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6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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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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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19-04-23 ㅣ No.2197

 

 

2019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 메시지

 

 서울대교구 

춘천교구

대전교구

인천교구

수원교구

원주교구

의정부교구

대구대교구

부산교구

청주교구

마산교구

안동교구 

광주대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군종교구

 

 

 

[서울대교구]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한반도 그리고 온 세상에, 특별히 북녘 동포들과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강원도 산불로 어려움을 겪는 주민들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화재 진압과 복구를 위해 애쓰신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고 공포에 떨게 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이긴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은 그분의 사랑은 결국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 인간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진 순교자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죽음 너머에 영원한 생명의 문이 열려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였기에 고통을 겪으면서도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고령과 무서운 질병을 끝까지 견뎌내면서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씀을 남겨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부활과 부활 신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임을 다음과 같이 힘차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예수님의 부활로 모든 인간 생명이 풍요로워졌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생명이 억압받고 있습니다. 만연된 물질주의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죽음의 세력이 그럴듯한 논리와 이론으로 포장되어 점점 더 힘을 얻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고통받은 이들 중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죽음의 세력은 경제적 이유로, 자유와 자율의 이름으로, 행복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생명을 억압하고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최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형사처벌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이 생명경시로 이어질까 우려를 표합니다. 이와 관련한 후속 입법 절차가 신중하게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합니다. 인간 생명이 가진 존엄성은 사회 경제적인 상황이나 다수의 의견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 생명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한 사람의 생명으로 보호되어야 하고, 그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생명은 가장 고귀한 가치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에 서 있는 우리 신앙인들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 편에 서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 두려움을 이겨내며 죽음보다는 생명을 택하는 데에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말이나 구호에 그쳐서는 안 되며, 생명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며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에 반대되는 죽음의 문화와 유혹을 단호히 배척합시다.

 

우리 교회의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쳐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신자들은 온갖 희생을 감수하고 각자의 가정에서부터,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부터 죽음이 아닌 생명을 선택하고,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우리 신앙인들의 자비로운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 평양교구장 서리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춘천교구]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그분 안에서 생명이 죽음을 이겼고,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이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노래합니다. 그 희망은 인간적인 희망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에 바탕한 희망입니다. 그래서 이천 년 전 부활의 빛을 세상에 비추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그 빛을 비추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

 

   삶의 어둠과 힘겨움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필리 4, 4) 세상 온갖 어둠을 이긴 빛이 이제 우리에게 비춰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 5)라는 주제로 맞이한 춘천교구 설정 80주년은 더더욱 우리에게 뜻깊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는 길이 무엇보다 주님 부활의 빛 속에서 걸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빛은 어둠이 없는 빛이 아니라, 어둠을 이기고 승리한 빛입니다. 그러하기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간직하며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는 길 위에 그 어떤 형태의 어둠도 우리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간다는 것은 또한 동시에 매 순간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새로운 결단과 선택을 요청합니다. 특별히 80주년을 맞아 우리가 살아가기로 다짐했던 것들을 매 순간 살아가도록 합시다. “남들이 바뀌길 바라기에 앞서 나부터 먼저 바뀌자, 서로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알고 사랑으로 하나 되자, 이미 받은 은총에 감사하며 신앙의 기쁨을 전하자”는 세 가지 실천 사항들을 통해 부활의 기쁨이 80주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 진정으로 녹아들길 바랍니다. 이를 통해 부활의 기쁨이 다가옴에 대해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기쁨을 살아가며 함께 나누는 모습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특별히 이번 부활을 맞이하며 지속적인 기도와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4월 초에 동해안 지역에서 있었던 산불로 인해 많은 아픔과 상실의 고통을 느끼고 계실 분들을 위하여 계속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그분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때가 어쩌면 가장 기도와 도움이 필요한 때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민족의 화해와 참다운 일치를 위해서도 기도와 관심을 바랍니다. 교구설정 80주년을 살아가며 감사하는 이 시간 속에서 특별히 우리 교구에 속해있는 북강원도의 북녘 동포들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남과 북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도록 참된 평화를 청하며 중단없는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80주년을 맞은 우리가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는 이 길이 결코 혼자 걷는 길은 아닐 것입니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모두 하나 되어서 걷는 길이며, 무엇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길입니다. 그분 부활의 빛이 늘 우리의 발걸음 마다 비춰지길 청하며, 부활의 기쁨이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의 모든 순간 속에 항상 머물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19년 부활절에
천주교 춘천교구장 김운회(루카) 주교

 

 

 

  

[대전교구]

“예수님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요한 20,9)  

 

 

