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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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기도를 해도 소용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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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121.162.110.*]

2022-11-24 ㅣ No.12640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마음을 다해 제나름 절실하게 기도드렸지만 마음의 평화는 오지 않고 더 우울해졌어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일단, 아래의 좋은글 읽으면서 마음 내려놓기 해보세요. 곧 자매님이 마리아고 천주 성부의 어머니로 즐겨 되고 있는 이유 서술해드릴테니.

초심을 잃지 않는 지혜
훌륭한 인물이 되고,
중요한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임은 이미 성체 현존을 믿는 훌륭한 인물입니다. 그런 중요한 신원과 사명으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신원과 사명은 하느님이 계속 부여해주시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신비로 상선벌악으로 잠시 숨을 고르는 것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부여해주시기에 자녀에 대한 내리사랑으로 강생구속을 나누게 되는 상황인 것입니다.

첫째는 초심, 둘째는 열심,
그리고 셋째는 뒷심입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마음이 초심입니다.

그 이유는 초심 속에
열심과 뒷심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첫 발자국은 무엇일까요? 성서를 살펴보면 어둠 위에 하느님께서는 최초의 피조물 빛을 창조하시어 낮과 밤을 나누시는데 우리는 그렇게 빛(lux)의 어원인 루치아 엄마를 따라 상따루치아(Santa Lucia)를 부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닮고 따르는 것은 지금 주님을 부르기 부르시는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리하여 함께 쉬고 부르시며 다시 열심할 수 있는 초능력을 발휘(excellent)하기도 하지요. 뒷심도 마찬가집니다. 상처받은 자아 인성만으로 한다면 지칠 것이고 역시 병든 신성만으로 해도 지치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과거를 추억으로 되새기며 미래로 떠납니다.

※ 일단 여기까지 초고를 썼어요. 중언부언과 윤필은 계속하여 자매님과 함께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잠시 쉬어가는 마당으로 아래 동기시인과의 애피소드(사진참조)를 전합니다. 필자의 33년 외사랑 로사축일인 13년 전 도원결의 동기시인이랍니다.

초심에서 열심히 나오고,
초심을 잃지 않을 때 뒷심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초심의 아들은 열심으로 열심의 자녀는 뒷심이지요. 예수님은 단 한 번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저승에 가시어 사흘날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시고 사랑 자체이시며 자비하신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어 부활하시며 그리로부터 산이와 죽은이를 심판하러 오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초심이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품는 마음입니다.
처음에 다짐하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마음(이성+영성)을 비움으로써 면형무아(麵形無我)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 모든 것이 모든이 안의 모든 것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초심이란 첫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영원의 끝으로 지나가는 첫 사랑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보고 듣고 믿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초심이란 겸손한 마음입니다.

    초심은 이로써 나보다 더 그를 사랑하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성당을 들어갈 때 그리스도 제대를 먼저 바라보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초심이란 순수한 마음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 또한 나를 보시어 믿고 닮고 따르시게 됩니다.

초심이란 배우는 마음입니다.

    초심은 그렇게 배우고 익힙니다. 타고남보다 더 귀한 후천적 노력을 즐기며 후천적 노력보다 더 귀한 채험으로 가장 귀한 성령 은총을 향해 소풍 떠나는 소녀의 마음인 것입니다.

초심이란 견습생이 품는 마음입니다.

    이로써 초심은 타고남이 부활로 진화됩니다.

초심이란 동심입니다.

    시공을 초월한 부활은 우리도 알파와 오메가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가지치기 은총으로 영원을 살기에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하느님을 따라 큐피트(arrow prayer)를 쏘게 되는 것입니다.


피카소는 동심을 가꾸는 데
40년이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초심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초심은 피카소, 램브란트의 그림도 걸음마 시작하는 동심으로 인도해줍니다. 우리가 아기의 눈을 통해 배우듯, 프로가 순수 아마를 다시 스승으로 여기듯 아기에게 다만 하얀종이와 연필을 조달해보세요. 아이는 피카소, 램브란트에게 청출어람(靑出於藍)으로 보은할 것입니다. <-- 일단에 이은 이단 기어도 여기까지 필타로 정차하였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삶은
영원한 초심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고,
무엇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그때 우리가 점검해야 할
마음이 초심입니다.

우리 인생의 위기는
초심을 상실할 때 찾아옵니다.


초심을 상실했다는 것은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겸손히 배우려는 마음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초심과 얼마나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
초심을 상실하지는 않았는지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초심은 사랑과 같아서
날마다 가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은 전등이 아니라
촛불과 같습니다.

전등은 가꾸지 않아도 되지만
촛불은 가꾸지 않으면
쉽게 꺼지고 맙니다.

-좋은 글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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