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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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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6-20 ㅣ No.690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 (상)


‘작은 사람’ 겸손함으로 신앙 실천

 

 

-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 창립자 성 쟌 쥬강(이콘).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의 영성은 창립자 성 쟌 쥬강이 말하는 ‘작은 사람’의 단순함에서 나타난다. 프랑스혁명이 한창이던 1792년 태어난 성인은 자유와 진보를 부르짖는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순수하게 증거하는 삶을 살아갔다.

 

어려서 부친을 여읜 성인은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16살부터 저택의 주방 보조, 간호조무사 등으로 일해왔다. 성인에게 가난과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가난과 노동을 경험하며 성장한 성인은 그 안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찾게 된다. 성인은 일하던 어느 날 젊은 선원의 청혼을 두 번이나 받았는데, “하느님께서 저를 원하십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사업을 위해 저를 원하십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그리고 25살이 되던 해에 ‘탄복하올 성모 성심 제3회’에 입회, 오직 하느님과 이웃 특히 가장 불쌍하고 소외 받는 형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섬기기로 결심했다.

 

“작은 사람이 되세요. 하느님 앞에서 아주 작은 사람이 되세요. 단순하고 겸손한 자세를 간직하세요.”

 

성인은 생애에 걸쳐 늘 ‘작음’을 당부했다. 이 작음이란 다름 아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이다. 하느님만이 모든 것이고,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채우신다는 것이다. 그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고,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가능했다.

 

성인은 ‘탄복하올 성모 성심 제3회’ 회원으로 20여 년간 생활하면서 예수님과 성모님의 신비를 관상함으로써 영혼을 순수하게 정화시켜 나갔다. 그러면서 ‘작은 사람’의 단순함으로 신앙을 실천했다.

 

성인은 47세가 되던 1839년 겨울의 어느 저녁, 눈 멀고 반신불수로 구걸하다 길에 쓰러져 있던 할머니 한 분을 모셔왔다. 성인은 자신의 침대를 내주고 지극정성으로 할머니를 돌봤다. 바로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의 시작이다. 그렇게 모셔온 어르신이 한 명, 두 명 늘어나 1843년에는 40명에 이르렀고, 성인의 모습에 감화된 젊은이들이 이 일에 동참했다.

 

성인은 수도회 초대 원장으로 추대됐지만, 곧 원장직을 부당하게 박탈당했다. 심지어 수녀회 설립 역사조차 왜곡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인이 창립자이자 초대 원장이었다는 사실조차 잊혀졌다.

 

성인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금을 하러 다니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성인은 침묵과 온유, 내맡김으로 하느님 앞에서 작은 사람으로 살아갔다. 성인과 함께 생활하던 수련자들은 성인이 창립자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성인의 영성에 큰 영향을 받았고 수녀회에 성인의 영성이 이어질 수 있었다.

 

성인이 선종한지 20여 년이 지나서야 성인이 수녀회의 창립자였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생전에 성인을 통해 일어난 기적들도 알려지게 됐고, 성인의 전구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 마침내 성인은 1982년에 시복, 2009년에 시성됐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2년 6월 19일]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 (중)


소외된 어르신들 사랑으로 섬겨

 

 

- 어르신들과 나들이를 하고 있는 수녀들의 모습.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 제공.

 

 

설립자 쟌 쥬강 성인은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났다.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환대의 기쁨 안에서 영적 단순함으로 헌신한 성인의 영성은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라는 수도회 이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수도회의 영성은 곧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참된 행복의 복음 정신이기도 하다. 가난한 이들에게 작은 자매가 돼주는 수도회의 영성은 회원들이 누구를 위해 봉헌됐는지를 일깨워준다. 수도회 회원들은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을 입으며’ 쟌 쥬강 성인의 정신을 닮아가고자 노력한다.

 

성인은 가난한 이들을 사랑으로 대하면서 동시에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섬겼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이들을 존경으로 대하고, 특별히 가난한 이를 통해 이뤄지는 파스카의 신비를 믿고 신뢰하면서,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돼 가난한 이와 함께하려는 소망으로 살아갔다. 더 가난한 이들의 곁에서, 더 작아지는 성인의 삶은 성인을 자유롭게 했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게 했으며, 완전히 기쁨에 넘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었다.

