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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홀로 서 계신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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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URbanus] 쪽지 캡슐

2002-08-20 ㅣ No.37488

거기 홀로 서 계신 신부님

 

                                     

저녁 미사가 끝나고,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성당 마당에 홀로 남아 서 계신 신부님.....

밤늦게 외출에서 돌아와 불도 켜져있지 않은 사제관 현관문을 혼자 따고 계신 신부님의 뒷모습.....

텅 빈 성당 고적한 사제관에서 주님과 단 두분이서 밤을 지새우시는 신부님..........

 

어느날 사람들은 사제 서품기념일을 맞아 잔치를 열고 이렇게 축사를 읽는다.

 

성부께서 이 어리석은 백성을 무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시고

성자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 가시고도

신품성사로 사제를 세워 영능을 봉행케 하시니

세세에 현존하시는 주님은 찬미를 받으소서

 

사제가 성품을 받으시던 날,  하늘에는 성모님께서 그윽히 미소 지으시고

구품의 천사들이 노래하며 모든 성인들이 북을 치는 중에

온 몸을 낮추어 땅에 엎드려 흙이 되신채로

그리스도의 대리자 우리의 사제는 태어 나셨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살아가신 흔적을 꿰어

서른세개의 단추가 달린 검은 옷을 입으시고

가진 것이라곤 오직 사랑 하나

바라는 것이라곤 양들의 합창일뿐

세상 인연일랑 고이 접어 종탑 위에 떠 가는 흰구름에 실려 보내고

홀홀단신 되신 것은

넓은 제의 자락에 더 많은 죄인들을 보듬기 위함이었다.

 

영원한 신비의 사랑

무한한 사랑의 신비

당신은 목자 우리는 양들

사랑의 끈으로 묶이고 십자가의 못으로 밖혀버린 우리 사이

사제를 통하여 유리알 속을 들여다 보듯이

천당을 보게 되리라.

 

그런데 오묘한 섭리를 우리가 어찌 알랴.

사람들은 그렇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다가 어느새 나무 끝 위로 밀어 올려 놓고 이내 흔들어 떨어뜨린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보물을 잃어버린 듯이 울부짖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속담.

사제는 언덕이고 등을 비비대는 소는 신자들이다.

지칠줄 모르는 소가 쉴새 없이 비비대는 언덕은 허물이 다 까지고 풀도 자라지 못한다.

아, 사람이면서 사람들을 포용하고 초월해야하는 사제는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고

하느님으로부터 신적 능력과 지혜 그리고 신권을 위임 받은 사제는 나와는 달라야 한다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사제는 자신에게 맡겨진 뭇 신자들의 영원한 투사(投射)의 대속물(代贖物)인가.

그의 오지랖은 얼마나 넓어야 하나.

 

사람들은 왜 사제를 언덕삼아 그리도 비벼대는가.

사람들에게 그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조건 의지 하고픈 신의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먹을수 있는 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가 본받고 싶은 표상으로 존재하기를 바란다.

사제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주님의 사람이다.

스스로 낮아지고 스스로 비울줄 아는 자에게만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사제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흠숭과 찬미와 감사의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이다.

이래저래 사제는 정말 배겨내기가 어렵다.

 

한번은 주임신부를 바꾸어 달라는 연판장이 교구에 제출되었다고 해서 교구청에 들어갔었다.

고위층께서 하시는 말씀은 지금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은 본당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뭐 이런 거 한 달이면 몇 개씩 올라 오는지 수도 없어요......" 였다.

차나 한잔 하고 가라기에 녹차 한잔 마시고 나와 하을을 쳐다 보았다.

사제는 영원한 신자들의 타깃(target)인가.

또 언젠가는 젊디 젊은 주임신부님 때문에 사목회원들이 집단 사표를 내는둥 뒤숭숭한 판인데 식복사가 내게 다가와 하는 말이 "우리 신부님은 도대체 기도하시는걸 본적이 없다우"였다. 식복사 직분으로 어찌 이런 망발을 입에 담느냐고 야단을 쳐서 들여 보냈지만 허전하고 슬프기 그지 없었다.

나는 아마 그 때에도 다음과 같은 헬만헷세의 싣달타를 묘사한 구절을 떠 올렸을 것이다.

.......불타는 정중히 걷고 있엇다.

생각에 깊이 잠긴 그의 침착한 얼굴은 기쁨도 슬픔도 띄지않고 조용히 마음을 향하여 웃는 것 같이 보였다.

은근한 웃음을 띄고 조용히 천천히 건전한 어린애 같이 걷고 있었다.

그의 얼굴, 그의 걸음걸이, 그의 고요히 내려 뜬 눈, 그의 조용히 늘어진 팔, 그 늘어진 팔의 손가락까지도 모두 평화를 말하며, 원만함을 말하고 있었다.

