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유머게시판

[웃음편지] 소리없이 강하다

스크랩 인쇄

김황묵 [khm] 쪽지 캡슐

1998-11-11 ㅣ No.211

김황묵의 글쓰기 양식[FORM]

 

 

 

 소리없이 강하다

 

대구는 봄이란 것이 없나 봅니다. 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목도리 칭칭 동여매고 행여나 바람이 들어올세라 꽁꽁 여미고 다니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인데 지금 베란다 창 밖으로 비치는 햇살은 거의 초여름 수준으로 모든 것을 훌훌 벗어 던지게 만드는군요. 이종환 선생님, 최유라 씨.

 

저는 IMF로 목 잘리고 조만간 홈 리스쪽이 될지도 모를 형편에 처한 늙은 처녀랍니다. 몇 년간 열심히 일했는데 홀몸이고 거느린 식솔이 없다는 핑계로 정리해고 영순위가 되고 보니 참으로 세상이 원망스럽고 막막하더군요.

 

하지만 덕분에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느긋하게 책도 보고 라디오도 듣고 그리고 이렇게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까지 보내게 되다니 그리 비관만 하고 있을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비록 바깥은 죠스바, 스크류바가 500원씩 하고 자판기 커피가 400원씩 하는 살벌한 세상이지만요.

 

제가 오늘 펜을 들게 된 것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조카의 심란한 학교 생활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조카네 반에서 공개수업을 한다는데 구경 삼아서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하길래 바람도 쏘일 겸, 그리고 조금 산만하다 싶은 조카가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겸사겸사 따라 나섰죠.

 

학부모들과 선생님들이 교실 뒤쪽으로 서 계시고 예쁜 여선생님의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과는 너무 많이 바뀐 수업 방법이라든가 수업 내용이라든가 교과목의 다양성에 초보 학부모인 언니와 나는 내심 현수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선생님의 질문에 멋진 대답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고 기대에 찬 얼굴로 현수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드디어 수업이 시작되었어요.

 

"우리 어린이들, 친한 친구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상장을 탔을 때 우리 친구는 어떻게 축하를 해주어야 할까요? 대답해 볼 사람?"

교실이 순간적으로 정적에 휩싸이고 몇분 후 조카가 손을 들었어요.

 

대답이 없어 당황해 하던 선생님이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발표를 해보라고 하자, 우리 조카 현수 왈.

 

"니는 좋겠다. 자슥아"

 

평소 나서기 좋아하고 분위기 파악 못해서 내가 병적이라고까지 했지만 저 인간이 우째 저럴 수가! 뒤에 서 계시던 학부모들과 선생님이 눈물까지 질금거리며 폭소가 터졌죠. 조카는 지가 잘나서 그런 양 의기양양해 하는 표정이 정말 가관이더군요.

 

잠시 후 난처해 어쩔 줄 모르던 선생님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안 계실 때 실수로 유리컵을 깨트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번째 대답으로 사기가 당당해진 조카가 또 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키기 싫은 표정이 역력했으나 어떡해요. 손든 아이가 조카밖에 없는데. 현수가 이번에는 벌떡 일어서더니 아예 뒤를 돌아 언니를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이며 대답을 하더군요.

 

"엄마한테 맞아죽었다. 튀자"

 

만천하에 엄마라는 것이 공개된 언니는 그저 자식 잘못 둔 죄로 그날의 스타가 되셨습니다. 물론 저는 두 모자와는 상관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얼굴로 우아하게 창 밖을 보고 있었죠.

 

저는 그 선생님의 향후 가야할 길과 조카의 남은 학교생활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담담하게 언니를 위로했습니다.

 

"언니야.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았듯이 다 시간이 필요한기다. 현수도 가꾸고 다듬으면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리라 내사 마 믿는다"

 

우리조카. 키도 크고 눈도 크고 이모 닮아서 심성 착하고 속도 크리스탈처럼 여린 아인데 어쩌자고 입만 열면 흉측한 단어들만 두서없이 쏟아져 나오는 걸까요. 어쨌거나 시간은 흐르고 수업이 끝날 즈음해서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와서 열심히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 부모님의 덕입니다" 자 우리 어머니에 대해서 얘기를 해 볼 어린이?"

 

우리 조카가 또 손을 드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일을 어째야 쓰꺼나.

 

"자, 현수는 발표를 많이 했으니까 다른 어린이가 한번 해보도록 하세요. 전현수 어린이는 손 내리세요'

 

몇 명의 발표가 있고 나서도 반항이라도 하듯 뚱한 얼굴로 손을 내리지 않고 기어이 발표를 하고야 말겠다는, 마치 일제치하 독립투사같은 모습으로 현수가 손을 들고 있자 뒤쪽에서 수업참관 중이시던 선생님께서 한번 시켜보라고 그러시더군요. 할 수 없다는 듯 눈치를 살피던 선생님이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우리조카를 쳐다보며 눈짓을 하자 당당하게 일어선 우리 조카, 끝내 지 엄마를 졸도 시키더군요.

 

"우리 엄마는 레간잡니다. 우리 엄마 방귀는 소리없이 강합니다"

 

우리 가문에 저런 핏줄은 없는데 어디서 저런 게 나왔을까. 언니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가자고 내 손을 끌더군요. 며칠 전 어린이 날에는 가족이 모두 모여 놀이동산에 놀러 갔답니다. 바이킹이니, 케이블카니 원 없이 타고 배가 고파진 우리조카. 언니가 핫도그를 하나 사주었대요. 옆에 계시던 형부가

 

"현수야 그 안에든 소시지 좀 먹자"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색을 하고 거절을 하더라는군요.

 

"아빠. 핫도그에 소시지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아나?"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한숨만 쉬지 말고 우리모두 더욱 힘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이까짓 IMF쯤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이종환 선생님, 최유라 씨.

앞으로도 좋은 방송, 알찬 방송 부탁 드리며 이만 총총총.

 

대구 광역시 수성구 범물동 권휘경 올림

 

 

 

  --- 정이 넘쳐 흐르는 굿뉴스를 바라면서 ---          

첨부파일:

801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