알렐루야, 알렐루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이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가득하시길 빌며, 기쁨으로 부활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마음껏 축하할 수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한국교회 역사를 보면, 신앙 선조들이 부활절을 기뻐하는 잔치 중에 관아에 끌려가는 마음 아픈 장면이 있는데, 부활 인사를 이렇게 자유롭게 나눌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시공간을 뛰어넘어 오늘 복음(요한 20,1-9)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본 제자들은 시신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그토록 예수님 가까이에서 부활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어왔던 그들도 부활을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사실, 이들의 반응은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혜택을 부족함 없이 누리며,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활을 믿는 우리 모습이 놀랍기조차 합니다.
이 지점에 서서 부활을 기뻐하는 우리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봅니다. 나는 어떻게 부활을 믿게 되었을까? 예수님의 부활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내 삶에 얼마나 큰 희망을 주고 있을까? 나의 부활 신앙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말 힘들고 견디기 힘든 일을 만날 때,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그 고통을 견디는 위로와 힘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이 질문 앞에 분명한 것은 신앙이 하느님의 선물로 우리 마음에 심어진 신비라는 사실입니다. 부활 신앙은 그 정점에 놓인 신비입니다.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무엇을 희망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기준입니다. 부활을 믿을 때, 예수님의 죽음을 보며 분노하고 슬퍼하던 마음을 거두고 세상으로 나와 비로소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성경은 영화기록물처럼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사건을 경험했는지를 우리에게 전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확인하는 부활체험을 통해 성경의 부활 이야기를 이해하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는 제자들의 모습(루카 24,13-35 참조)도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변화되는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활체험을 포함한 우리의 하느님체험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성경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의 부활체험은 언제 일어날까요? 우리 시대의 부활체험은 다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이전보다 예민하게 느끼며 함께 아파할 때, 당장 손만 뻗으면 내 것이 될 이익을 양심의 움직임에 따라 포기할 때, 아무 희망이 없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견디며 가느다란 빛의 인도를 따라 걸어갈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어떤 보람도 느낄 수 없는 메마름 속에서 하느님만을 믿으며 사랑을 실천할 때,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알 수 없는 평안이 나를 감쌀 때, 불의와 거짓 앞에 타오르는 분노와 보복하려는 마음을 삭이고 보다 나은 세상을 건설하려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분출할 때, 바로 이때 합리성을 넘어서는 초월의 신비를 경험하며 부활 신앙이 우리를 이끌고 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고 신앙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당장 보이는 절망의 유혹을 이기고 세상의 누룩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악에 타협하지 않으며, 선과 정의와 평화를 ‘지금 여기’에서 가꾸어가는 사람입니다. 분단 앞에서 일치를 꿈꾸고, 차별과 지배의 문화를 거슬러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며, 경제적인 잣대로 존재의 가치를 평가하는 흐름에 맞서 생명의 신비와 배려의 풍성한 열매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미움과 전쟁의 야욕이 지구촌의 지도자들에게까지 퍼져나가는 현실 앞에서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합니다. 미래 세대가 살아갈 만한 세상, 삶이 기쁨이며 축복인 세상, 창조하신 모든 존재를 통해 하느님을 찬미하는 세상, 악의 모습에 가려진 인간의 선함을 신뢰할 수 있는 세상을 건설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나오는 평안과 사랑의 향기가 세상을 밝히고, 교회 안으로 세상을 초대합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깜깜하고 잔인한 세상을 비추는 희망의 불빛이 되고, 하느님을 보여주는 성사가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자매형제 여러분,
교회의 사명은 선교와 복음화로 집약됩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작용하며,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증거하는 가운데 궁극적으로 실현됩니다. 현대 교회의 위기는 교회의 사목과 신앙인의 삶이 그리스도의 현존과 사랑을 증거하지 못하는 상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이에, 우리 대전교구는 현대 세계의 징표를 읽고 교회 자체와 세상의 복음화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모범을 보이고자 시노드를 개최하였고, 이제 그 장대한 폐막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 교구의 시노드는 부활 신앙에 뿌리를 두고 현대 사회의 복음화를 충실하게 실현하기 위한 결단입니다.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려는 교구 시노드는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한 예수님의 부활, 곧 “예수님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요한 20,9)는 말씀에 기초합니다. 저는 지난 2015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기쁘지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구 하느님 백성 모두에게 “대전교구 시노드 개최”를 선포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주신 말씀들을 실행에 옮기기 위함이었습니다. 특별히 교황님의 권고인 『복음의 기쁨』과 우리 교구 정체성의 뿌리인 ‘순교영성’을 바탕으로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마음을 모아 우리 시대에 주어진 과제를 함께 고민해 가고 싶었습니다.
마치, 뜨거운 감동으로 눈을 뜨게 된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시노드를 통해 우리와 함께 걸어주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걸어온 교구 시노드는 4월 27일 솔뫼성지에서 폐막 미사를 통해 ‘최종문헌’을 발표할 것입니다. 폐막은 마침이 아니라, 모두 함께 고민하고 걸어온 대장정의 꿈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작년에 있었던 ‘세계주교 시노드’에서 교회의 사목은 바로 시노드 사목이라고 천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대전교구의 사목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이웃과 함께 걷는 시노드 사목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시노드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1베드 4,10)라는 주제성구를 선택하였습니다. 더불어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7)는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 더 많이 봉사하여 시노드를 살아가는 ‛첫째’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함께라면 갈 수 있는 길, 함께여서 갈 수 있는 길, 함께이기에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차이가 이해로, 이해가 일치로 변화되는 신비의 여정을 이끌어주시리라 믿으며, 우리 모두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시노드를 마치며, 새로운 여정을 함께 걸어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교구 시노드가 걸어온 모든 여정에 감사드립니다.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 올려 드립니다. 성모 마리아님, 우리의 장한 신앙의 선조님들, 그리고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시노드를 통해 우리 교구 공동체가 좀 더 성숙해지길 바라며, 시노드를 살아가는 새로운 여정에 모두의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9년 4월 21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유흥식 라자로 

  

[인천교구]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기쁨을 여러분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사도들의 외침과 증언은 전 인류에게 큰 기쁨과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죄와 죽음에 얽매여 있던 인류가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이들에게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도다.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도다.” (비잔틴 전례, 부활 대축일 마침기도)라는 기도문처럼 부활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넘어선 신앙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초대한 것이기에, 오늘의 기쁨을 ‘이 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24 참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부활 사건을 설명하는 성경 구절들을 마음을 열고 읽어봅시다. 주님이 돌아가신 뒤, 주간 첫날 새벽 몇몇 여인들이 무덤으로 찾아갑니다(루카 24,1 참조). 그들의 마음은 이미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허무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주님을 보면서 더 깊은 슬픔에 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기력함에 빠졌습니다. 이처럼 절망에 빠져 힘없이 무덤으로 가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희망도 목표도 없이 방황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발걸음이 주님의 무덤 앞에 이르렀을 때, 여인들은 놀라 당황합니다. 그리고 무덤이 비워져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너무 놀라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인간이 하느님의 신비를 마주 대할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처럼(루카 9,33 참조)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큰 사건을 만나게 되었기에, 그들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때 어떤 남자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 그 말을 들은 후에야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는 부활의 기쁨에 가득 차서 사도들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들의 절망과 슬픔은 기쁨과 희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이들은 그 크신 은총에 매료되고, 그 크신 사랑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고 느끼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갑니다. 새로운 삶이란 주님의 말씀과 은총,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주님의 부활 신비를 체험하며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과거의 우리’가 아닌 ‘새로운 우리’가 되도록 변화시키는 큰 은총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 6,8)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큰 은총입니까? 또한 주님 부활의 신비에 다가설수록 주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사실 주님은 공생활 중에 말씀과 업적을 통해 많은 이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굶주리는 이들,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 절망에 빠진 이들, 삶에 방황하는 이들 모두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주시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 신앙은 바로 주님께서 생명이심을 알려줍니다. 그러기에 주님 안에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도 그 생명을 살아가며 보호하고 전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부활을 체험한 이들이 다른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통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알려주었듯이, “이제 출발합시다. 가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합시다.” (복음의 기쁨 49항)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도 부활을 증언하면서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길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 시대에 만연되어 있고, 때로는 당연시되고 있는 반 생명의 문화, 죽음의 문화에 대하여 ‘아니오’ 할 수 있는 신앙의 힘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이번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선고를 내린 데에 깊은 유감을 표명합니다. 향후 국가법 개정이 이루어지면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의해 ‘인간의 생명’을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일이 발생되지 않을까 우려 됩니다.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은 그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서도 생명 존중은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선(善)이라고 가르칩니다. 다시금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잉태된 모든 생명이 죽을 위험에 처하지 않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인간의 자기 결정권보다 위에 있으며, 인간의 논리나 판단보다 위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모든 이들에게 특별히 절망에 빠져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주님 부활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부활 신앙을 살아가는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2019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수원교구]

