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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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의 오류] 성녀인가? 정신착란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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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근배 [worker] 쪽지 캡슐

2000-04-03 ㅣ No.283

 

글쎄 제가 본 잔다르크라는 영화는 그리 좋은 영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보는 사람마다의 받아들이는 차이를 인정하면서 제가 느낀 잔다르크의 오류를 조심스럽게 짚어 보고 싶습니다.

 

먼저 도입부분

어린 나이에 잔다르크는 자신의 언니가 영국군에게 죽임을 당한 후 강간당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이러한 체험은 후에 잔다르크의 행동이 복수심에 의한 것이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복선의 역할을 합니다. 뤽 베송은 잔다르크의 행동은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복수심의 발로였다는 그의 상상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지나칠 정도로 구역질나는 강간장면을 처음부분에 그려놓습니다. 관객들은 이 장면으로 인해 후에 있을 잔다르크의 변심의 과정을 어떠한 의문을 갖지 않은 채 어렵지 않게 인정을 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언니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고증은 확실치 않으며 잔다르크를 다루는 어느 책에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는 자료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야사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확인되지 않은 사건을 뤽 베송은 도입부분에 매우 밀도 있게 삽입시킴으로써 후에 있을 잔다르크의 행동이 믿음이 아니라 복수심이었다는 그의 천한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뤽 베송에게 있어서 언니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 그 자체로 인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잔다르크는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말수가 적어졌다든지,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한다든지 또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잔다르크는 본당사제에게 묻습니다. ’왜 하느님은 자신을 거두지 않고 자신으로 인해 언니가 죽게 했느냐’고... 그러나 사제는 어떠한 명확한 답변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누가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그 어린 소녀에게 이야기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번민하던 잔다르크는 한밤중에 성당에 찾아가 우스울 정도로 쉽게 열리는 감실을 열고 성혈을 입에 처절하게 묻혀가며 마십니다. 1400년도의 성당의 감실에는 성체가 아니라 성혈이 모셔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정확한 답을 드릴 수는 없으나 우리 신자들은 그것이 과연 예수님과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행위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어린 나이라 성체를 모실 수 없었던 잔다르크는 주체적인 개인의 행위를 통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룰 것을 소망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과 강력하게 일치하기를 원하는 어린 성녀의 모습을 보기보다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느님이 아닌 자신이 주(主)가 되어 모든 것을 이루어나가고자 하는 도전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영화의 시작에서 고백성사를 즐겁게 자주 청하는 잔다르크를 통해 종교적인 영화를 기대했던 관객들은 이 영화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시작하게 됩니다. 물론 소문을 통해 종교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갔어도 어디까지 뤽 베송의 눈먼 메스가 잔다르크의 영성에 가해지는가에 대해 우리는 여기서부터 걱정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중반부분

잔다르크는 군대를 이끌고 오를레앙 전투에 참가합니다. 프랑스의 장군들은 잔다르크의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 대한 의문을 품게 됩니다. "왜 하느님은 이런 전쟁을 허락하시는가? 이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바인가?"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 하느님께서 성녀를 보내셨다는 사실에 대해 장군들은 하느님께서 처참한 전쟁을 원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하느님께 대한 의심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지긋지긋한 전쟁에 대한 회의스러운 마음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곧 자신들, 인간들이 저지른 잘못을 하느님께 떠넘기는 인간들의 치졸한 행동인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은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 영화의 주인공 잔다르크에 던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진실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가, 아니면 사기꾼인가 하는 질문이겠죠. 뤽 베송은 이 질문에 대해 답변을 명쾌하게 주지 않습니다. 왜냐? 그의 의도는 종교영화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의도를 철저하게 숨긴 채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그 만의 잔다르크를 만들어 나갑니다.

