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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2번째 의문] 낙태와 피임, 누구를 위한 것인가?---이숙희(서울 대교구 가정사목부 생명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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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174.52.193.*]

2017-04-27 ㅣ No.11475

 

 

낙태와 피임,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숙희(서울대교구 가정사목부 생명 담당)
 
 
한국사회에 낙태가 만연한 사회적 이유로 많은 사람은 가족계획 정책을 든다. “국가 시책에 의한 가족계획은 임신을 사전에 방지하는 피임 방법에 의한 것이고 임신 후의 낙태를 용인함이 아니다.”(대법원 1965.11.)라는 판례가 있다. 그러나 출산 억제 정책에 따른 가족계획은 피임법의 보급뿐 아니라 낙태, 불임시술로 이어지게 되었다. 국가적 차원의 홍보와 여러 정책적 지원이 원하지 않는 임신이나 합법적이지 않은 임신을 했을 경우에 낙태를 인정하는 법적 근거를 제공했고, 생명 경시 사상을 온 국민에게 주입시켰다. 미혼이거나 기혼인 여성이 아무런 죄의식이나 책임감 없이 정부의 가족계획 정책 아래서 산아제한의 방법으로 낙태를 선택하게 되었다.

혼인한 뒤의 낙태 경험자들이 낙태를 하게 된 이유의 대부분은 일시적 피임의 실패로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 때, 더 이상 자녀를 원하지 않아서, 또는 감기약 등을 먹어서 기형아를 낳을까봐 등등이다. 결혼생활 안에서의 낙태는 성 규범이나 모성 역할에 전혀 모순되는 행위가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은 낙태를 두렵고, 고통스럽고, 걱정스러운 것으로 인식한다. 낙태는 여성의 몸과 마음에 가해지는 충격이고, 외부적 힘의 개입이다. 또한 낙태의 경험은 여성들에게 심리적, 신체적으로 무력감을 경험하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낙태는 출산과 달리 본인의 의지에 따라 여성의 몸 내부에서 비사회화된 임신이라 간주되기 때문에 낙태 뒤 가족이나 친척들로부터 정서적 물질적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여성의 출산 기능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낙태에 관한 결정권은 여성의 프라이버시 행사권이라는 여성주의적 입장과, 생명존중의 입장에서 볼 때 낙태는 살인이라고 보는 보수주의적 입장은 생명에 대한 가치 기준에 차이를 보인다.

필자는 두 상반되는 입장을 간단하게 정리한 뒤, 낙태가 여성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와 개인적으로 어떠한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낙태를 경험하지 않도록 하고자 피임을 권하는 것이 진정 여성을 위한 것인지, 또한 교회는 이에 대해 어떠한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대안으로 어떤 것을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여성주의적 입장
 
1970년대 초에 낙태금지법에 대항하는 서구의 정치적 캠페인에서는 “나의 배는 나의 것”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런 슬로건에 대한 여성주의적 해석으로 “`① 여성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며 태아는 여성의 몸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러한 권리에 속한다. ② 여성들은 태아를 생산하기 때문에 태아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③ 여성들은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구상할 수 있기 때문에 낙태에 관해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 등의 논거를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낙태문제를 임산부와 태아, 여성과 남성 사이의 이익 갈등으로 보며 낙태에 대한 임산부의 자율적 결정권을 논증하려고 한다.

특히 피임 선택 등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최소한의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서 여성에게 낙태의 선택권이 보장되어야 할 것(박숙자, “여성의 낙태 선택권과 입법과제 연구”, 『한국여성학』 제17권 2호(2001년))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2. 교회의 입장
 
“가장 기본적인 인권은 바로 생명에 대한 권리이다. 개인의 이익이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일지라도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국가의 최고 사명이 국민의 생명권을 보장하는 일일진대, 자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태아의 생명은 그 누구보다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국가에서 인구 조절로 고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인구 조절은 자연법에 부합하는 방법으로나 자원 개발, 이민 정책 또는 다른 건전한 방법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이 아무리 어렵고 또 더 큰 희생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태아의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인구 조절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박토마, “인공 유산과 피임의 윤리적 문제”, 『사목』 110호(1987.3.), 27-34면).

때로는 임신이 산모의 건강 또는 생사를 좌우하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자녀 출산이 경제적 부담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염색체 이상이나 기형아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수도 있고, 성폭력에 따른 임신이라면 사회적 지위를 잃거나 명예가 크게 훼손되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의 권위로도 아이의 생사를 좌우할 수 없다는 것이 교회의 입장이다.

출산과 관련된 역할 비중과 책임에서는 여성에게 무게 비중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3. 낙태 후유증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권리’ 대 ‘태아의 권리’, ‘선택의 자유’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다. 이러한 논쟁들은 급작스럽고 계획하지 않은 임신의 스트레스와 근심을 덜어주는 수단으로서 낙태를 제시하기도 하며, 낙태가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유발된 내적, 외적인 압박을 경감시켜 준다고 주장하며 그 타당성을 얻고자 한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은 이를 통해 모종의 안도감을 체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이나 감사의 느낌이 아니라 ‘일을 치러냈다’는 감정의 반응, 곧 수치심과 죄책감 내면에 갈등을 일으키는 상반된 감정이 경감되었다는 느낌일 뿐이다. 모든 것이 잊혀졌다고 생각하거나 끝났다고 접어두겠지만 수많은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나지 않는다.

