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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37-38: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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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1-13 ㅣ No.468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37)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1512-1517년) (상)

반 교황파 문제 처리하고 교회 개혁 위해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율리오 2세는 호전적이었지만 또한 미켈란젤로와 브라만테 같은 예술가들을 옹호하고 특히 브라만테의 제안을 받아들여 성 베드로 대성전을 신축하기도 했다. 사진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성 베드로 대성전 일대.
 
 
16번째 세계 공의회인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와 17번째 세계 공의회인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1431~1445)와 관련해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공의회 우위설'입니다. 보편(세계) 공의회의 권위를 교황보다 우위에 두는 공의회 우위설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서구대이교(西歐大離敎, 교황이 둘, 셋으로 나뉘어 서방 교회가 분열된 것)를 종식시키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는 오히려 대립 교황을 선출해 교회를 다시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재위 1431~1447)는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 공의회 우위설을 용인하는 콘스탄츠 공의회 교령 '프레쿠엔스'를 무효로 선언하고 공의회 우위설을 따르는 이들을 이단으로 단죄했습니다만, 그 이후에도 공의회 우위설은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또 세속 군주들은 교황권을 약화시키는 데 공의회 우위설을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교황 권한을 위축시키고 약화시키는 공의회 우위설을 교황들이 달가워할 리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503년 10월 16일 비오 3세가 교황 즉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선종했습니다. 추기경들이 콘클라베를 통해 만장일치로 선출한 후임 교황이 율리오 2세(재위 1503~1513)였습니다.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1484)의 조카로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출신인 그는 60살 고령이었지만 야심이 있었고 호전적이었습니다. 그는 교황에 선출되면서 2년 이내에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서약했지만 서약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황령(교황이 직접 관할하는 영토)을 회복해 교황청 재정 적자를 만회하고 교황권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직접 전장에 나가 싸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탈리아가 프랑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교황 율리오 2세
 
 
율리오 2세 교황은 또 예술을 옹호해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같은 당대 거장들을 지원했습니다. 브라만테의 제안을 받아들여 성 베드로 대성전도 신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리오 2세의 이런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단의 추기경들이 공의회 우위설에 근거해 1511년 9월 이탈리아 북부 피사로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교황이 콘스탄츠 공의회의 교령 '프레쿠엔스'를 무시할 뿐 아니라 2년 이내 공의회를 개최하겠다는 애초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고 교회 개혁도 더 늦출 수 없다는 것이 소집 이유였습니다. 교황과 대결을 벌이던 프랑스 왕 루이 12세도 추기경들을 지원했습니다. 예정보다 한 달 늦은 10월 1일에 시작한 피사 공의회에 참석한 고위 성직자들은 30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프랑스파 일색이었습니다.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피사 공의회에 맞서 교황 율리오 2세 역시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율리오 2세는 피사 공의회가 열리기 전인 1511년 7월 공의회 소집 칙서를 통해 1512년 4월 19일 로마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공의를 개최한다고 발표합니다.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입니다.
 
18번째 세계 공의회로 기록되는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당초 발표보다 늦은 1512년 5월 3일(혹은 5월 10일) 교황 율리오 2세 주재로 개막합니다. 개막 회의에는 추기경 15명을 비롯해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라틴 교회 총대주교들, 대주교 10명과 주교 50여 명, 그 밖에 대수도원장들과 수도회 총장 약간 명과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 도시 국가들의 사절들이 참석했습니다.
 
1517년 3월 16일까지 거의 만 5년 가까이 전체 12회기로 진행된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전체 참석자 수는 430여 명이었으나 매 회기마다 평균 100명 안팎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했고, 그나마 절대다수가 이탈리아 출신이었습니다. 공의회는 1512년과 1513년에 각각 4차 회기를 열었고, 1514년부터 1517년까지는 매년 한 차례씩 회기를 진행했습니다.
 
교부들은 안건 논의를 위해 24명으로 이뤄진 위원회를 구성했고, 위원회는 또 8개 소위원회로 나뉘어 활동했습니다. 피사 공의회를 소집한 반 교황파 추기경들에 대한 처리 및 교회내 평화 도모 문제, 교회 개혁 문제, 영혼 불멸에 관한 문제 등이 주요 안건이었습니다.
 