 

잔다르크는 오르레앙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성문을 무너뜨리면서 전투장면과 함께 영국군에 대한 살육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선 멍하게 정신을 잃게 되어버리죠.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한차례의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 뒤였고 포로들을 처리하는 장면이 잔다르크의 눈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한 병사가 영국포로를 뿔이 삐죽삐죽 난 해머로 죽이려고 하자 잔다르크는 그를 저지하며 그녀가 가진 반지를 주고 그 포로를 살려줍니다. 이 전투장면에서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일까요? 불행히도 ’용감한 믿음의 성녀 잔다르크라든지, 인간을 사랑하는 잔다르크라든지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설령 그러한 관점에서 영화를 관람하신 분들이 대부분이라 할지라도 제작자 뤽 베송은 그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말씀드린바 대로 그가 만들고자 한 것은 종교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잔다르크가 성녀인가? 정신착란자인가?’라는 계속되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영화 안에서도 잔다르크를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또는 복수심과 신앙 안에서, 현실과 알 수 없는 정신적 세계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한 소녀를 그려냄으로써 반종교적인 영화를 탄생시키고 있습니다.

 

먼저 잔다르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 행동은 곧 프랑스 장군들이 농으로 건네던 ’하느님께서 왜 이런 전쟁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한 답변이 되기도 합니다.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대사일 수도 있지만 뤽 베송은 의미심장하게 전투장면 이전에 그 대사를 끼워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의 잔인하면서도 때로는 코믹한 전투장면들이 펼쳐지면서 뤽 베송은 하느님의 전쟁을 비웃습니다. 그리고 잔다르크는 무참히 쓰러져 가는 영국군을 보면서 자신이 한 일이 진실로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인가?"하는 의구심이 들게 됩니다. 이러한 영화 속에서의 잔다르크의 의구심은 곧바로 관객에게까지 질문이 가해지게 합니다. "승리를 위해 어린 소녀를 데려와서는 상대편의 사람들을 살육하게 하시는 하느님은 진실로 우리의 하느님의 맞는가? 저 소녀는 성녀가 아니라 광기 어린 정신 착란자가 아닌가?"하는 질문들이 각자에게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영감으로 성을 공략하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계시와 자신의 믿음으로 인하여 벌어지는 무참한 살육장면의 갈등 사이에서 그녀는 정신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면의 갈등으로 인해 정신을 완전히 잃은 광기 어린 정신병자의 것인지, 아니면 탈혼의 상태인지는 제작자 뤽 베송이 아니라서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의 경우가 다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 장면을 통해 알게 됩니다.

 