무엇을 구하는 것도 아니요, 모방하는 것도 아니요, 온 몸은 영원한 안식과 불멸하는 광명과 불가침의 평화속에 조용히 숨쉬고 있었다.........

산에 왜 오르느냐는 질문에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라는 답처럼 우리의 사제도 항시 우리의 마음속에 그렇게 거기 홀로 서 계시기를 비는 마음이다.

이 또한 열린 생각은 아니었다.

 

훌륭한 사제가 계신 본당은 전신자들의 얼굴에 화기가 돌고 성당지붕위에는 둥그렇게 영성의 서광이 비치는 것 같은데 문제가 많은 신부가 오시면 임기 동안 영판 폐가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제 마음에 드는 신부를 찾아 다른 본당으로 교적을 옮길수도 없다. 임기 5년 후에 ’좋은 신부’가 오신다는 보장도 없다. 이래저래 씁쓸한 일이다.

도대체 훌륭한 신부는 누구이고 문제의 신부는 누구인가.

 

필자가 모셨던 여럿 신부님들중에 신자대중이 훌륭하신 사제라고 칭송하는 분과 그렇지 못한 신부님을 떠 올리고 그분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회상 해 본다.

첫째로 두드러진 차이가, 신자들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하는 차이다. 전자의 신부님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신자의 개인 신상이나 그 가족은 물론 살림살이 근황까지 너무도 소상히 알고 있다.

두 말 할 여지 없이 그냥 한 가족이다. 두세군데 본당을 거치느라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는다.

독선이니 독불장군이니 할 여지가 없다. 모두의 가정 안에 이미 스스럼 없이 들어와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형이 되고 동생이 되어 있다. 그 분은 늘 건강하고 언제나 평화를 나누어 준다. 훌륭한 사제에게는 권위는 있어도 권위주의는 없다.

그러나 후자의 신부님은 좀체로 신자들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늘 심기가 불편하고 소화도 잘 안되고 음주 회수가 많아진다.

 

권위주의의 원인은 열등감에서 비롯된다. 거룩한 축복을 받은 사제에게 열등감이라니........ 그러나 그분들 나름의 사제직수행에 대한 불만과 좌절감은 열등감으로 바뀐다.  오대독자를 너무나 애지중지 금이야 옥이야 판검사니 대통령이니 하며 키운 아이가 철이 들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낼가. 그 아이는 급기야 가족을 괴롭히는 사람이 될 확율이 많아진다.

평범하지 않은 신분에서 오는 외로움과 위기의식도 짜증과 소외감으로 전이 된다. 결국 억압된 정서와 유폐된 본능은 정신적 갈등의 골짜기로 빠져서 육체적으로는 노이로제 증상과 소화불량 또는 과음등 여러 가지 질병을 이르키고 정신적으로는 권위주의와 괴팍하다고 불리는 독선등으로 나타난다. 안하무인은 자만이나 오만에서가 아니라 어쩌면 소외감에 대한 보상심리인지도 모른다.

백성들을 진리의 해방으로 이끌지 못하고 거꾸로 정복을 당하였을 때 그 분들은 절망하고 우울증에 걸리고 그 어줍쟎고 괴상한 모습의 권위주의자가 된다. 초기 증상이 강론에서 나타난다. 살아 있는, 희망이 있는, 즐거운 그리고 아주 가까이 와닿는 강론이 아니고 점점 무미건조해지고 관념적이고 요점이 없는 강론이 되는 증상이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자.

아무리 혹독한 비판이 쏟아지는 신부일지라도 살짝 한꺼풀 속을 드려다 보면 그렇게 순진하고 단순하고 여릴수가 없다. 그도 그럴것이 그분들은 지금 질병에 걸려 있을뿐 하늘의 천사들이 북을치며 환호하는가운데 서품을 받던날 그들은 땅에 사지를 깔고 엎드려 가장 낮은 종으로 살기를 서약하므로서 풍진세상을 떠나 지고지순한 하늘의 세계에 기대어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사제는 그날 그 순간부터 이미 자기자신은 없어졌다.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과 백성의 사랑을 위한 십자가만을 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약한 영성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제에게 밝은 새날의 길은 어디에서 찾을수 있을가.

물론 스스로 구하는 길밖에 다른 방도는 없다.

그러나 모름지기 평신자들은 성직자들이 외로음 소외감 좌절감 그리고 질병에 들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사제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완벽한 성인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그것도 사람마다 다른 환영의 모습으로 대속물의 박제가 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가끔 지상에 발표되는 교회의 극복 되어야할 문제점에 대하여 설문조사한 통계를 보면 응답자가 평신도 수도자는 물론이고 성직계 자체에서 조차도 항상 첫순위를 찾이하는 것이 성직자의 권위주의와 인간관계의 결함등이다.