1512년에 열린 네 차례 회기에서는 반 교황파 추기경들이 소집한 피사 공의회 문제를 주로 다뤘습니다.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됐습니다. 영국과 아라곤의 왕 그리고 독일 황제 모두 피사 공의회를 비판하면서 라테라노 공의회를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프랑스 왕 루이 12세만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여전히 피사 공의회를 지원했습니다.
 
율리오 2세 교황은 1513년 2월 제6차 회기 때 교황 선거에서 성직 매매를 금하는 칙서를 마련토록 하라고 지시합니다.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율리오 2세 교황의 마지막 과업이 된 이 칙서는 금전을 미끼로 또는 지위를 보장한다거나 편의를 봐주겠다는 약속 등으로 교황에 선출될 경우 그 선거는 무효이며, 뇌물을 받은 이들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교황이 사면할 때까지 파문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율리오 2세가 얼마 후 선종하고 후임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가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의 유업을 물려받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피사 공의회에 대한 지원에 부담을 느끼던 프랑스 왕 루이 12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던 율리오 2세 교황이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자 더는 피사 공의회를 지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는 교황의 스위스 동맹군에게 대패하고 맙니다. 결국 루이 12세는 1513년 말 피사 공의회를 중단시키고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합법적인 보편(세계) 공의회로 인정합니다. 피사 공의회에 참석한 일부 추기경들도 레오 10세 교황에게 돌아왔습니다.
 
레오 10세 교황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명한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조반니 데 메디치로 어릴 때부터 교회에 봉헌됐고 13살에 이미 부제 추기경이 됐습니다. 위대한 로렌초라고 불리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당시 르네상스식 교육을 받은 그는 문학과 예술, 음악에 심취한 풍류가였습니다. 호전적인 율리오 2세 교황에게 질린 추기경들은 후임 교황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그러나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38살 조반니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했습니다. 아마 과도기 교황 쯤으로 여겼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교황에게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의 주요 과제인 교회 개혁 안건이 넘어간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1년 11월 6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38)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1512-1517년) (하)

교회 개혁, 씨 뿌렸으나 열매 못 거둬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열린 로마 라테라노 대성전 외부 전경.
 
 
공의회 개최와 경과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레오 10세 교황 원년인 1513년 12월 제8차 회기에서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신앙 교리로 규정합니다. '인간 영혼은 불멸한다'는 교리는 이미 제15차 세계 공의회인 비엔 공의회(1311~1312)에서 확인한 바 있는데, 이 교리를 다시 규정하게 된 것은 이슬람 철학자 아베로에스(1126~1198)의 영향을 받아 영혼의 불멸성을 부정하는 사조가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당대 선도적 사상가로서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 대학 교수이던 피에트로 폼포나치(1462~1525)의 영향으로 인간 영혼이 사멸한다거나 혹은 영혼이 각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단 하나의 영혼만이 있다는 주장이 확산됐습니다. 공의회는 이런 주장에 맞서 인간 영혼이 불멸할 뿐 아니라 각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진다는 가르침을 신앙 교리로 선언했습니다.
 
공의회는 1514년 3월 제9차 회기에서는 주교 선출 문제와 성직자 복장 문제, 독성죄, 교회 재산 보호 같은 문제를 다룹니다. 교회 개혁 특히 성직자 생활의 개혁과 관련해 많은 문제들이 거론됐습니다만 막상 교령으로 결정된 사항들에는 새로운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1515년 5월 제10차 회기에서 발표한 '신심의 산'(montes pietatis)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금융업이 생겨나면서 고리대금업이라고도 부르는 돈놀이에 일찍부터 눈을 뜬 이들은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다른 일에 배제되는 경우가 많아 어찌할 수 없이 이 분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전문적 고리대금업자들은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오히려 더 무서운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이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놀아나지 않으면서 필요한 돈을 빌려 쓸 수 있도록 신심 단체들이, 말하자면, '사랑의 전당포'를 운영했습니다. 이를 '신심의 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대부사무소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받아 사용하는 것을 두고 교회가 금하는 고리대금업을 한다는 비난이 계속 제기됐습니다. 사랑의 전당포를 운영하는 쪽은 주로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이었고, 반대로 이를 고리대금업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은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었습니다. 공의회는 '신심의 산'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합법적이며 결코 고리대금업이 아니라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추후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이들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가리지 않고 파문에 처한다고 발표합니다.
 