 

하느님, 저희가 생명의 빛을 받아 부활하게 하소서 

 

 

†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
  신앙의 기쁨! 젊은이와 함께!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1. 평화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인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주님께서 건네시는 평화는 당신 친히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누리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화해하심으로써 얻은 참된 평화입니다. 우리는 주님 친히 이루신 평화를 받아 누리며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묵시 21,4. 공동번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세상에 나아가 선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세상도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2. 세상의 불안한 평화
   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죽음이 만연하고, 슬픔과 울부짖음, 고통이 끊이질 않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불목하여 상처를 주고받으며, 힘의 논리에 의한 폭력과 불의에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누리는 평화는 억눌린 자들의 침묵으로 유지되는 불안한 평화입니다. 세상은 더 강한 힘으로 약자들을 억압하며 자신들만의 평화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힘으로 유지되는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억압받는 자들의 분노로 가득 찬 침묵의 절규가 담겨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화스러워 보이지만 고통으로 일그러진 슬픈 상처와 아픔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이들의 분노가, 이들의 고통이 함성이 되어 참 평화를 일깨우는 외침으로 울려 퍼질 것입니다.
   
3. 평화를 위한 외침들
   우리는 100년 전 3월, 우리 산하에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을 기억합니다. 힘없고 보잘것없는 이들이 거리로, 들판으로 뛰쳐나와 나라의 독립을, 민족의 해방을, 세상의 평화를 염원하며 두 손 높이 들어 외친 “만세!”의 부르짖음을 기억합니다. 강자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힘없이 온갖 착취와 수모를 견뎌야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참다못해 분연히 떨쳐 일어난 백성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이 갈망한 것은 인간이기에 존중받음으로써 누리는 평화였습니다. 생명이기에 사랑받음으로써 누리는 평화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치켜들고 심장을, 마음을, 목숨을 드러내 보이며 평화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여전히 대립과 갈등, 억압과 착취로 신음하며 아파하고 있습니다. 힘없는 이들의 평화를 갈망하는 외침은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힘없는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온갖 형태의 권력자들을 향해, 인간을 존중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4. 하나 되어 누리는 참 평화
   우리가 누리는 불안한 평화는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의 현실에서 잘 드러납니다.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주변의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주도권을 빼앗긴 채 분단의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한 평화가 이제는 지속 가능한 평화로 바뀌기를 온 백성이 염원하건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애태우는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온 백성이 하나 되어 일어나, 민족의 통일을, 세상의 평화를 염원하는 만세의 외침을 그들에게 들려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남북이 하나 되어 평화를 누리는 것이지, 분열과 대립으로 불안해하며 강자들의 횡포를 감내하는 것이 아님을 온 천하에 외쳐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를 온 세상에 나아가 선포한 제자들처럼, 우리도 활기차고 꿋꿋하게 일어나 용서와 화해의 참 평화를 세상에 외쳐야 합니다.
   
5.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는 언제나 우리의 평화를 위해 하느님께 전구(轉求)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고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묵주기도는 성모님의 전구에 의지하며 드리는 평화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세상의 이기적인 평화를 거부하고, 용서와 화해, 나눔과 희생의 참 평화를 선포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힘을 믿습니다. 지치지 않는 용기로 세상의 참 평화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이 땅에 참 평화가 찾아와 온 겨레가 하나 되어 기쁨 충만한 부활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수원교구의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19년 4월 21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수원교구장 이 용 훈 (마티아) 주교

 

   

[원주교구]

“이 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시편 118, 24)

 

 

+ 찬미예수님,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마리아 막달레나의 화급한 목소리가 들린 지 2000여년이 지났습니다.
여기 저기서 ‘살아계신 주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증언들도 있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그랬고, 갈릴래아 호수의 고기잡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 살아나셨습니다.”(마태 28,7)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6)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장엄한 미사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용약하여라, 하늘나라 천사들 무리....
선포하여라, 위대한 임금의 승리....
기뻐하여라, 어머니인 교회,
부활하신 주님 빛이 가득한 교회.
백성의 드높은 찬양 노래 이 성당에서 울려 퍼진다.”

 

아직 우리 주변에는 ‘죽음의 문화’가 맴돌고 있습니다.
미움과 반목, 불신과 불화가 가득합니다.
자신의 편리함 때문에 생명을 경시합니다.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용약하기 위해서,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아직 더 걸어야할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미움을 이겼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다시 모였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복음으로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이 2000년의 역사를 흘러 우리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장차 이루어질 우리의 부활을 희망합니다.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고린 15,13)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6)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현실에서 겪는 어떤 어려움에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육체에 지니고 다니면서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서 드러나도록 하고 있습니다.”(2고린 4,8-10).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역경에도 하느님 사랑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단죄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고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습니까? 환난이나 역경이 그럴 수 있습니까? 박해가 그럴 수 있습니까? 굶주림과 헐벗음이 그럴 수 있습니까? 혹 위험이나 칼이 그럴 수 있습니까?”(로마 8,34-35).

 

주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희망이며, 힘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요, 완성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큰 기쁨이기를 빕니다. 

 

2019년 4월 부활대축일에
천주교원주교구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의정부교구]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이 교우 여러분들의 가정에, 그리고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어두움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희망과 생명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를 외쳤던 군중들은 예수님이 정치적이거나 군사적인 승리를 가져오시는 분이기를 바랐고, 그분이 가르치시는 하늘 나라가 지금 이 땅에서 성공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나라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작은 겨자씨에 비유하며 겨자씨가 자라게 되면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게 된다는 하늘 나라 이야기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슬피 우는 사람의 행복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위대한 사랑이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생명을 가져오는 위대한 신비인 예수님의 부활은 더더욱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둡고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 새로움과 생명을 가져다주는 축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합시다.

 

부활로 우리 신앙을 견고케 합시다.
부활은 우리 믿음의 근거이며 우리 믿음을 견고케 해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죽은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3-14)

 

주일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절정은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과 믿음은 죽음도, 어떤 두려움도 이기게 해줍니다. 순교자들을 그 무서운 형벌과 모진 박해 가운데서도 버틸 수 있게 해 준 힘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었습니다. 로마 근교에 있는 순교자들의 무덤인 카타콤바의 벽화나 글 가운데 여기저기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표현하는 것들이 있었다고 기억됩니다.

