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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4: 자신을 내어 주시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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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3-18 ㅣ No.422

[신앙의 해 특집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 (4) 자신을 내어 주시는 하느님


지난 호까지 교회는 단순한 믿는 이들의 모임이 아니라 신비인 하느님 구원 계획이 ‘지금 여기’ 세상에 드러나는 신적 친교의 자리이며, 그 친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구체적인’ 봉사에로 불린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된 ‘계시에 대한 이해’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7-28)


1. 전통적인 ‘계시’의 이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론에 대한 본격적 논의에 앞서 계시의 의미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계시(啓示, Revelatio)’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지만 그 함의(含意)를 잘 모르고 쓰는 용어 중 하나입니다. ‘계시’의 사전적 의미는 ‘Revelatio’라는 라틴어의 어원(Re-:제거하다, Velum: 막, 장막)과 더불어 한자의 자구적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진리나 사실을 하느님께서 깨우쳐 알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계시의 주체, 계시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자신을 ‘계시 종교’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보다 쉽게 설명하면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이루고자 하신 친교를 알려 주시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우리가 신앙의 대상인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의 역사 밖에 계신 분이 인간역사 안으로의 개입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신 바가 바로 ‘계시’라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계시’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바로 계시의 주인공이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고, 여기에서 모든 계시에 대한 것을 보고자 합니다. 이것을 다 살펴보지는 못하겠지만, 요약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논리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심’으로 시작된 이 계시는 오로지 하느님의 주권과 자유에 근거하기 때문에 인간을 능가하는 무엇에 해당하며 따라서 인간의 노력으로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실제로 ‘계시’를 보증해 주는 것은 하느님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계시는 하느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받아들여져야 할 무엇이다. 비록 우리의 이성으로 일부 알아들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질의와 탐구의 대상이 아닌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오히려 계시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숙고보다도 그것을 전수받고 지키고 전달하는 자로 여겨졌던 교회의 역할, 바로 ‘교도권’에 대한 강조로 이어져 버렸고 그것은 반대로 계시에 대한 전반적인 협소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강조와 협소화는 결국 계시를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에 대한 무시간적인 해설’(‘지금 여기’와 상관없이 주어져 있는 초월적 진리에 대한 해설)로 치부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동시에 이는 현재의 인간을 다만 그것에 따라 순종하고 따라 사는 피동적인 삶을 사는 존재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한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계시’는 글로 표현했을 때 ‘추상적’이고 ‘고정된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계시의 주인공이요 근원이신 하느님께서는 결코 ‘추상적’이고 ‘고정된 분’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이고 ‘살아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을 알아듣는 사람들도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2. 계시에 대한 새로운 시각, 지금 여기 역사 안에서

앞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을 언급하면서, “교회의 친교는 추상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체를 휘감고 있는 핵심적인 신학적 요소로서 ‘지금 여기’ 바로 이 세상에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해 교회는 봉사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이런 신학적 요소는 당연히 ‘계시’에 대한 이해의 바탕으로도 사용되고 있는데, 공의회는 추상적 진술이나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진리들의 총합체를 넘어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만남’이라는 개방성 차원에서 ‘계시’를 이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는 계시가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에 대한 무시간적 해설’로 격하되지 말아야 한다는 교회 자신의 자아성찰에서 나온 결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드러내시며, 더 나아가 언제나 새로운 상황을 특별한 방법으로 비추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는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말씀과 행위’(자기 양여)가 ‘계시’임을 믿는 교회의 신앙에서 비롯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구원 경륜 안에서의 인격적 계시와 그 정점인 그리스도

실제로 구원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인격적으로 접촉하고 말로 주고 받으며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인간의 모반과 불충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지만 하느님께서는 한 번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체험되어 온 ‘인격적 계시’는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때가 차자 능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는 단지 ‘성서적 세계’에 국한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민족과 세상 전체에 관련된 모든 시간을 아우르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신앙은 이것을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계시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나누시고자 한 신적 친교(사랑)가 알려지긴 했지만 비로소 예수님을 통해서 직접 체험되는 구체적인 친교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예수님은 그런 맥락에서 모든 계시 이해의 중심축이자 계시의 정점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는 태초부터 존재했던 말씀과 같았던 ‘계시’가 말씀일 뿐만 아니라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체험되고 추구될 수 있는 것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주어졌기에 우리는 계시를 단지 ‘추상적’으로 치부해 버릴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실제로’ 우리 인간 안에서 함께 사셨던 ‘그분’을 통해서 체험되어진 계시는 ‘구체적인 무엇’이지, 하느님 자신에 대한 정보전달과 같은 추상적인 수준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실제로 우리와 함께 사셨고 지금도 교회의 성사성(도구의 역할)을 통해서 함께 사시는 ‘그분의 말과 행위’, ‘그분의 삶 전체’를 통해 체험 될 수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하느님의 계시’임을 교회는 다시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4. 세상에 뿌리 내린 계시

계시헌장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시는지 그 방법을…체험하게 하시고…그 방법을 날로 더 깊고 더 분명하게 깨달아 만백성에게 더욱 널리 알리게 하셨다.”(계시헌장 14항)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계시와 우리 평범한 일상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려면 저 멀리 하늘 위에서나 세상 밖에서가 아니라 바로 새로워진 세상 안의 구체적인 현실에서부터 만나야 함을 의미하고, 이에 상응하여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도 이 세상 안에서부터 뿌리내려야 한다는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를 ‘계시론’에서는 ‘인간과 초월자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이 서로 인격적인 통교 안에서 일어난다고 말하는데 여기에 ‘계시’의 본질이 있다는 것이고, ‘계시’의 목적도 이와 연결되어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계시는 추상적인 사건으로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구체적인 인간구원’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정점에 달한 하느님의 계시는 인간을 향하여 세상 역사 안에서 이렇게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그분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완성’을 향한 도정(道程)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에게 끊임없이 체험되는 계시는 가리움 없이 그 완전한 실현이 이루어질 그분과의 일치를 향해 ‘항상 개방되어’우리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14)

다음 호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론에 대한 두 번째 부분으로 이 계시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는가? - 교회생활과 성경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월간빛, 2013년 2월호, 최석환 요셉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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