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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 나해, 하느님의 자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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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2024-04-07 ㅣ No.171293

[부활 제2주일 나해,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스스로가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믿는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이 세상에 완전히 ‘객관적인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향성을 ‘확증편향’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보고싶은대로 왜곡해서 바라보고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부족한 존재들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자기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믿겠다는 말은 애시당초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는대로 믿는게 아니라 믿는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활이라는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은 증명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믿어야 할 신비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기 위해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고, 주님의 뜻에 따라 기쁘게 사는 삶으로 부활에 대한 자기들의 믿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매일 성전에서 기도했고,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었으며,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동료들의 증언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 두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봐야만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 ‘불신의 대명사’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토마스가 왜 믿지 못하게 되었는지를 그가 속한 공동체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지 못한 것인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아야 하는 겁니다. 먼저 ‘왜’라는 공동체적 측면을 살펴봅니다. 앞서 강론의 도입부에서 초대 교회신자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의 신원과 현존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증거를 보고서 믿은게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며 기쁘게 사는 이들의 모습 안에서 그분의 존재와 사랑을 느꼈기에 일단 먼저 믿어본 것이지요. 그렇기에 토마스가 동료들의 증언을 믿지 못했다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깊어졌고 그들이 그 믿음을 통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의 얼굴 표정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참된 기쁨이 묻어나왔다면, 그 기쁨을 통해 인격적 신앙적으로 성숙해진 모습이 눈에 보였다면 토마스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제자들 마음 속에 아직 의구심과 의혹이 남아 있었기에, 그저 몇 마디 말로만 부활 소식을 전하는 것에 그쳤기에, 토마스 사도가 주님 부활을 ‘자기 일’로 믿고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토마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지 못했는지 그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봅니다. 토마스가 믿지 못한 것은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인 사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는데 자기만 쏙 빼놓고 다른 이들에게만 모습을 드러내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 자기만 그분 모습을 못 본 상태에서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인정해버리면, 자기만 그분 사랑에서 배제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몹시 서운했던 것이지요. 그런 마음이 토마스의 말 마디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믿지 못하겠소’라고 번역된 부분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믿지 않을 것이오’입니다. ‘믿지 못하겠소’가 증거가 충분치 못해 못믿겠다는 ‘불가능’의 차원이라면, ‘믿지 않을 것이오’는 원하는 조건이 채워져야 믿겠다는 의지와 결단의 차원이지요. 즉 토마스는 물질적이고 객관적인 증거에 얽매여 주님 부활이라는 사실을 못 믿은게 아니라, 자기도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걸 안 믿을거라고, 절대 인정 못한다고 어깃장을 놓은 겁니다. 그러니 토마스는 겉으로는 주님의 부활을 못 믿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 앞에도 나타나 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자기도 남들 앞에서 ‘나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고 부르짖고 있는 셈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고 바라는 마음은 다른 어느 제자보다도 더 큰 것이지요.

 

그런 토마스의 마음을 잘 아셨기에, 예수님은 온전히 그를 위해 다시 한 번 제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리고 토마스가 내뱉은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그에게 당신 상처를 만져보라고 권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토마스는 많이 놀랐을 겁니다. 질투에 눈이 멀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그분은 토마스 곁에 계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 약속대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되는 장면입니다. 주님을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알아보기 위해 필요한 건 눈에 보이는 ‘증거’가 아니라 그분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분명한 확신입니다. 주님은 내가 당신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하는 그 순간에도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진리’를 깨달은 토마스의 입에서 이런 신앙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주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토마스의 불신을 질책하시는 게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뵙는 기쁨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니 그것만 바라지 말고, ‘보지 않고도 믿는’ 수준, 즉 참된 믿음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들까지 알아보는 더 높은 영적 차원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신앙의 여정을 걷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은 주님의 뜻을 눈으로 확인하려 들지 말고 그분을 맹목적으로,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시는게 아닙니다. 사도들로부터 전해들은 복음을 통해 주님을 믿기 시작하여, 그분의 모습을 직접 보지도 못하고 ‘흐릿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건네시는 축복과 격려의 말씀인 겁니다. 주님과 그분 사랑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에서 우러나는 의지와 결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자 ‘나의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주님을 직접 만나보지 못하더라도 그분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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