 

성인이 가난한 어르신을 모셔왔듯이, 수도회는 유일무이한 사도직으로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어르신들을 인종, 종교 등의 조건에 관계없이 맞아들이고 존경과 사랑으로 그들의 육신을 잘 보살피면서, 무엇보다도 어르신들이 자비하신 하느님을 알게 하고, 이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는 ‘경로수녀회’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수도회는 어르신들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분들로 여기고 그들을 격려하고 보살피면서 어르신들이 삶의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 동반하고 있다. 수도회는 어르신들 각각의 가족관계와 신념을 존중하면서도 안락사 등 생애 말기에 올 수 있는 생명 경시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수도회는 국제 공동체 안에서 형제적 사랑을 나누면서 또한 직원들과 쟌쥬강회 회원, 봉사자들과 협력하면서 함께 사도직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쟌쥬강회는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의 영적 가치를 함께 나누면서 가난한 어르신을 위해 자선과 봉사를 실천하는 신자들의 모임이다.

 

수도회는 수도회 초창기와 마찬가지로 모금 활동을 통해 사도직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 모금 활동은 ‘작은 자매’로서 겸손과 단순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조건 없는 신뢰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활동적인 면에서 영성이 어르신을 섬기는 것이라면, 내적인 면에서 수행하는 영성은 ‘참된 행복’이다. 이러한 정신은 회원들이 사도직에 투신하는 근거이자 양식이다. 수도회는 어르신을 섬김과 동시에 사도직을 확장해 나가면서 선교하고, 이를 통해 수도회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또한 쇄신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2년 6월 26일, 이승훈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 (하)


가난의 영성 따라 돌봄 · 모금에 헌신

 

 

- 2018년 8월 평화의 모후원에서 쟌 쥬강 성인 축일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는 1971년 한국에 진출, 1990년에는 수원에 ‘평화의 모후원’을 세우고 “가난은 나의 소중한 보물”이라 말했던 창립자 쟌 쥬강 성인의 영성을 따라 어르신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1879년 쟌 쥬강 성인이 86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2400여 명의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이 프랑스, 영국, 벨기에, 스페인, 아일랜드, 미국, 북부아프리카, 이탈리아, 몰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882년에는 인도를 시작으로 아시아에 진출했지만, 수도회와 한국과의 인연은 그보다 80여 년 뒤다.

 

1963년 수도회는 당시 서울대교구장 고(故) 노기남(바오로) 대주교의 요청으로 진출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방문 당시 수원교구장이던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도 수원교구에 수도회 진출을 요청했다. 마침내 1971년 푸른 눈의 수녀 2명이 파견되면서 한국에 진출했다.

 

처음 청주교구에 양로원을 세우고 자리를 잡은 수도회는 1990년 두 번째 양로원인 ‘평화의 모후원’을 수원에 마련했다. 평화의 모후원은 양로원과 수녀원, 그리고 수녀들의 수련소를 겸비한 장소다. 평화의 모후원에 설립된 수련소는 세계에서도 10번째로 마련된 수련소다. 한국 진출은 수도회가 설립된 지 100여 년 후에 이뤄졌지만, 한국분원의 성장이 괄목할 만큼 컸던 것이다.

 

수녀들의 소임은 주방, 식당, 빨래방 등 다양하지만, 노인들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쏟는 것만큼은 공통적인 소임으로 삼고 있다. 수녀들은 어르신들을 부모처럼 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1974년 첫 양로원을 개원했을 때는 엘리베이터와 난방시설, 수세식 실내 화장실을 갖추고 있어 ‘가난한 노인이 살기에 사치스럽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수녀들은 ‘친부모라면 이 정도 대접은 당연했을 것’이라 여겼고,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지켜나갔다.

 

이런 어르신 봉양은 모두 수녀들의 모금 활동으로 이뤄졌다. 수도회는 쟌 쥬강 성인의 가르침대로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사업을 운영하지 않는다. 모금 활동 중 수녀들이 냉대를 받기도 하고 쫓겨나는 일까지도 있었지만, 수녀들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면서 모금에 나섰다. 수녀들은 모금 중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어르신을 모시고 있음을 알려왔다. 이런 수녀들의 활동에 감화된 냉담 교우 가정이 회두하기도 하고, 고속버스회사가 2년 동안 모금을 나서는 수녀들을 무료로 태워주는 일도 있었다.

 

수녀들이 어르신 돌봄과 모금활동에 헌신할 수 있는 힘은 기도에서 온다. 특별히 수도회는 공동체가 함께하는 기도를 중요시한다. 낮기도 외에 다른 모든 시간전례를 공동체 기도로 바친다. 모든 식사 시간도 영적 독서를 낭독하는 가운데 침묵 중에 이뤄진다. 하루 종일 수십 명의 어르신을 모시는 바쁜 일과를 보내지만, 그 사이에 반드시 별도의 성체조배를 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2년 7월 3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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