 

교회의 복음 선포의 핵심과 본질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신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믿고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납니다.” (『복음의 기쁨』, 1항)

 

또한 신앙의 핵심인 부활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새로움과 넘치는 힘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이사 40,31)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젊으시고, 새로움의 끝없는 원천이십니다.” (『복음의 기쁨』, 11항)

 

부활의 선물인 평화와 용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건네주신 부활의 선물은 평화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제자들은 극에 달하는 두려움과 초조, 좌절과 공포에 사로잡혀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희망과 생의 의미와 보람이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모두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문을 닫아걸고 극도의 불안 가운데 있던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말과 더불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제자들을 좌절과 절망에서 벗어나 평화로 가득하게 해주었습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 사건의 체험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동안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라는 이유로 말미암아 사람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수모와 업신여김, 배척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른 무엇보다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라는 말씀과 함께 용서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평화와 용서는 뗄 수 없는 관계이며, 평화를 얻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용서입니다. 평화를 얻은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 용서였듯이, 평화를 바라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 또한 용서 청하고 또 용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요즘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왜 하느님께서는 아직도 우리에게 평화의 선물을 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한반도의 평화는 우리들의 마음의 평화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마음속에 분열과 배척과 차별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사회에 평화는 찾아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에 초점을 맞추어 보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용서와 관련해서 볼 때, 부족한 점이 참 많은 듯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수많은 차별과 혐오들에 대해서 용서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생각과 사상이 다르다 하여 큰 소리로 적대하고 배척하는 사회, 인종차별과 혐오로 말미암아 난민들과 이주민들이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회, 장애인들이나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아쉬운 사회, 노인들이나 어린이들이 우선시되지 못하는 사회, 그런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용서의 선물로 우리 사회를 보다 밝고 따뜻하게 만드는 일에 우리가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을 모두에게 전합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2019년 부활 대축일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대구대교구]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루카 24,5)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24)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교구민 여러분과 함께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를 나눕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으셨지만 마침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는 누구나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부활 사건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인간에게 운명처럼 뿌리내린 죄와 죽음의 세력은 꺾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큰 사건의 최초 목격자는 예수님께서 직접 뽑아 세우신 사도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의 탄생을 목격한 이들도 종교 지도자들이나 권력자들이 아닌,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당시 보잘것없고 업신여김 당하는 작은이들이었습니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항상 가난하고 멸시당하는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심지어 당신 스스로를 낮추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며 겸손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여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성서 저자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들도 처음에는 무덤이 비어 있고 주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천사가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알려 주자, 생전에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 놀라움과 기쁨에 차서 사도들에게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다만 베드로 사도가 무덤으로 달려가 직접 빈 무덤을 보았다고 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누구도 믿지 못했고, 믿기에도 어려운 사건이었지만, 훗날 성령의 이끄심으로 사도들과 사람들의 마음이 열려 주님 부활의 신비를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신비의 참 의미를 깨닫고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은 삶 안에서 예수님의 모범을 배우고,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이 어떤 모습이여야 하겠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사순 시기 담화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파스카를 향한 여정에서, 우리는 참회와 회개와 용서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얼굴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참회와 회개의 시기인 사순 시기를 보낸 우리는 파스카 축제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부활했습니다. 부활한 우리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란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최고 행위는 “용서와 화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잘못한 형제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18,22 참조)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용서받았으니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화해하는 사랑의 행위가 바로 하느님을 닮아 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올해 사목교서를 통해 한 해를 “용서와 화해의 해”로 살아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조건 없이 하느님께 용서를 받은 신앙인은 다른 이가 자신에게 지은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들의 죄를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며 기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참회와 회개의 사순 시기를 거쳐 예수님의 부활을 맞았습니다. 부활의 삶은 일상에서 거듭 새롭게 태어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용서와 화해를 통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자아도취를 뒤로하고 예수님의 파스카를 향해 돌아섭시다.”(교황 프란치스코, 「사순 시기 담화문」) 죄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해방시키고 새 삶을 주셨습니다. 이제 새 삶을 얻은 우리가 이웃과 모든 피조물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해방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여러분의 매일 매순간이 부활의 삶이 되기를 희망하며 기도드립니다.

 

2019년 4월 21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 환 길(타대오) 대주교

 

 

  

[부산교구]

날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주님 부활의 은총

 

 

 

“저는 다시 살아나 여전히 당신 안에 있나이다. 알렐루야!”(시편 139)


주님의 부활이 우리 곁으로 다가 왔습니다. 형제자매님들께 축하인사를 드리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가 가득 내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019년 한 해를 ‘희망의 해’로 지내고 계시는 형제자매님들께 이번 부활 대축일은 더 큰 의미를 안고 다가왔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은총으로 우리도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가운데에서 생명’을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고 체험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부활의 은총입니다.

 

저는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다가 가끔씩 교구청 뒷산으로 산책을 가곤 합니다. 지난 3월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 뒷산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마침 그 전날 비가 내려 땅도 촉촉하고 한층 포근한 느낌이 들었고 날씨도 많이 풀려 그리 춥지 않았습니다. 반시간쯤 올라가면 나무의자가 하나 있는데, 그날 그 나무의자에 앉아 주변 나무들을 자세히 바라보니 나뭇가지에는 움이 트고 있었고 철쭉나무에는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했음을 발견했습니다. “어느새 봄이 오는구나. 아직도 추운 겨울인 줄 알았더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봄이 오고 있었고 그런 기운들을 이 나무들이 먼저 감지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빗방울이 적셔주고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면 죽은 것 같았던 나무들이 움을 틔우고 꽃망울이 맺는 것을 보면서 주님의 놀라운 섭리에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느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연의 그 변화 안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자리를 옮긴 부활을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하고 모든 것이다 죽은 것 같았던 날을 보내던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만난 것이 바로 부활체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의미와 가치가 송두리째 달라짐을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죽음과 죄가 삶의 굴레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부활하신 스승 예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락방에서 두려움에 떨고 움츠리며 살았던 그 삶에서 벗어나 이제 당당하게 두려움의 다락방에서 뛰쳐나와 주님의 부활을 선포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부활의 삶이 큰 희망으로 그들에게 도래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그때 제자들의 다락방의 삶과 같이, 춥고 어두운 겨울 한 가운데 있는 것 같아도 하느님의 사랑의 빗방울이 내리고 은총의 햇살이 우리들을 비추면 우리도 새롭게 봄을 맞아 일어나 ‘희망의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주위에서 수없이 많은 부활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날마다 이것을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은 부활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죽음은 멎고/슬픔은 쉬고/생명은 영글어 무성합니다./이것이 당신의 뜻입니다.”(김남조, “부활의 새벽”)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과 은총에 참여한 우리들이기에 항상 기쁨과 희망을 안고 살아 갑시다. 우리 주위에서 여러 이유로 어려움을 겪고 힘든 삶을 사시는 분들이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에 넘친 부활의 삶을 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천주교 부산교구장 손삼석 요셉 주교

