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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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원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26: 왕림성당 - 조불수호통상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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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6-21 ㅣ No.1702

[수원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26) 왕림성당 : 조불수호통상조약


박해 이겨낸 신앙, 조선교회 다시 일으킬 희망의 꽃 피우다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는 1873년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끝을 맺게 됐다. 병인박해 중 선교사들 대부분이 순교하거나 조선을 벗어나 탈출했고, 800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는 등 조선교회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만에 조선 땅에는 본당들이 세워지게 된다. 1888년 설립된 교구 최초의 본당, 왕림본당도 이런 중에 세워진 본당이다.

 

왕림성당 전경. 사진 이승훈 기자

 

 

선교사들의 재입국 시도

 

병인박해로 탈출한 선교사들은 박해의 기세가 약해지면 즉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중국 곳곳에서 전전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비록 조선에서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1868년 중국 차쿠에서 조선대목구 성직자 회의를 열어 조선 입국이 가능해지면 선교활동을 체계적으로 펼칠 수 있도록 활동 방침을 점검하고 조선 입국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거센 박해, 그리고 밀고자들의 추격으로 번번이 입국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고,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마르티노 신부는 병을 얻어서 선종하기까지 했다.

 

1876년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이 수호통장조약을 체결하면서 그동안 쇄국을 고수하던 조선 사회는 개항을 하게 됐다. 이에 병인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은 신자들은 다시 본격적으로 성직자 영입을 추진했다.

 

신자들은 중국 차쿠에 머물던 선교사들과 연락을 주고받았고 마침내 서해안 대청도에서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접선할 수 있었다. 대청도에서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가 조선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리델 주교는 두세 신부, 로베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리델 주교는 도착 즉시 조선 신자들을 위한 기도서와 교리서 발간을 위한 인쇄소 건립을 추진하고, 소신학교를 세우고자 했다. 또 부대목구장을 서품하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델 주교는 1878년 1월 붙잡히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리델 주교는 처형당하지 않고 조선에서 추방됐지만, 함께 체포된 신자들은 감옥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1879년에는 드게트 신부가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체포됐다. 하지만, 고문 등이 자행되지 않았고, 주중국 프랑스 대리대사가 조선 정부와 교섭하면서 무사히 석방됐다. 드게트 신부의 석방은 선교사들에게 희망을 줬다. 조선의 박해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고, 나아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었다.

 

- 왕림성당 성모동산. 사진 이승훈 기자

 

 

조불수호통상조약

 

주중국 프랑스 대리대사의 활동으로 리델 주교와 드게트 신부가 석방되면서 선교사들은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던 중 1882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도 조약을 위해 적극적으로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조약은 쉽지 않았다. 조선은 프랑스가 조선과 전쟁을 치른 나라인 점, 그리고 선교의 자유를 얻으려 하는 점 등에 있어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이에 조선어-프랑스어 사전과 조선어 문법책을 인쇄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코스트 신부는 베이징에 프랑스 총영사를 찾아 “이 문제는 신중함과 함께 인내가 필요하다”면서 조약문에 ‘윤리’, ‘가르치는 것’ 등을 첨가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직접적으로 ‘선교’를 언급하지 않고도 선교의 자유를 암시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프랑스는 선교사의 보호를 명문화하고자 했으나 몇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1886년 프랑스는 선교의 자유를 명시하는 것 대신에 타협안을 냈고, 조선도 이 안을 수용했다. 바로 코스트 신부가 제안했던 ‘가르치는 것’에 해당하는 교회(敎誨)라는 단어를 사용한 안이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 내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법적인 보호를 받으면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선교사로서 활동하는 것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지만, 프랑스인으로서 조선 내 여행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특히 제9관은 “언어와 문자, 법률과 예술 등을 학습 또는 교회(敎誨)하고자 조선에 가는 프랑스 국민은 항상 우호적인 도움을 받을 것이고, 프랑스에 가는 조선국인도 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다”라고 규정됐다. 비록 교회(敎會)라는 용어로 사용된 것은 아니기에 신앙의 자유가 완전히 명문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선교사들의 활동을 포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던 것이다.

 

 

본당의 설립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선교사들의 교회 재건 정책은 큰 힘을 얻었다. 선교사들은 더 이상 숨어다닐 필요 없이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으면서 조선 각지를 방문할 수 있게 됐다. 선교사들은 ‘양대인’(洋大人)이라 불리는 특권적 존재가 됐다.

 

이에 선교사들은 사목에 적극 나섰다. 1885년에 11명에 그쳤던 선교사 수는 10년 만에 23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늘어나자 선교는 더욱 활발해져 해마다 10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됐다.

 

게다가 더 이상 선교사가 박해를 피해 수많은 교우촌을 떠돌며 지낼 필요가 없었다. 선교사들이 각자 자기 관할지역에 사목 중심지가 되는 본당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1882년 오늘날 주교좌명동대성당인 종현본당이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강원 이천에 이천본당, 부엉골본당(현 감곡본당), 대구본당(현 계산주교좌본당), 원산본당, 안변본당 등이 설립됐고, 조선교회 7번째 본당으로 갓등이본당, 바로 교구의 첫본당인 왕림본당이 설립됐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4년 6월 16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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