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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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냉담을 풀고 교회로 가고 싶은데 성사를 보기가 힘든 시스템이라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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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121.162.110.*]

2021-08-27 ㅣ No.12532

큰 죄로 성사를 보려는데 신부님이나 수녀님, 사무장님께 따로 말씀을 드려야 한다고 하네요
몇 번이고 고해소 앞으로 갔지만 신부님은 들어오시지 않아서 사무실에 전화로 물어보니 따로 신청을 해야 한다는데 왜 그럴까요?

신부님이 미사 전에 고해소에 들어가 계시던 시스템은 없어졌나요? 왜 예전처럼 성사를 주지 않을까요?
어렵게 신청했더니 신부님이 고해소 안이 아니라 앞에서 대기하시길래 얼굴을 마주쳐야 되니 결국 실패했습니다
왜 예전처럼 고해하기 힘들어하는 신자에 대한 배려가 사라졌을까요? 성사조차 보기가 이렇게 힘든 죄인인데 문턱조차 너무 높네요

거기다 몇 번이나 미사를 가보았지만 요즘 아무도 성사를 보지 않네요. 신부님이 들어가 계시면 자연스레 들어갈 수 있을텐데 참 별거 아닌거 같은 이 상황에 힘드네요. 이번은 보더라도 앞으로 자주 성사를 보기가 힘든 시스템입니다 교구청에 문의해야 할까요? 여기에 남겨도 해결이 안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요즘은 COVIDE-19 대응으로 비대면 미사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형제님은 중요한 '나-전달법'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씀해 주셨는데 이는 생활속의 준성사로 회두하는 매우 중요한 대화법이 될 것입니다.

비대면 시기에 발 맞추어 가톨릭 교회의 "내탓이오" 운동 또한 수면 아래로 역시 비대면으로 진행중일 것입니다. 혹자는 실패한 운동이라 하고 내탓이오 스티커를 붙인 앞 차를 비판하며 교통법규 위반을 밥 멋듯 한다는 운전자의 저 사람들 어느 단체 사람이냐 묻는 질문에 조수석 어느 신부님은 부끄러워 아마도 불교 단체일 것입니다.라며 폭소를 자아낸 홍성남 마태오 신부님 추억 역시 흘러갑니다.

신부님은 두 번째 봉사의 성사 성품성사로서 지상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러한 우리들에게 조수석에서 중재자 역할로 성사를 봉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바라는 열망의 공감 대화를 위하여 대화의 반대말을 찾지 못하는 나를 돌아봅니다. 형제님 말씀대로 침묵이 대화의 반대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만 너와 나의 대화를 저마다 사정상 잇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형제님이 치유의 성사인 고해성사 문 앞에서 그 애환들을 풀어주어 가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치유의 성사 병자성사를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대상자의 눈을 마주하며 공감의 대화를 원하신다면 노인요양표준교재를 크게 권고합니다. 더 나아가 가톨릭 신자들에게 최상의 대화인 성사 생활 호흡을 위하여 그 문을 두드리는 형제님에게 축복의 빛이 이어질 것입니다.

공감은 너와 나의 생각이 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사생활은 또한 지상에서의 너와 내가 "동감"으로 느낌이 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공감과 동감 하나되는 것을 맛보는 것, 천국의 영원한 생명을 향유하는 것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기쁨과 여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너와 나의 느낌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너에게 모두를 맞추는 동의 여정을 향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을 향유하는 것입니다. 한국이기 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동적인 침묵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국 교구를 대표하는 서울대교구는 다시 코로나에 대응하기 위하여 일사불란하게 비대면 미사를 권고하였고 이에 전국적으로 그것을 한마음 한 몸 운동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는 나는 작아지고 그분은 커질 것이기를 희망으로 고백한 광야의 소리 그분을 풀어주어 가게 하는 화살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는 형제님의 애타는 고해성사로 영혼의 아픔들을 치유받고 싶은 마음 위해 기도하는 모든 성직자들과 그 통공들의 바램과 더불어 죽음 없는 불가에서 지칭하는 열반 즉 윤회를 끊는 염원과도 상통 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유무상통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죽음의 침묵마저 끊는 비대면 시대인 것입니다. 형제님의 갈망이 또한 사제들의 기도가 모여 어둠은 반드시 사라질 것입니다.

성찰-참회-정개-고해-보속은 홀로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 그리움을 외로움의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 번째 치유성사를 두 번째 치유 대상자와 함께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스로 성사생활을 위한 준성사 생활을 돌아보는 기회 주시는 내면의 주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스스로에게 고마워 하시고 덕택과 송구함과 사랑으로 성장한 자신을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보다 범위를 넓게 바라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 은사로 대죄는 알고 짓는 죄, 소죄는 모르고 짓는 죄라시며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중요한건 대죄 소죄 또한 내가 아닌 그분과 공감이면 더욱 좋습니다. 그렇게 나-전달법은 공감 전달법으로 교대를 병행할 것입니다. 차범근 감독 이후 손흥민 선수가 시대의 계보를 잇는 것도 신앙이라는 작은 신비와 노력이라는 존재의 조화 때문일 것입니다.

