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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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4 (로마서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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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12-13 ㅣ No.134519



하느님 나라4 (로마서 14:17)

로마서 14:17

17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아멘 

 

자 계속해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보고 있는데 오늘은 로마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죠. '하느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게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 당시 로마교회는 이방인의 나라에 이방인의 도시에 세워진 이방인들이 주류인 그런 교회입니다물론 로마에도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살았지만 로마 교회의 구성원들의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였어요

로마 사람들이 예수를 받아들이기 전에 뭘 믿겠습니까 아테네같은데 사도 바오로가 가서 보면은 수 많은 신전들과 우상들이 있었죠 거기에서 뭘 했겠어요 제사를 지냈죠 당시에도 우상에게 제사를 지낼때는 항상 제물 고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시장에 나와있는 모든 고기는 일단 신전에서 제사 제물로 한번 쓰여진 다음에 시장에서 유통이 되게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가 예전에 잘못 섬겼던 우상에게 바쳐졌던 재물이 이렇게 밥상에 올라왔을 때 그거 먹겠습니까 조금 기분 찝찝하겠죠 우리도 그러잖아요 왜 제사상에 이렇게 올려졌다가 나오는 뭐 우리 제사상은 또 괜찮은데 남의 집 가갔고 남의 집 제사상에 올려졌다가 이렇게 숟가락 꼿힌 자국이 있는 밥을 나한테 딱 주면 어때요 기분이 하필 왜 이걸 나한테 귀신이 와서 영양가는 다 빼고 뭐 껍데기만 남은것 같은 듯한 이 밥이 나에게 왔을까 찝찝하죠 

그래서 그거 때문에 초대 교회에 다툼이 있었어요 그거 먹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사도 바오로가 뭐라고 그래요 믿음이 있는 자들은 먹고 그렇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 또 그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하느님이 먹지 못하게 한건 먹지 말아라 뭐 먹고 안먹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우상이 있는거냐 실지로 없는 거잖아 없는거에다가 바쳐졌던거가 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걸 안먹고 먹고 이런것 갖고 싸우니 먹으려면 먹고 말라면 말어 니 맘대로 하세요 그랬잖아요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죠 

로마교회도 그런거 갖고 하도 다툼이 있으니까 예전에 이제 자기들이 우상을 섬겼을 때에 그 관습과 예식이나 뭐 이런것들 때문에 많은 그 다툼이 있었어요 그래서 로마교회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되냐 아니면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되냐 이런거 같고 많이 다투고 그랬죠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그래도 수 천년간 자기들이 지켜온 안식일이니까 그거 지켰는데 새로온 어떤 이방인들은 선데이를 주일로 지키자 안식일로 지키자 그런걸로 싸움이 있기도 하고 포도주는 발효한 걸로 써야 되느냐 아니면 발효를 안한걸 써야 되는냐 이런 또 다툼이 있었어요 그런걸 갖고 싸우니까 사도 바오로가 기가 차서 쓰는 거에요 로마교회에다가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거 그러니까 외형적으로 너희들이 니들의 어떤 의를 드러내기 위해 내가 옳다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 행하는 어떤 의식이나 관습이나 이런 거 그런거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다 라는 뜻이에요 

요한복음 4장에 가면 사마리아 여인이 뭐라고 그래요 우리가 이 산에서 예배하는게 맞아요? 시온산에서 예배하는게 맞아요? 그러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산도 아니고 저 산도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성령이 그 안에 계신 자들은 아무데나 해도 된다는 거에요 왜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신데 장소가 무슨 소용 관계가 있냐 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래서 그런 거 그런 형식같은 건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우리가 예배를 드릴때에 순서 같은것도 교회사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거지 예배는 하느님의 부르심 하느님 나라의 작은 모형을 보여주는 거니까 그리고 거기에 대한 감사의 찬양 그리고 그 하느님과 나와 지금 교통하고 있다는 증거로 기도가 있고 그리고 내 아들들아 내 백성들아 너희들과 나는 이제 대화가 통하게 됐으니까 내 말을 들어라 가 하느님의 말씀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아이 감사하다 그러니까 나 이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떤 이 세상의 힘의 노예가 되는게 아니라 이 세상을 내가 다스리고 정복하여 우리 하느님께 항복시키는 그런 삶을 살아야지 가 헌금이죠  세상의 힘에게 힘의 그 총화 이걸 갖다 세상의 힘을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은게 돈이니까 돈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느님 나는 얘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이렇게 내가 얘를 정복했습니다 라고 해서 버리는 거라구요 헌금통에다가사람들이 목숨처럼 여기는걸 버리면 돈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겠어요 사람들은 나를 목숨처럼 여기고 벌벌 떠는데 이 놈은 나를 버리네~ 이게 정복이거든요 헌금은 버리는 거에요 돈을 나를 같이 버리는 거죠 그리고 그게 다 복이란다 그러니까 복을 받아라가 아니라 너희들은 이런 복을 이미 받은 자들이다를 선포해주는거 그거만 들어가면 그게 창세기잖아요 11절에서 24절까지의 그 내용 그죠 그 내용만 들어가면 그게 예배인 거에요 그 뭐가 무슨 기도가 들어가고 뭐 그런거 없어도 돼요 교회가 모여서 그런 의식을 같이 하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아 정 뭐 그런게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파되어 지지도 않고 그것에 그냥 附和雷同 하여 자기들의 유익만을 위해서 앉아 있는 그런 집단에 가서 굳이 나는 어떤 정해진 날 그런 형식을 해야 예배를 드린것이다 이렇게 강박관념 갖지 않아도 되요 

