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연길교구: 김영렬 세례자 요한과 북관의 12사도 |
---|
[연길 교구 설정 80주년 기념 특집 기사] 겨자씨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 김영렬 세례자 요한과 북관의 12사도
조선 천주교회 역사가 그러하듯이 간도에 복음이 들어오게 된 계기도 선교사들의 활동 때문이 아니었다. 기념행사가 열렸던 1936년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인 1896년 5월 17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호천개湖泉浦(現 용정시龍井市 개산둔진開山屯鎭 회경촌懷慶村) 출신 김영렬金英烈이라는 이가 원산 본당에서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간도에 복음이 들어왔다. 김영렬 세례자 요한은 고향으로 돌아와 이웃과 친지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알렸고, 몇몇을 설득하여 원산 본당으로 데려가 세례를 받게 하였다. 1896년 가을에 유패룡劉覇龍 로렌조와 최규여 그레고리오를 원산으로 데려가 세례를 받게 했고, 1897년 봄에는 일가친척과 지인들을 원산으로 이사시켜 교리를 배우게 하였다. 그들은1897년 예수승천 대축일에 세례를 받았는데 이들 중에 우연찮게 남자가 12명이 되어서, 세례를 베풀었던 원산 본당 주임인 브레(Louis Eusebe Armand Bret, 白類斯, 1858-1908) 신부가 그들을 북관北關의 12사도(앞의 다섯 노인 중 최규여 그레고리오를 제외한 나머지 이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됨)라고 불렀다. 김영렬 세례자 요한과 앞서 세례 받은 이들과 북관의 12사도들 중 8명이 간도로 돌아가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고, 그 중 몇몇은 공소회장으로 임명되어 간도에 본당이 세워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김 석사가 죽고 난 후 제자들은 흩어졌다. 시국이 안정되고 제자들이 다시 모이게 되면서, 스승의 필생의 사업이었던 진교탐색眞敎探索이 거론되었다. 1896년 봄 수제자였던 김영렬이 “우선 서울까지 가서 새로운 도道인 서학을 알아보겠다!”며 길을 나섰다. 그야말로 구도여행이었다. 들르는 동네마다 사람들이 믿는 도가 있는지, 혹은 어떤 글을 외우는지 살펴보았다. 두만강을 넘어 남쪽을 향해 2천 리나 되는 길을 걸어 원산에 당도하였다. 원산에서 여인숙을 잡고 하룻밤을 묵던 날이었다. 옆집에서 초상을 치루는 데, 신비로운 곡조로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영렬은 집주인에게 가서 무슨 교의 기도냐고 물었다. 집주인이 대답하기를 자신들은 천주교인들인데 망자를 위하여 연도煉禱를 바친다고 했다. 연도를 듣던 김영렬은 천주교가 어떤 도인지 궁금해졌다. 연도가 끝나고, 밤을 새워가며 천주교에 대하여 묻고 대답을 들은 김영렬은 천주교가 바로 자신의 스승 김이기가 말한 새로운 도요, 참된 종교임을 확신했다. 그리하여 험난한 구도여행은 원산에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튿날 김영렬은 원산 본당을 찾아가 주임인 베르모렐(Joseph Vermorel, 張若瑟, 1860-1937) 신부와 장시간 토론을 하고나서 입교를 결심하였다. 그의 영혼은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느님께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영렬은 미친 듯이 교리와 기도문을 배웠다. 그가 얼마나 열성적이었던지 예비자 교리를 마치는데 겨우 삼 주가 걸렸다. 세례를 받은 김영렬은 성경과 성물들을 가지고 고향으로 가서 친지와 김석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동문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모두 김영렬을 반기며 입교할 것을 결심하였고, 흥미롭게도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원산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김영렬은 다시 원산으로 내려와 눈다리라는 동네에 농토와 집을 마련하고 후에 무리지어 올 예비자들의 거소를 마련했고, 동시에 같이 데려온 유패룡과 최규여를 입교시켰다. 그 이듬해 북관 12사도가 원산에 와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원산 본당 주임이었던 브레 신부는 천주교를 믿으며 원산에 살겠다는 그들을 극구 만류하였다. 브레 신부가 북간도로 사목방문을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그들은 본고장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간도에 첫 겨자씨가 심어진 사연이다. 김영렬 세례자 요한과 북관 12사도는 간도에 천주교회가 뿌리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이 고향에 돌아온 후 처음 한 일은 신자들을 모아 학서골(鶴棲洞), 싸리밭굽(三元峰), 용정 부처골(佛洞) 등지에 교우촌을 만드는 것이었다. 일반 사람들에게 천주교가 호감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라, 교우들이 중국인들과 조선 이주민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공소회장으로 임명되어, 선교에 힘을 쓰거나, 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간도에 막 뿌리를 뻗어 가는 신앙 공동체의 역동적인 모습에 대해, 1901년 1월에 처음으로 간도에 사목 방문을 갔던 뮈텔 주교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보름 동안 우리는 100명이 넘는 성인에게 영세를 주었습니다. 신자 수는 현재 700명이 넘습니다. 입교한지 얼마 안 된다 하더라도 이들은 훌륭한 신자들입니다. 그들의 검소한 생활은 아주 모범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체면 존중 같은 것이 없는 완전한 그리스도교입니다.” 1907년 11월 간도에 최초로 용정 본당이 생겨날 때까지 그들은 목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신앙의 못자리를 가꾸었다. 1909년5월 1일 삼원봉에 둘째 본당이 세워지고, 1910년 9월 26일 팔도구에 셋째 본당이 세워질 무렵 한 알의 겨자씨는 훌륭하게 자라나 2,723명의 신자들에게 넉넉한 그늘이 되어주는 큰 나무로 자라나 있었다.
[분도, 2008년 가을호, 글 편집부, 사진제공 역사자료실, 전대식 프란치스코 기자(평화신문)] 0 1,47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