교황 율리오 2세 후임으로 공의회를 속개한 교황 레오 10세.
 
 
이 10차 회기에서 공의회는 또한 출판물 검열 원칙들을 마련합니다.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당시에는 이미 음란물이 수지맞는 사업으로 등장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에 해로운 서적들도 나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의회는 교구장 주교에게 출판물 검열 책임을 맡기고, 출판물에는 검열을 받았음을 반드시 인쇄로 명시하도록 했습니다. 교회에서 유포되는 출판물들에 대해서는 교회 인가를 받도록 하는 관행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1516년 12월에 열린 제11차 회기에서는 설교와 관련된 사항을 규정합니다. 공의회는 설교가들에게 '종말이 가까이 왔다' '그리스도의 적이 퍼져 있다' 또는 '하느님의 진노가 우리를 곧 우리를 태워 버릴 것이다' 같은 어두운 종말에 관한 예언을 금하면서 이런 예언을 하는 이들을 거짓말쟁이라고 규정합니다.
 
공의회는 나아가 다른 성직자들의 죄를 비난하는 설교도 엄격히 금했습니다. 당시 일반 대중들에게 설교하는 일은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같은 탁발 수도회 수도자들 몫이었는데 이들이 주교를 비롯한 고위성직자들을 비난하는 일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회는 이 탁발 수도회 장상들에게는 수사들이 신심이 있고 설교할 합당한 자격이 있는지를 감독하도록 하고 탁발 수도자들에게는 설교할 때에 관할 지역 주교들에게 소속 수도회 장상의 추천서를 제시하도록 했습니다.
 
사실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기간 중에는 주교들과 수도회들 간의 대결이 치열했습니다. 주교들이 수도자들에 대해 많은 불평을 표시했는데 이는 프란치스코회나 도미니코회 같은 탁발 수도회들이 설립 이후 역대 교황들에게서 특권을 받았는데 수도자들에게 자율권을 주어 해당 지역 주교들의 통제를 받지 않도록 한 것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더욱이 이들 탁발 수도자들은 주교들이 세속적이고 물질에 집착하며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고 대놓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교황 레오 10세가 개입해서야 해결책이 마련됩니다. 공의회는 수도회 장상들이 소속 수도자들에 대한 감시 감독 의무를 소홀히 할 때 주교들이 개입할 수 있도록 하면서 아울러 본당 관할 구역 내에서 본당 신부의 허락 없이 수도자들이 설교나 기타 영적 보조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제한했습니다. 또 주교가 파문한 이들에 대해서는 수도자들이 사면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또 1516년 프랑스와 정교 조약을 승인합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 왕은 프랑스에 있는 주교 93명을 비롯해 대수도원장과 수도원장 510명을 추천할 권리를 얻습니다. 말하자면 프랑스에 있는 거의 모든 교구와 수도원들의 장상을 프랑스 왕이 사실상 임명할 권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 대가로 교회는 프랑스와 프랑스 교회가 바젤 공의회의 이설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는 보장을 프랑스 왕에게서 받아냅니다.
 
바젤 공의회는 이미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서 단죄받았지만 프랑스 왕과 프랑스 교회는 단죄된 바젤 공의회의 공의회 우위설에 입각해 계속 활동한 것입니다. 교회로서는 이교를 종식한다는 명분을 얻었지만 또한 교회에 고유한 인사권을 세속 권력에 내주었습니다. 이 관행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때까지 계속됩니다.
 
라테라노 공의회는 1517년 3월 제12차 회기를 끝으로 폐회합니다. 이 마지막 회기에서는 오스만투르크제국에 맞서 십자군 원정을 결의하고 아울러 모든 교회록(성직록, 성직자들이 받는 일종의 교회 소유 토지와 그 수입)에 대해 3년 동안 세금을 부과하기로 의결합니다.
 
 
공의회에 대한 평가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폐회하고 난 지 7개월이 지난 그해 10월 31일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자이던 마르틴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교회를 비판하는 95개 명제를 내겁니다. 이것은 교회 개혁을 주요 과제로 삼은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과제에 부합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교황과 교황의 최측근 참모들인 교황청 추기경들에게 개혁을 야심차게 실행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교회사학자들의 일반적 평가입니다. [평화신문, 2011년 11월 13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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