 


  

[청주교구]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콜로 3, 1)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신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신자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인류의 가장 큰 수수께끼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죽은 후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인류는 이 물음에 명쾌한 답을 찾기 위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오랜 세월 동안 부단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이 수수께끼를 명확히 풀어주신 분은 오직 하느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인간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 실물교훈으로 그 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사람들에게 발현하심으로써 온몸으로 그 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 사업을 마치시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시기 전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시어(1코린 15, 5 이하) 손수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고(루카 24, 30; 요한 21, 13) 먹기도 하시면서(루카 24, 43) 당신이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죽은 후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시작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이 죽은 후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인류의 가장 큰 수수께끼에 대한 하느님께서 주신 분명한 답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확증이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미래에 있을 우리 부활의 전표입니다. 2000여 년간 믿고 고백해 온 우리 신앙의 절정은 예수님의 부활에 기반을 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기쁜 소식은 언제나 우리 신앙의 굳건한 토대이며 희망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 가톨릭교회는 부활의 종교요,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인간에게 참 희망을 주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안타깝게도 우리 신자들에게서 믿음의 핵심인 부활 신앙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또한 믿음의 목적인 영원한 삶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점점 식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물질 만능주의와 홍수처럼 밀려온 성 자유화의 물결에 휩쓸려 믿음의 목적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습니다. 최근 연일 보도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동안 물질적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우리의 모습이요, 쾌락에 탐닉하였던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저 위에 있는 것, 천상 것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콜로 3,1 참조). 또한 우리는 사도 바오로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람과 목표를 분명히 가지고 인생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고백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 나는 이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필립 3, 10 이하 공동번역 참조).

 

4.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한없이 넓고 깊은지가 밝히 드러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 10). 예수님의 사명이 지닌 궁극 목표는 이 세상에 오시어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신 것입니다”(에페 2,4-5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처럼 극진히 사랑한 사람을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낙태죄 전면 금지는 위헌이라는 판결입니다. 이 판결은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 유지 여부의 결정 권리가 있으며, 태아가 세상에 나왔을 때 독자 생존이 가능한 22주까지 낙태를 허용한다는 판결입니다. 사실상 낙태죄는 죄가 아니라는 판결인 동시에 사실상 낙태 자유를 허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무죄한 태아들이 의료인의 손에 무참히 죽어갈 것입니다. 수많은 태아의 생명이 파괴될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사랑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악행입니다. 태아는 엄연한 인간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은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살인해서는 안된다’는 인간 사회의 불문율은 사회 구성원이 절대로 넘어서는 안되는 최후의 경계선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어떤 권위도 그 어떤 것도 합법적으로 결코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권장하거나 허용할 수 없다”(생명의 복음, 57항 참조)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사도 5, 29참조). 우리는 세상의 권위보다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백성이며, 생명을 위한 백성인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에 희망을 두고 생명문화 건설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이 땅에 신자 여러분의 가정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생명의 성역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신자 여러분 가정과 지역 사회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2019년 4월 21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청주교구장 장 봉 훈 가브리엘 주교

   

[마산교구]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알렐루야! 

 

사랑하올 교형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기원하며 기쁨의 인사를 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예수님 당시의 인사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처럼 우물(오아시스)을 두고 다툼이 많았던 근동의 유목 민족에게는 싸움 없는 ‘평화’(샬롬 shalom)가 인사말이었습니다. 안개가 자욱했던 영국 해안에서는 ‘좋은 아침’(good morning)이 자연스러운 인사가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외세의 침략과 6•25를 전후하여 좌•우익의 싸움이 치열했던 탓으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는 말이 인사말로 자리 잡게 된 것 같습니다.
‘평화’, ‘좋은 아침’, ‘안녕’이라는 각기 다른 나라의 인사말이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남북 간의 평화, 미세먼지, 그리고 북핵문제와 함께 쫙 갈라진 진영논리에 갇혀 안녕치 못한 나날들이 우리를 뒤흔들고 불편하게 합니다.
일제강점기, 정부 수립, 그리고 6∙25동란을 겪으면서 우리 안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줄 알았던 이 이념 논쟁과 그에 따르는 조금은 낯선 역사이해(歷史理解)가 다시금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표면상 고요한 것 같지만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이 문제로 인해 적잖은 어려움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평화로 향하는 길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유(自由 liberté)를 더 소중히 생각하고, 또 누구는 ‘평등’(平等 égalité)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인간에게서 반드시 구현되어야 할 참된 가치이념인 이 말마디들은 프랑스혁명(1789)에 이르러 박애(博愛 fraternité)와 함께 크고 굵은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세기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나누고 패권 다툼을 할 때, 자유가 마치 자유민주주의의 전유물인 양, 평등이 마치 공산주의의 마지막 말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긍정하듯이, “자유 없는 평등은 거짓이고, 평등 없는 자유는 위선입니다.”(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라는 가치는 그 어느 것이든 한없이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고, 나아가 인간이 인간인 한 각자 자기 위치에서 이를 실현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이런 것들이 결코 우리 힘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유, 평등, 평화는 결코 우리 인간의 투쟁만으로 쟁취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용서,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자들의 용서와 화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추구함에 있어서 이 신앙의 진리를 깊이 인식하고 이 신앙의 토대 위에서 그 숭고한 가치들을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유, 평등, 평화에 이르는 길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오직 십자가의 어리석음(1코린 1,18-25 참조)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정책도, 그 어떤 정부도, 그 어떤 국가도 그 길에 있어 하나의 방책을 제시할 수 있을 뿐 그 자체의 힘만으로는 이 가치들을 완전하게 구현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모여 ‘한없이 더’, ‘끝없이 더’ 추구한다고 해도 결코 완전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하는 모습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만 그런 가치들을 더 완전하게 추구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더 큰 ‘악’(惡)을 불러올 소지가 큽니다. 왜냐하면 악의 발생이야말로 유한한 인간이 절대적인 것을 ‘한없이 더’ 추구하다가 걸려 넘어지게 되는 현상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베른하르트 벨테 「악의 문제」)
사랑하는 우리 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고 친애하는 신부님들과 늘 고마운 수도자가족 여러분,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의 백성들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한 나라의 국민인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 있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여기서 ‘넘어서 있다’는 말은 윤리•도덕적으로 혹은 가치•이념적으로 상위에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넘어서 있다’는 말의 뜻은 오히려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또 한 사람의 예수가 되어 이웃의 잘못을 뒤집어쓰면서도 내 이웃을 용서하고 또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의 인간으로 서 있다는 말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 인사로 말미암아 떨고 있던 제자들의 두려운 마음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靈 Spiritus)이 주는 참 평화가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의 터전을 마련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참평화 때문에 자유도 평등도 그 추구하는 바의 목표에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제자들처럼 부활의 평화가 주는 기쁨 때문에 용서하고 또 용서할 수 있는 마음들이 됩시다. 그리하면 우리나라 대한민국,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가 그리 멀지만은 않으리라 믿습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을 한 가슴 안고 용기 있게 강복 드립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알렐루야!” 