우얄고.

’권위주의를 불식 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자는 많아도 그것이 어데서부터 왜 오는지를 더불어 진지하게 살피고 함께 아파하는 것은 드물다.

그러나, 우리가 모여 앉아 미주알 고주알 불만만 널어 놓기에 앞서 평신도인 우리가 마땅히 사제의 성화를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우선 사제를 대하는 의식(意識)부터 바꾸자.

갖바치들이 사또를 영접하듯, 역관들이 청국사신을 대하듯 하지 말자.

만약 집에 오신다면 마르타 처럼 부산을 떨며 산해진미를 다 올리려 하지 말고 먹던대로 그냥 차려 놓고 마주 앉아 마리아처럼 대하자. 지나친 의식(儀式)과 격식은 상대를 거북스럽게 만들고 바보로 또는 반항아로 만들수가 있다.

성사를 집행할 때에는 더없이 수직적인 관계이지만 때로는 부모자식간으로, 형제자매로, 사제지간으로, 더불어 희노애락을 스스럼없이 함께하는 사이로 대해야 한다.

사제가 신자를 만나는 순간 가슴이 덜컹하고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안되겠다. 서로 아주 편한 관계가 유지 된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평화가 아니겠는가.

 

순명은 사랑의 논리이지만 맹종과 아부는 상대를 파멸시키는 논리다.

옳고 그름을 묵인하는것도 상대를 고사 시키는 논리다.

한 가정에서 자식들이 모두 집안에서 사회에서 제구실을 잘하면 그 가정이 화평 하듯이 교회를 위하여 또 사목자를 위해서 똑똑한 신자가 되어야겠다. 똑똑치 못하면 그 부모를 독선자로 만든다. 똑똑이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하여 마냥 순종적이면 주님께 차자도 덥지도 못하다고 야단을 맞는다.

권위와 권위주의가 영판 다른 의미라는건 누구나 다 안다. 사제와 평신도간에 참권위와 그 권위에 대한 존경이 건전하게 성립이 될 때에 자유의 은총을 받지 않겠나.

 

그리고 나남할 것 없이 공부를 좀 해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회칙 [신앙과 이성]에서 ’믿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듯이 공부를 해야한다. 물론 지식을 넘어 선지식(善知識)의 지혜를 깨쳐야 한다는 말이다.

아부는 잘못된 존경이다. 맹종은 잘못된 순명이다. 권위주의는 눈먼 권위다.

 

만약에 사제에게 중대한 오류나 지속적인 결함이나 과오가 있다면 그리고 여간해서 충언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우선 구렁이 담넘어 가듯 모른체 딴데 보는척하면서 넘어가서도 안되고 또 반목이라는 볼상사나운 꼴로 불거져도 안되겠다. 그러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즉 내가 그리고 나의 생각이 과연 옳은지를 주님께 두 번 세 번 곱쳐 확인하는 일이다. 이 과정은 절대로 혼자서 끙끙 애 쓸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해야 한다. 왜냐하면 좀 더 객관젓인 결론을 얻기 위함이다.

주님께서는 혼자보다 여럿이 있는 자리에 더 잘 오시는 것 같다.

불가(佛家)에서는 전도(顚倒)된 知 혹은 객관과 주관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일러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무명(無明)의 반대는 지(知), 무지(無知)를 넘어 있는 어떤 절대지(絶對知)라고도 한다. 하느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의 진리 앞에 유한한 인간의 속성은 바로 그 무명의 껍질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가.

사울의 눈에서 떨어져 나간 비늘(사도 9,18)이 지금도 우리의 눈에는 붙어 있는 것이다.

속인의 사물에 대한 인식은 상대적이다. 나의 믿음의 언행이 주님의 뜻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나의 언행이 주님의 뜻에 가까이 되기를 열망한다.

나 같은 미천한 신심으로 감히 주절대는 것은 당치도 않지만 아무래도 성령께서는 기도와 묵상의 깊이만큼 성화의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 믿는다. 어쨌건 나의 뜻이 아무리 옳다 하여도 혼자서는 결코 이룰수 없다. 기도로 연결된 여럿이 서로 메꾸어주고 일깨워주어야 한다.

 

이렇게 준비가 익었으면 바로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떠올린다.

"두꺼운 외투를 벗기는 것은 몰아치는 북풍이 아니라 따뜻한 봄 햇살이다." 라는 ’작전’이다.

애증의 갈등에는 사랑이 묘약이다.

 

우리에겐 사제성화의길을 쓸고 닦고 도와드려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우린 언제나 기도를 바칠 때 사제성화를 위한 기도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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