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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당 신부의 지상 교리]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이철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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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174.52.193.*]

2017-03-30 ㅣ No.11455

 

 

[본당신부의 지상 교리]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철희
 
 
 세상살이에서 힘겨움을 느끼지 않고 사는 이는 없습니다. 어려움과 힘겨움 속에서 헤매는 것이 사람의 삶이라 해도 옳은 표현일 것입니다. 적당한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고도 합니다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어려움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삶의 결과는 아주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힘들고 두렵게 만드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일이기는 합니다만, 남과 북이 대치하고, 서로 대포를 쏘아대는 세상에서 우리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로마의 어느 역사가는 “평화를 바란다면 더 많은 무기를 준비하라.”고 했다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 삶에 평화가 온다는 보장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 끝을 모를 다양한 일들이 우리를 감싸는 세상에서,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고, 믿음에 대해서 말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대답하기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렇다고 믿음 또는 신앙에 대한 일은 온전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주장하면서, 그저 세상의 일만 열심히 하고 산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세상에서는 찾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이다.
 
 저는 어렸을 때에 논밭이 있는 시골에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가진 논과 밭은 없었지만 형님들과 함께 이리저리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놀다가 황당한 체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 논두렁 사이에서 신발을 잃어버린 일이었습니다. 누런 물거품이 모여있는 것을 돌로 착각하고 밟은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분명히 돌이었는데, 그게 돌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 나이까지 가졌던 지식의 한계였습니다. 그 돌(?)을 밟고 난 다음, 신고 있던 고무신은 어디론가 도망갔고, 논두렁에 엎어지고 말았습니다.
 
 손을 대서 그 돌(?)을 만져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눈으로 돌이라고 생각하고 밟았던 것처럼, 허둥지둥 사는 것이 사람의 생활이라면, 그렇게만 살아도 좋은지, 또 그렇게만 사는 것이 결국(!) 내 삶에 도움으로 돌아오겠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한 번 잘 했다고 해서, 갑작스레 내 삶에서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고 행복이 들이닥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실의 삶을 다르게 해석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신앙에 대한 내용으로 그 범위를 한정하겠습니다. 세상의 일들에 대한 해석에는 어느 한 사람의 지혜만 통하는 것은 아니기에 말입니다.
 
 물론 이 글에서 사람의 생각만 언급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것이기에, 가급적 신앙의 본래 정신을 따라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행동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낱말의 한계를 생각하자면,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영역에 속할지 모릅니다. 돈을 벌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높여주는 것도 아니고, 건강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라고 쉽게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러할까요? 어찌 생각하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끝내면, 그 사람은 반쪽짜리 인생을 사는 사람, 자기 스스로 인간의 능력을 제한하는 아주 딱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점과 선, 면과 입체의 4차원 세상에서만 살아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세계에 영향을 주는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을 우리 스스로가 부정하고 포기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차원 세상은 물질세계를 넘어선 정신세계에서, 그리고 현상세계를 벗어난 신앙세계로 눈을 돌려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한자로는 ‘신(信)’이라고 표현할 테지만 좀 더 의미를 강조하면, 신앙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라고 써놓고 그 말을 해석하면, ‘무엇인가를 믿고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그저 이론적인 내용만으로는 의미가 없고, 반드시 행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신앙에서 믿음의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자리는 우리 가톨릭 신앙에 대해서 다루는 자리이니, 그 범위를 또 한 번 줄인다면, 대상은 분명해집니다.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사람이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사셨던 분, 그분과 그분이 하신 일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또한 믿는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받아들이고 그 대상 때문에 내 삶이 더 풍성해지고, 내가 역경에 빠져서 헤맨다고 하는 순간에도 그것에서 탈출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이 내게 가까이 있다는 고백이요 인정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믿는다는 것은 순수하게 인간의 노력과 생각, 의지와 행동만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덕”(153항)이라고 말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적인 행위이며, 인간의 자유나 지성에 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하느님의 은총과 협력하는 것입니다(154-155항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살이를 믿음으로 대할 때, 우리의 삶은 더 풍성해지고, 역경과 곤경에서 탈출할 힘을 ‘사람의 힘을 넘는 다른 대상, 곧 하느님’에게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사람은 세상에서 잘 나갈 때(?)는 자기 두 주먹만 믿습니다. 이 말은 ‘쌍수교 신자’라는 소리가 될 터인데, 그렇게 산다면 이는 믿음의 대상을 영원하고 완전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언젠가는 사그라질 피조물에 두는 것입니다(150항 참조).
 
 이렇게 피조물에 삶의 희망을 두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이길 수 없는 큰 역경에 부딪히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갑작스레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그가 평소에는 생각하기조차 꺼려했던 절대자를 찾습니다. 곤경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역경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이전에 가졌던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옛날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구약성경에는 이 믿음을 인간의 생각대로만 해석하려고 했던 발락이라는 모압 왕과 하느님의 뜻대로 세상을 대하려고 했던 발라암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민수 22장 이하). 사람의 힘을 넘는 하느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고 믿었던 발락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믿는다는 것은 무신론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헛된 꿈을 꾸면서 인간의 지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과학이 저 혼자 독불장군이 되지 않고 인간의 진정한 삶을 위하여 올바른 길로 가게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람이 올바른 의미로 믿는다고 할 때, 그 행위는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161항 참조).
 
 올바른 신앙,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 안에 이루어질 영원한 생명이 나를 찾아올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163항 참조)이 될 것입니다. 영원한 선물이 우리를 향해서 오게 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삶을 진정으로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자세로 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철희 요한 크리소스토모 - 서울대교구 신부. 1991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고양동 · 퇴계원 · 무악재성당을 거쳐 현재 등촌3동성당 주임으로 사목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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