 

2019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안동교구]

“기쁘고 떳떳하게” 살겠습니다!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우리 안동교구 사명선언문의 내용입니다. 제목은 “기쁘고 떳떳하게”로 되어 있습니다. 안동 교구 교구민으로서 자기 삶의 현장에서 “기쁘고 떳떳하게”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기쁘고 떳떳하게” 사는 것인지 그 삶의 방법이 사명선언문의 내용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삶의 방법이 네 마디의 간결한 말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열린 마음으로”, 두 번째는 “소박하게 살고”, 세 번째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 “기쁘고 떳떳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사명선언문의 마지막 문장인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는 표현 안에는 결국 <“기쁘고 떳떳하게” 살겠다.>는 자기 삶의 다짐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기쁘게 떳떳하게” 사는 삶이란 결국 교구사명선언문의 정신을 그대로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교구 사명선언문의 정신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 것인지 오늘은 특별히 ‘주님 부활의 빛으로’ 그 의미를 마음에 새겨보는 시간을 함께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할 구체적인 환경과 상황을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사명선언문의 전체적인 틀이 “우리는 이 터에서 …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터”를 오늘의 ‘갈릴래아’로 생각하며 살 것입니다. “이 터”를 우리 각자가 일상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몸 붙여 살고 있는 교구, 본당, 공소, 일하는 직장, 가정, 우리 자신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터에서”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그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터”를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는 구체적인 파스카 현장으로 생각하며 바로 여기서 “기쁘고 떳떳하게” 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자신만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느님과 남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는 삶을 살겠습니다. “눈이 열려”(루카 24,31)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열린 시각’으로 세상 사람들을 만나고, ‘열린 신앙’으로 그들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어진 십자가를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일상 안에서 파스카의 신비를 재현하며 살겠습니다. 자기 틀 안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자기 담을 허물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겠습니다.
“우리는 이 터에서 … 소박하게” 살겠습니다. 사치스럽게 살지 않고 검소하게 살겠습니다. 위선이나 교만을 버리고 겸허하게 살겠습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며 가난과 불편을 감수면서 이웃과 함께 더불어 기쁘게 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삶의 처지를 다른 사람의 처지와 비교하지 않고 확고한 소신으로 떳떳하게 살겠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 되겠습니다. 가난한 형제들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겠습니다.

“우리는 이 터에서 …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살겠습니다. 죽음보다 생명을 선택하며 살겠습니다. 약한 생명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며 살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서 함께 하겠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일에 헌신하는 농민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자연과 환경을 지키고 보존하는 창조질서보존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써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도 함께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몸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먼저 생명을 살리는 모든 일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고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이 터에서 …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더불어 사는 기쁨을 함께 누리며 살겠습니다. 특별히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시며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선포하며 살겠습니다. 예수님처럼 나누고 섬기는 ‘성찬의 삶’을 일상에서 살겠습니다. 그리하여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세상에 전하며 살겠습니다.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부활의 기쁨과 축복을 선포하고 나누는 일꾼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다릅니다. 좋은 의복을 입거나 비싼 자동차를 타는 즐거움, 맛있는 것을 찾아 먹는 즐거움, 멋진 집에서 안락생활을 누리는 즐거움과는 다른 기쁨입니다. 이 세상의 재산과 명예와 권력이 가져다주는 일시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부활의 기쁨’입니다. 앞에서 교구사명선언문의 내용 설명을 통해서 함께 확인한 바와 같이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나누고 섬김으로써> 일상에서 얻는 “기쁨”이 바로 ‘부활의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부활의 기쁨’을 일상에서 누리면서 산다면 그것이 바로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앞에서 “기쁘고 떳떳하게”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주님,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구며’, “기쁘고 떳떳하게” 살겠습니다!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광주대교구]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에제 18,31)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우리와 세상 모든 것을 살리셨으니, 이는 우리의 마음과 영을 새롭게 비추는 빛이 되고, 온 인류의 심장에 새로운 생명의 숨을 불어넣는 축제가 될 것입니다. 알렐루야!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고통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십자가의 헌신과 사랑의 절정입니다. 이 부활은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매일매일 직면하는 고통과 불안, 죄와 어두움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흔들림 없이 신뢰하는 믿음의 뿌리입니다. 이 부활은 세상에 악의 힘과 세력도, 심지어 죽음마저도 굴복시킬 수 없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또한 이 부활은 자본과 권력의 막강한 영향력과 횡포는 물론이고 폭력의 악순환조차도 무력화시키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영원한 사랑의 징표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은 나 혼자만이라고 여기는 황량하고 고립된 사막 한 가운데서도,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하는 한결같은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마태 28,20 참조).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을 불어넣어줍니다. 이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은 일찍이 에제키엘 예언자가 시대의 파국에 직면하여 절박하게 증언하고 선포했던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을 학대하지 않고 빚 담보로 받은 것을 돌려주며, 강도짓을 하지 않고 굶주린 이에게 빵을 주며,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주고, 변리를 받으려고 돈을 내놓지 않으며, 이자를 받지 않고 불의에서 손을 떼며,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한 판결을 내리면서,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에제 18,7-9)


  에제키엘 예언자의 선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바오로 사도의 증언 속에서 되살아납니다. “그리스도께서 ...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6,4-6: 파스카 성야 서간)
  프란치스코 교황 또한 부활 신앙에 대한 증언을 통해서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을 강조하십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자아도취를 뒤로하고 예수님의 파스카를 향해 돌아섭시다. 어려운 우리 형제자매들의 이웃이 되어 우리의 영적 물적 재화를 그들과 함께 나눕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의 삶 안에 실제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모든 피조물에게도 그리스도의 승리가 가져다 준 변모의 힘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2019년 사순 시기 담화 중에서)