모든 낙태에는 적어도 두 명의 희생자(아기와 엄마)가 있다. 지금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사라져버린 생명의 메아리가 엄마의 가슴 속에는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낙태 위기에 있는 어느 엄마에게 낙태를 선택하도록 종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엄마가 안고 가야 할 상실감과 깊은 상처의 치유를 위해 아주 오랫동안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상실감은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고, 그 엄마만이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낙태 시술을 하는 의사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일이다.

서울 대교구 가정사목부에서 ‘희망으로 가는 길’이란 낙태 치유프로그램을 연지 이제 1년 8개월이 되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힘겨운 작업을 하게 된다. 여기에 오는 참석자는 대부분 삶의 에너지를 다 소진해 버린 우리의 어머님들이다. 젊은 시절 사회의 흐름과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자신을 지켜내지 못해 낙태를 했고, 세월이 흘렀지만 가슴 깊숙이 남아있는 고통스러움으로 당신의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들 정도로 지쳐버린 어머님들이다. 간혹, 당장 눈앞의 해결책을 위해 낙태를 결정하도록 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고통을 경험한다는 남자 분들도 함께하며 목메어 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식과의 문제, 부부간 문제 등으로 풀리지 않고 엉켜있는 감정들을 안고 있다. 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답답해한다. 낙태를 묵인한 사회나 낙태를 죄라고 명시하는 교회는 낙태아의 부모가 죄책감과 슬픔, 후회의 경험을 토로하고 풀어낼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해 주거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낙태에 대한 공동 책임에서 비켜날 수 없다. 생명에 대한 가치가 상실되어가게 한 사회, 교육기관, 교회, 하물며 아픔의 경험을 공감하는 여성들까지도 말이다.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선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당당하게 생명을 지켜내는 여성일수록 진정으로 당당한 여성, 행복한 여성으로 사회에 설 수 있을 것이다.
 
 
4. 피임은 낙태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정책적인 가족계획은 인공피임을 대대적으로 보급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여성의 50% 이상이 피임을 실패했기 때문에 낙태를 선택한다고 한다. 교회는 산아조절의 방법으로 인공피임을 사용하는 것과 부부행위에서 피임을 목적으로 하거나 방법을 강구하는 모든 행위를 배격한다(『인간 생명』, 14항). 인공피임은 임신 방지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임신을 하나의 공포의 대상으로 간주하게 한다. 그래서 임신의 결과를 위협적으로 느낀다. 이러한 생각들은 생명을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기게 한다. 유전자의 위치가 잘못되었거나, 기형아이거나, 자신이 원하는 성(性)이 아니거나, 개인적인 출세 욕구에 방해가 된다면 아이를 갖는 것을 큰 부담으로 여기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럴 때 낙태만이 유일한 해답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때에는 부부의 사랑이 조건적이 되며 아이의 가치도 조건적으로 보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조건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5. 최고의 대안인 자연출산조절
 
자연출산조절법은 생명에 대한 가치와 부부의 성생활에 안정감을 가지게 한다. 부부의 사랑의 행위로 임신된 생명을 귀중하고 가치 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 방법을 사용하는 부부는 하느님께서 의사결정 과정의 한 부분을 떠맡으시도록 한다. 하느님께서는 결혼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분이라 믿으며, 부부를 사랑으로 인도하시고 영감을 주시도록 늘 간구하게 된다.

자연출산조절은 자녀의 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에 완전한 신뢰를 표시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과거나 현재 미래에도 우리를 돌보실 것이며 하느님께서 자녀 터울 조절의 방법을 계획하시고 창조하셨음에 비추어볼 때 다른 인공적인 방법은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새해, 기쁜 소식의 전화가 필자에게 걸려왔다. 2년 전 ‘아름다운 준비, 성·사랑·생명’ 프로그램에 함께하면서 자연출산조절 방법을 배웠던 신혼 부부였다. 혼인 뒤 회사일이 너무 바쁘고 업무량이 많아 힘들어서 정말 마음이 안정적일 때 아기를 갖고자 임신 시기를 많이 늦추었다가 이번 겨울에는 아기를 맞이하기로 아내와 함께 결정을 했는데 오늘 아침에 확인을 해보니 임신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기뻐서 하느님께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고 전화를 한 것이라 했다. 하느님께서 부부의 사랑에 함께해 주심에 감사하다고 무척이나 기뻐했다. 전화로 전해지는 그 기쁨의 목소리에 전율이 느껴졌다. 하느님께서 부부에게 주신 사랑과 생명의 의미는 이런 경이로운 체험을 통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목, 2005년 2월호, 주교회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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