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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칭의 (Justification) 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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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선 [39.115.48.*]

2019-03-26 ㅣ No.12124

 

예비자 교리를 받으시는 구도자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부족하나마 제 나름대로 의견을 올려봅니다.

 

먼저, 구도자님의 의문점이 무엇인지 살펴 보기위해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발표한 보도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구도자님께서 위에 올려주신 세계감리교협의회측에서 발표한 자료와 제가 올려놓은 가톨릭측의 자료를 비교해서 읽어보면 좋을 듯합니다.

 

두 보도자료문에 기록된 문장으로만 비교해보면 미세하게 다르게 적혀 있지만,

공동선언문이 무려 44개 조항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간략한 보도자료에다가 그 많은 것을 다 나열할 수는 없었을터, 발표측이 어떤 것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보도자료문에 오를 수도 안오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와 세계감리교협의회가 세계감리교협의회와 가톨릭 교회의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문’(가제)‘에 서명을 한 것을 보면, 보도자료에는 적혀 있지는 않았어도 44개 조항에는 들어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가톨릭측 보도자료 주요내용)

 

가톨릭 교회, 감리교와 일치 결실

 

 

한편, 이에 앞서 19991031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교 세계 연맹과 가톨릭 교회가 의화 교리에 대해 공동 합의를 이끌어 낸 바 있다. 이 공동 선언문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신앙만으로 구원된다는 루터교의 주장이 서로 상반되어 16세기 초 교회 분열이 된 이래, 500여 년 만에 교회 일치를 이루어 낸 획기적인 사건이다.

 

루터교와의 공동 선언문은 모두 44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아 구원되는 조건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으며, 의화와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오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 선행을 할 힘을 주시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고 합의하였다. 또한 인간은 세례를 통해 죄를 모두 용서받지만 이후에도 죄를 짓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 한다라고 명시하면서, 선행을 하라는 권고는 신앙을 실천하라는 권고라며 신앙생활에서 선행의 문제를 명확히 하였다.

 

 

출처: http://www.cbck.or.kr/bbs/bbs_read.asp?board_id=K1300&bid=1300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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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님의 질문>


고해성사 다음으로 개신교와 교리상 충돌로 힘들어 하는점은 칭의에 대한 문제 입니다...

1999 년 아우크 부르그 루터교와 공동선언 및 2006년 감리교와 공동선언후인 지금도, 예비신자 교리반에서는 루터의 칭의론에 대해 믿음만으로는 곤란하며 추가의 선행없이는 구원에 이르기에 부족하다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주교 주교협의회의 이름으로 서명한 위의 공동선언문은 천주교의 공식 입장이 아닌것인가요? 매우 궁금 합니다.

 

==> 구도자님께서 힘들어 하시는 부분 모두를 제가 이해시킬 수는 없으나, 올려주신 글중에서 대립되는 두 단어의 개념 차이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 구원: 루터의 칭의론에서의 구원과 가톨릭 의화교리에서의 구원

(2) 선행: 율법에 따른 행위로서의 선행과 그리스도 신앙안에서의 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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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 루터의 칭의론에서의 구원과 가톨릭 의화교리에서의 구원’ 

 

<칭의론에서본 '구원'과 의화론에서 보는 '구원'의 일치점과 차이점>

 

-일치점: 우리는 율법행위로서의 선행이나 우리의 공로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세례로서 죄씻음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의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매일미사(326)에서 염철호 요한 신부님의 묵상나눔에서,

사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 창조 이래로 이어진 죄의 고리 속에 빠져 있습니다. , 우리 모두가 바로 임금에게 만 탈렌트를 빚진 종들입니다. 그런데 임금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피로 우리 빚을 모두 탕감해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가톨릭은  위의 염요한 신부님의 글에서 보듯, 구원은 우리의 노력(행위)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 덕분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여기까지는 '루터의 칭의론(Justification)의 구원'과  '가톨릭의 의화교리의 구원'이 서로 일치하는 지점 일 것 같습니다. (세 종파의 합의사항을 기준으로 봐서도.)

 

-차이점: 그러나 가톨릭에서의 의화는 루터의 칭의보다 폭이 넓습니다.

(의화(Iustificatio)를 클릭하시면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교리서 1989항을 보면,

성령의 은총이 작용하여 ...“의화는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성화와 내적 인간의 쇄신도 내포한다.”(1989항 일부 발췌)

 

의화는 성령의 은총이 작용하여, 단순히 세례성사로 죄를 용서받는 것뿐만 아니라 성화와 내적쇄신으로 이끄시는,

완전하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우리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과정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두고 많은 개신교파에서는, 로마가톨릭교회는 믿음의 구원이 아닌 행위구원을 주장한다며 하느님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고 매도합니다.

 

위 본문에서, 예비자교리교사가  루터의 칭의론에 대해 믿음만으로는 곤란하며 추가의 선행없이는 구원에 이르기에 부족하다는 교리를 가르쳤다고 하셨는데,

그 교리교사님이 의화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고 세례받는 이들에게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산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 가르친 것이라면 그 가르침은 옳다고 봅니다.

그러나 '선행'의 동기는  반드시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행위만으로는 의로움이 될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성덕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 믿음의 중요성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마태7,21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히브리서 6,4~6

4 한 번 빛을 받아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이,

5 또 하느님의 선한 말씀과 앞으로 올 세상의 힘을 맛본 사람들이

6 떨어져 나가면, 그들을 다시 새롭게 회개하도록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욕을 보이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께서도 야고보서 214~26절을 통해, 믿음의 실천(살아있는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26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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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행: 율법에 따른 행위로서의 선행과 그리스도 신앙안에서의 선행

 

'선행'이 모두 믿음과 대비된 불순종의 법, 즉 율법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점으로 나뉘어집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율법에 따른 행위는 모두 구원과는 상관이 없었으나,

예수님 이후부터는, 선행믿음은 서로 대립관계가 아니고 동반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해 직접 말씀하신 것을 찾아보면,

 

마태25,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칭하시고,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선행들을 예수님께 해드린 것으로 쳐주십니다.

 

반면에 최후의 심판때 저주받은 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 인가요?

 

41-43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성경에서는  미천하고 작은 자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저주받은 자로 분류 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다음과 같이 선행을 꾸준히 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로마서 27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히브리서 13, 16

16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만일 루터의 칭의론처럼 단 한번 세례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을 다 이뤘다면 예수님과 사도들이 우리에게 꾸준히 선행과 나눔을 하도록 다시 권고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러므로 가톨릭 성교회에서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꾸준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성사의 은총을 베풂과 더불어, '기도''단식'과  '선행(자선)'을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구도자님을 진리의 세계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드리며 잘 준비하셔서 기쁜 부활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제 답변글에서 혹시 수정할 사항이나 의문점이 있으시면 여러분께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자료를 찾아보고 보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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