼위일체적 친교의 가시적 표지이며 동인이다.

 

* 원문 : Donald B. Cozzens(ed.). “Personal Symbol of Communion”, The Spirituality of the Diocesan Priest, The Liturgical Press, 1997년, 73-84면, 엄재중 기자 편역. 데니스 에드워즈 신부는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 대교구의 신부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학교에서 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예수와 우주』(Jesus and Cosmos),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 : 생태신학』(Jesus the Wisdom of God: an Ecological Theology) 등을 집필했다.

 

[사목, 2005년 3월호, 데니스 에드워즈(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 대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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