부활 신앙과 우리 시대의 새 마음, 새 영
  부활 신앙은 우리가 이를 오늘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 새로운 가치, 새로운 삶의 기준으로 증언할 때, 비로소 세상 사람들이 신뢰할 만한 가치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특히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임을 기억합시다.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강탈된 조국의 현실을 고통스럽게 감내하면서도 무자비한 폭력에 저항하고 자주 독립과 평등, 인간존엄성과 세계 평화를 위해 의분을 표함으로써,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감춰져 있거나 아직 밝혀내지 못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 규명 또한 시대적 과제요 요청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제주 4.3, 여순사건, 광주 5.18 민주화 운동 그리고 최근의 세월호 침몰과 같은 사건들은 우리가 진실 규명에 나서지 않을 때, 오히려 진실을 왜곡하는 안타까운 일들을 끊임없이 겪게 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아울러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을 지닌 부활 신앙은 오늘날 복음을 바탕으로 낡은 가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며 새로운 기준을 찾음으로써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환대(루카 4,18-19 참조),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마태 25,31-46참조), 배타적 경쟁과 차별이 아니라 협동과 공생의 공동체성 회복, 고립된 삶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기,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 돌보기, 남북의 평화 공동체 건설을 위한 노력, 사람을 살리는 복음의 합리성을 구현하는 사목실천(마르 3,1-6 참조), 소통과 존중의 문화 이루기 등이 그 실천의 예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사도 10,39) 예수님께서 동시대의 역사 속에서 죽음과 부활로써 사랑을 완성하신 것처럼, 친애하는 교구민 모든 분들 또한 우리 시대에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기원하며, 예수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2019년 4월 21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전주교구]

“갈릴래아로 가라.”(마태 28,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내리시기를 빕니다.

 

먼저, 주님의 부활 소식을 처음 전해주는 복음의 장면을 살펴봅시다. 부활 복음은 몇몇 여자가 무덤을 향해 길을 떠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죽으신 예수님께서 차가운 시신으로 무덤에 묻혀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확신으로 무덤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덤 입구를 단단히 막아놓았던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5-6) 여자들은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볼 줄 알았는데, 천사를 만나 전혀 뜻밖의 소식을 전해들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부활 소식은 여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천사의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이제 방향을 바꾸어,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났습니다. 그들의 삶의 방향이 무덤에서 생명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바뀐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여자들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삶도 바꾸어놓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내 형제[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이 말씀에 우리는 깊이 주 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상당히 중요해서 마태오가 천사의 입을 통해서도 미리 알려주기 때문입니다(마태 28,7 참조).

 

그런데 왜 하필이면 ‘갈릴래아’로 가라고 분부하셨을까요? 갈릴래아는 어떤 곳인가요?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주요 무대입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시며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따라오너라.”(마르 1,17) 하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스런 눈빛을 생생하게 느끼며 감동에 벅차 곧바로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하고 힘차게 증언했습니다. 갈릴래아는 제자들이 스승 예수님과 처음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곳, 그분의 크신 사랑에 감개무량하며 부르심에 응답한 곳입니다.

 

하지만 어느새 시간이 흘러 그 첫 만남은 오래된 과거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만남은 생기를 잃고 퇴색해졌습니다. 아니 어쩌다가 한 번씩 가물가물 기억될 뿐이었습니다.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묵시 2,4) 입니다. 따라서 “갈릴래아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은 첫 만남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주님과 처음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사랑과 순종의 자리 곧 신앙의 요람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과연 제자들은 ‘첫 마음’을 상징하는 갈릴래아로 돌아갔고, 거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라는 주님의 분부에 따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심오한 사랑은 오늘날까지 계속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삶을 온통 바꾸고, 또 제자들을 통해서 우리 인간 역사의 방향을 사랑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도 첫 마음의 갈릴래아로 돌아가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세례성사 때 주님의 크신 은총으로 모든 죄를 씻고 새로 태어남을 기뻐하던 그 첫 마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혼인성사 때 일생동안 신의를 지키며 배우자를 존경하고 사랑하겠다고 다짐한 그 첫 마 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품성사 때 주님의 부르심에 감사하며 주님께 대한 오롯한 마음과 함께 오로지 교회와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약속한 그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첫 만남이 이뤄졌던 당시 우리는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희망이 컸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상황이 녹록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힘겹게 하는 일들이 있었고,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이 우세했던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참조),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물리쳤고 희망했던 것입니다. “불가능이 없으신”(루카 1,37 참조) 주님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절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에 대해 체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신감을 잃고서 ‘나는 안 돼!’ 혹은 ‘우리는 안 돼!’ 하고 자포자기합니다. 이처럼 패배주의에 빠져있는 우리에게(복음의 기쁨 85항 참조) 부활은 그런 절망과 체념으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으며, 정말 희망할 수 있다고, 아니 희망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이기리라는 희망을 품고 첫 마음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분부대로 첫 마음의 갈릴래아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을 쇄신할 수 있고, 교회와 사회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돈과 권력과 명예 등의 우상들에 희망을 걸지 말아야 합니다. 실로 우리는 거기에 오랫동안 희망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온갖 부귀영화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 약속은 주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만나 뵙기 위해 첫 마음으로 돌아갑시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성모님께서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2019년 부활절에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 

 

 

  

[제주교구]

대결과 정복에서 일치와 화해로!

 

  

주님의 부활 대축제를 맞이하여 모든 형제들에게 주님 생명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통해 불안과 두려움, 고통과 슬픔의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예수님의 크신 기쁨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 제주의 교회는 출범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신축교안의 후유증과 사제부족으로 큰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제주와 홍로(서귀포), 두 곳 밖에 없던 본당이 상주 사제가 없는 공소로 바뀌었습니다. 1909년에 개교한 신성여학교도 일제의 탄압으로 1916년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일합병 이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일본으로 노동이민의 길을 떠나니 제주도 전체가 피폐하였습니다. 제주만이 아니라 이 땅의 많은 백성이 일제의 수탈로 땅과 가산을 잃고 고향을 등져 만주로, 연해주로, 하와이로, 미주로 이주의 길을 떠났습니다. 먼 타국에서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독립군에 투신하며 일제와 싸우다가 고향을 꿈에 그리며 숨져갔고, 어떤 이들은 이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털며 적빈의 삶을 견디어냈습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갑자기 찾아온 해방은 이 땅을 동서 양 진영의 냉전체제 하에 깊은 분단의 수렁으로 빠트렸습니다. 지리적인 분단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의 영혼에 건너기 어려운 깊은 분단이 만들어지고 서로를 적대하고 대립하는 골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신 분임으로 우리가 분단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70년의 한 맺힌 골병이 낫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이 땅의 백성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과 평등의 숭고한 가치를 깨닫고 연대하기 시작한 3.1 운동 100주년에 이르러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강대국들이 설치한 냉전의 덫을 깨고 일어나 진정한 인간 해방과 민족 일치의 새벽을 밝히라고 초대하십니다.