잔다르크가 영국병사를 구해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 것은 과연 따뜻한 인류애의 참 모습이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전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뤽 베송은 전 장면과의 대치적인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철저하게 하느님과 잔다르크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살육장면에서 정신을 몽롱하게 잃은 잔다르크는 전투가 끝나자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이는 곧 하느님의 관여하심에서 온전한 사람의 상태로 돌아왔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된 동일한 인격체가 아닌 완전한 다른 객체인 인간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또는 복수심과 신앙과 인간애의 갈등에서 오는 정신 착란에서 제 정신으로 돌아 온 상태를 뜻합니다. 두 가지의 경우가 다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왔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갈등으로 인해 나갔던 정신이 들어오자, 탈혼에서 풀리자마자 잔다르크는 멋있는 어조와 행동으로 그 자를 풀어줄 것을 명합니다. 이전에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모순된 살육장면에서 하느님의 뜻과 인간애 사이에서 방황하던, 탈혼상태에서 무참히 사람을 죽이던 잔다르크를 연출하더니 일순간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하느님에게서 벗어나자마자 참된 인류애를 지닌 정신차린 참인간 잔다르크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가 만약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면 잔다르크의 전투에서의 용감한 행위는 정신병적인 것이라 결코 성녀의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이 깨어난 후의 행동은 17세의 소녀로써 보일 수 있는 사랑 지극한 행동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겠죠) 또 한가지의 경우, 탈혼상태였다면 그녀의 신앙과 그녀가 믿는 하느님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즐비하게 늘어진 시체들은 곧 잔다르크의 행위이기에 곧 하느님의 행위도 되는 것입니다. 그 피비린내 나는 시체장면과 탈혼에서 돌아온 잔다르크가 보여준 영국병사를 구해준 행위는 서로 교차하면서 하느님과 그의 계시를 받은 잔다르크는 무능력하고 잔인한 편으로, 반대로 순수 인간 잔다르크는 평화의 인간, 곧 하느님의 능력에서 벗어난 우월한 인간을 표방하게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장군들의 농에서 건네던 질문들을 뤽 베송은 이렇게 해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정말이지 잔다르크가 하느님께서 보낸 사자라면 ’하느님은 뭔가 잘못됐다. 그런 하느님께서 인간사에 관여하심으로써 인간은 더욱 혼란스러워질뿐 아니라 어느 특정한 개인은 심각한 내적인 갈등을 겪고 있다. 인간사의 해결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나,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뿐이다.’ 이런 해답이 아니면 ’잔다르크는 정신 착란자였다!’일 것입니다. 그녀가 만약 정신 착란자였다면 영국과 프랑스가 온전치 못한 17세의 소녀에게 놀아난 역사를 웅장하게 그린 코메디극을 본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한 소녀의 이기심과 복수심이 신앙과 절묘하게 결합되면서 업그레이드 돤 광신도를 만들어 냈고 역사는 그것을 영웅으로, 교회는 성녀로 기록했다는 코메디를 연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코메디 영화는 교회에 심각한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한 소녀의 상처를 감싸주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복수심에 이용당하기만, 아니면 한 소녀의 복수심을 이용하여 인간사에 역사하시는 신의 모습을 통해 신앙과 교회를 비웃는 뤽 베송의 저급한 의도한 깔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뤽 베송은 교회를 싫어하는가 봅니다. 그는 뒤에 나오는 대관식장면에서 기적으로 모셔졌던 성유가 메말라 없어지자 일반기름으로 대체시켜 버리는 장면을 넣습니다. 교회의 기적을 코메디로 전락시킴으로써 교회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잔다르크의 탈혼 장면에서 나타난 신적 존재의 모습이 꼭 유령, 주사 맞은 사람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나 신비체험을 하고 있는 잔다르크가 알몸으로 꽃잎과 넝쿨로 휘감겨 뿅 간 모습을 하고 있는 것 등, 그리고 역사적으로 잔다르크의 기장은 예수님의 이름과 심판일의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고 하는데 영화 속 깃발에서는 아무런 글씨도 그림도 알아 볼 수 없었으며, 기를 들고 적진으로 홀로 달려가는 잔다르크의 "나를 따르라."라는 말에 도망가던 패잔병들이 되돌아서 영국군을 받아치는 장면은 서사극의 감동보다는 초등학교 운동회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하여튼, 뤽 베송은 그가 원했던 질문을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던집니다. 결코 그는 ’잔다르크는 성녀인가? 시대의 정신착란자인가? 잔다르크가 성녀라면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는 것 같으면서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뤽 베송이 만들고자 했던 영화 "하드고어 심리서사적 코메디 사이코무비" 잔다르크인 것입니다. 결코 잔다르크는 종교영화가 아닙니다. 잔다르크의 오류는 잔다르크가 프랑스군에게 잡혀 감옥에 갇히는 장면에서부터 극을 더하게 됩니다. 바로 문제의 고백성사 장면. 알 수 없는 실체가 잔다르크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는 장면이죠.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쓰기로 하겠습니다. 대사들을 다 까먹었기 때문에 언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 장면에서부터 얼치기 서사극이 심리극으로 변하기 때문에 대사가 필수적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 같은데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군요. 비디오가 나와야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그 이전에 그 부분에 대해 알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와 견해가 틀릴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래 자매님께서 쓰신 것처럼 고백성사에 대한 부분이 그리 신앙적인 것만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유를 갈아치우는 장면보다도 더 교회를 비웃는 행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우리 신자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곤 잔다르크가 용감하게 진두지휘는 장면, 고백성사를 청하는 대목입니다. 물론 이 장면들이 부분적으론 신앙의 도움이 되는 것이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땐 오류 그 자체입니다. 문제는 그 오류를 통해 우리의 잔다르크 성녀를 정신착란자로 만들거나 교회를 바보로 만들고 있으며 궁극적으론 하느님께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잔다르크는 하나의 장면에서 감동을 찾기보다는 전체의 구성 안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그런 영화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신자가 아니라면 모를까 그대가 가톨릭 신자라면 영화 잔다르크는 런닝타임 2시간 30분 내내 두 눈 크게 뜨고, 정신 바짝 차리고 보아야 할 매우 혼란스러운 그런 영화인 것입니다.

 

비디오가 나오면 그렇게 보시길 바랍니다..... w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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