드넓은 상형문자의 중국을 지나 역시 아시아 최고 수비수 김민재 선수가 뒤늦은 감 있을 수 있는 유럽 무대로 비상함도 형제의 국가 터키에서의 시작을 성공리에 장식함도 선수로서 노년기인 외질과 함께함도 작은 신비입니다. 그것을 수덕으로 조화 이루어 주시는 것이 성사생활입니다.

이를 침묵 보이스 더불어 노래로 바라보면 5공 정권 시 정치인들의 대국민 사고를 연예인들에게 돌리는 대마초 사건으로 당시의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작은 거인 그가 감옥에서 '창밖의 여자' 위로로 초대 받을 때 마이너 리그를 대표하는 그녀가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이라는 타이틀로 수면 위로 오른 것도 작은 히스토리 이면의 애피소드이자 신비와 수덕인 것입니다.

성사생활은 한 생을 외사랑해 온 한 남자가 이혼 왕국 시대의 그녀와의 해후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침묵으로 돌려보내는 현상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감을 모르는 남자는 쥴리로 머물 것입니다. 장님 가수 이용복의 "오 나의 사랑 쥴리아(마리아의 또 다른 이름)'로 시작되는 노래를 복기해보십시오. "너를 알고부터 이별이 시작되었다"는 그것을 은하 작은별(스텔라: 마리아의 또 다른 두 번째 이름) 기도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전두환은 혈액암 노년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감옥의 박근혜 율리아나, N번방 아이, 정은이 엄마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돈 때문에 인간의 연명 거부도 하지 못하고 괴로운 죽음을 맞은 이건희 회장과 돈 때문에 출감 된 이재용 회장을 바라본다는 것 보고 듣고 믿는 과학과 믿고 듣고 보는 사랑의 레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연명거부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으로 고통을 완화시키는 산소 및 기본 의료까지 멈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생활 30년과 공생활 3년의 기호학이라는 숫자에도 담겨있는 수덕 즉 공감 대화를 위한 지금의 나-전달법을 나누는 너와 나의 오늘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아침 역시 내가 온 것이 아닌 초대 받은 아침인 것입니다.

아내가 먼저 신앙을 믿으면 그 가정은 성가정이 오래 걸립니다. 뜸이 오래 들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먼저 믿으면 그가정은 성가정이 즉시 됩니다. 뜸이 들 겨를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평등권과 대표권을 수호하는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 시켜주시는 성사생활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첫찌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찌 되는 지상과 천상의 윤회 아닌 열반 즉 거룩한 성사생활은 마지막 윤회의 도전을 받습니다. 그 또한 시나브로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주님을 닮은 임의 마음처럼 집착이 애착이었음을 애착이 염원이었음을 우리가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대상자가 침대에 오를 때는 불편한 다리가 아닌 건강한 다리를 먼저 올립니다. 수호자는 불편한 다리를 지지해줍니다.

그런 수호자와 사랑을 하십시오. 어린아이처럼 맹목적으로 치유의 선물을 바라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단순 고백 성사자들의 고해 아닌 단순 고백을 가장 힘겨워하는 신부님과의 대면 공감 대화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부정은 가장 강력한 긍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전을 위하여 평상시나 전쟁시에도 작전의 반도 안되는 세 가지 업무 분량의 인사, 정보, 군수력을 채비하여 성가정으로 참례할 수 있는 시작과 마침에 감사드리며 더 나아가 모두에게 돌아갈 수 있는 지금의 기회를 감사드리십시오. 그토록 기다려온 신부님의 침묵을 바라보십시오. 미사는 보는 것이 아닌 참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난날 집착의 시행착오들로 하여금 거룩한 주님의 침묵에 안기는 강물같은 평화의 침묵으로 인도하셨고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노년에 이르러 가족간의 갈등도 완화되는 것들 바라보며 대상자를 위해 작은 화살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것들을 과거와 미래로 도둑 맞았던 우리는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닌 보지 않고 믿는 참례의 지금으로 보고 듣고 믿는 과학과 믿고 듣고 보는 성사생활의 기쁨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할 것입니다. 문턱이 높게 다가올 때는 앞바퀴를 주님께서 들고 밀어주실 것입니다. 계속하여 나-전달법과 대상자와의 공감 전달법에 대하여 공부하시며 더욱 굳건한 성사생활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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