 

이 해방과 일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지난 100년 동안 이미 수많은 우리 선열들이 기꺼이 젊음을 바치고 생애를 바치고 목숨을 바쳐서 2019년의 오늘이 만들어졌습니다. 100년 전 불과 180여명 밖에 없었던 제주의 신자가 지금 7만 명이 훨씬 넘고 사제가 한 명도 없던 곳에 50명이 넘었습니다. 초가삼간으로 유지하던 두 공소가 지금 아름다운 본당 스물여덟과 공소 아홉의 거목으로 자랐습니다. 주님의 자비와 은총은 헤아릴 길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단 앞에서 기도 드릴 때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와 특전이 실현되기까지 수많은 분들의 희생과 고통이 거름이 되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신축교안에 희생된 신자들,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독립유공자들, 4.3의 참극에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도민들, 6.25 전쟁에 쓰러져간 헤아릴 수 없는 희생자들, 군사독재에 저항하다 고문당하고 숨져간 많은 의인들, 이런 이들의 거룩한 희생과 봉헌이 하늘 높이 오른 덕분으로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축제를 큰 기쁨과 자유와 평화 속에 지낼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고통과 희생으로 마련된 주님의 제단에서 우리는 선열들의 제물봉헌에 우리의 봉헌을 합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의 대결과 정복과 제압의 논리를 벗어던지고 주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의 제물을 들어 올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소진시켜 온 냉전과 분단의 골병에서 치유되는 길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남과 북의 대결, 보수와 진보의 대결, 자본과 노동의 대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결, 남성과 여성의 대결을 뛰어넘어 한 분이신 하느님 자녀로서의 일치와 화해의 열매를 주님의 제단에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과 사랑이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2019년 부활대축일에
천주교 제주 교구 감목
강 우 일

 

 

  

[군종교구]

무덤에 갇히셨던 우리 임금님, 군사가 엄중하게 지키었건만,

장엄한 광채 속에 개선하시어, 죽음의 승리자로 부활하셨네 

 

 

I

친애하는 군종교구 교구민 여러분, 이 부활찬미가가 말해주듯이,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우리 신앙의 중심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기쁨과 감격 속에 경축하고 있습니다. 사흘 전 자신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공경했던 스승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사형당하시던 모습을 목격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은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을 용감하게 찾아갔습니다. 땅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드림으로써 사랑과 공경심의 마지막 표현을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신이 있어야 할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는 되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놀라운 일이라서, 이 여인들은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당신이 지극히 사랑하셨던 제자들을 찾아가시어 발현하셨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처럼 당신께 대한 신앙이 꺼져가고, 공동체의 삶도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 처했던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알리심으로써, 그들의 신앙에 다시 불을 붙이시고 무너져가는 제자들의 공동체도 다시 일으키시어, 세상에 나아가 변함없이 그리고 열성적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열망이 얼마나 컸던지 제자들 가운데 오시어 가운데에 서신 채, 당신이 평소에 늘 사용하신 인사말 “평화가 너희와 함께”를 큰 소리로 연속하여 언급하시고, 처음 발현 때 함께 있지 않았던 제자 토마스의 의심을 해소시키기 위해 두 번째로 나타나셨을 때에는 당신의 현존과 말씀만으로도 충분할 터인데,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라고 좀 어색한 요청까지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요구에 의심 많은 토마스는 외치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주님의 부활 대축일을 경축하는 우리 각자가 마음속에서 크게 외쳐야 할 신앙고백이 바로 사도 토마스가 고백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입니다. 사실 사도 토마스의 이 고백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과 영성의 요약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사도의 이 고백은 “주님, 당신은 저의 주인이시고 저의 중심이시며 저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함께 오늘만이 아니고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니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신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토마스의 이 고백을 들으신 후 토마스에게 하신 다음 말씀은, 주님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지금의 우리가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데에 참으로 큰 도움이 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의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우리처럼 주님 승천 후에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고 당시에 살던 이들 가운데서도 주님을 눈으로 보지 못한 이들이 많이 있었을 터인데, 이들이 당신을 보지 않고도 믿을 때 그것은 큰 축복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II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무엇보다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참으로 사람이시고 참으로 구원자이심을 증명해준 사건이며, 이는 동시에 우리 역시 죄를 통회하고 그분을 믿어 옛날의 육적인 내가 죽고 영적인 나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심오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 주님께서 언젠가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밤에 당신을 찾아온 의회 의원 니코데모에게 하신 다음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5-7)

 

이 때문에, 우리 교회는 예로부터 부활 대축일을 맞을 때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곧 “위로부터 태어나는” 의미를 지닌 세례성사 예식을 베풀어오고 있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이 세례가 지닌 심오한 의미를 이렇게 요약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그러므로 부활 대축일을 맞으면서, 이미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내가 과연 새로운 탄생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지를 깊이 성찰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탄생, 새로운 삶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달으면서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게 해줍니다. 내가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당연히 그에게 사랑으로 응답하게 되듯이, 하느님의 사랑에 나는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사막의 성 안토니오 아빠스는 말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선호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훗날 성 베네딕토의 회칙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려는 자세가 회개 생활의 가장 뚜렷한 표현이 된다는 점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듯,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분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때 자연히 세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도 성 요한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세상이 그분을 통해 살게 해주시며, 하느님의 사랑이 외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데에서 드러났다고 말씀하시면서(참조: 1요한 4,9-10),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사도 성 요한께서는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형제적 사랑 실천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 나에게 상처나 해를 크게 끼쳐 미워지고 복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상태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고 아픔을 주는 이들이나 증오의 정도가 심해져 원수처럼 여겨지는 이들을 미워하고 저주하며 복수까지 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거듭거듭 되새기면서, 원수같이 여겨지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지는 못한다 해도 그에게 해를 주거나 복수하려 하지 말고, 그가 어려움에 처할 때는 도와주는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복수하고 싶은 이에 대한 심판을 주님께 맡기도록 합시다. 우리는 악을 선(善)으로써 극복해야 합니다. 원수 사랑의 노력이 상대방의 거부나 나 자신의 역부족으로 벽에 부딪힌다 해도 거듭거듭 시도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내 편에서 위선이 아닌 진정성으로, 오만이 아닌 겸손에서, 일시적으로가 아닌 지속적으로 이 노력을 하도록 합시다. 물론 나의 한계성을 인정하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청하면서입니다. 우리의 이 노력에 대해 하느님께서 한없는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 노력 때문에 내 모습이 비참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를 버리고 비우는 순수한 상태인 것입니다. 사랑 실천에서 가장 힘든 원수 사랑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실천하도록 합시다. 특히 구약 성조 요셉이 신앙을 통해 발견한 하느님 사랑의 섭리 신비를 깨달으면서 원수 사랑의 길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III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함께 죽음을 이기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면서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도록 합시다. 주님의 부활이 가져온 또 하나의 부활인 나의 새 생명, 새로운 삶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더욱더 깊게 하도록 합시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2019년 주님 부활 대축일
천주교 군종교구장 유 수 일 F.하비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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