주변에 진짜 올바른 그런 교회가 없으면 교회 안가도 됩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신데 뭐하러 그런 쇼하는데 연극하는데 가갖고 헛된 시간을 낭비합니까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그런거 먹고 마시는거는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뭐냐 하느님 나라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다  사다크하느님과 나와의 피조물과의 관계에요 관계 그러니까 두 존재가 관계를 맺는데 이 관계가 서로가 요구하는 것들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그 완벽한 상태를 우리가 의라 그래요 그래서 하느님은 의로우시다 그랬을 때  하느님은 항상 자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에게 성실하시고 완전하시다란 뜻이죠 그래서 그게 의에요 

그런데 인간은 그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여 의의 관계를 올바로 맺을 수 있어요? 어떤 존재도 맺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느님과 관계할 수 있는 자는 하느님이여야 되요 하느님이 요구하는 요구를 다 들을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존재도 하느님과 의로운 관계가 될 수 없어요 그걸 불의라고 하는 거에요피조물은 왜 하느님 앞에서 불의 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가를 가르쳐주는게 ...사탄의 타락이고 인간의 타락이에요 

아이 하느님이 도대체 정신이 있으신거야 없으신거야 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놔가지고 왜 타락을 하게 만들었어 왜 천사를 타락하게 만들었어 뭐 이런 이런식의 접근은 잘못된 거에요 아니 하느님이 그 인간을 뭐 애초에 그냥 죄를 안 짓게 만들어 놓지 아니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창조한게 어떻게 죄를 짓고 아 그 죄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며 이런식의 어떤 논리나 과학으로 자꾸 그렇게 접근을 하다보면 머리만 혼란해지는 거죠 

하느님이 우리가 몰라도 되는것은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어요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변증하지 않으세요 나는 어떻게 해서 존재하는냐 이며 나는 원래 이러이러 이렇게 해갖고 이렇게 살다가 왜 천지를 창조했는지 알어 뭐 이런식에 접근을 하지 않고 그냥 하느님은 있다 여기서 출발을 하는 거죠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1,1)’ 어느 시점에 시간에 시작이 레시트니까요  그렇게 이제 시작이 된거 거든요 그런데 그 전에 내가 언제 천사를 만들었고 그 때 그 이후로 몇 년이 흐른 다음에 천사가 밖으로 나가가지고 지구에서 사람을 만나서 사귀다가 그 사람을 미혹하여 이런걸 설명하지 않고 그냥 마귀가 뱀이 되어 내려와갖고 인간을 미혹했다 이런 식으로 얘기 한단 말이에요  그 이면에 우리가 추론을 해서 섣불리 소설을 쓰면 안되는 거죠 그냥 우리는 왜 우리에게는 예수가 필요했는가 그 분의 피가 필요했는가만 알면 되는 거에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해서 그 의로움 하느님 나라는 의로움이다 라는건 이사야서 646절에 보면 모든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이다 그러죠 프리티렉 그건 똥걸레란 뜻이거든요 걸레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걸레를 프리티 렉이라 그래요 이사야가 쓴 단어가 그 단어란 말입니다 

인간의 의로움은 더러운 옷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이 그냥 최선을 다해서 인간 중에 최고로 착하게 살아내는 사람의 의로움이 더러운 옷이라구요 

인간의 행위가 하느님 앞에서 가치 있다? 없다? 똥걸레를 어따 갖다 씁니까 빨리 벗겨야지 애가 나가서 개똥에 넘어져갖고 왔는데 그걸 잘 때까지 계속 입혀놓는 엄마가 있어요얼른 벗겨서 갈아 입혀야죠 아니면 그 위에다가 또 덧입혀요벗기고 씻겨서 새옷을 입혀야죠 그게 새 언약이에요. 내가 너희를 물로 씻어 예수의 피로 입히는 거에요그러니까 그 더러운 옷 인간의 행위를 다 찢어 발기고 깨끗이 하느님이 물로 씻어요성령에 물로 씻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피라는 옷으로 입히는 거죠

하느님은 그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와 이제 관계를 맺고 대화를 하시는데이 예수로 옷 입은 그 자의 알맹이는 계속해서 똥걸레를 입었을 때와 같은 그런 행위를 하는데 예수라는 옷만 보시겠다고 했잖아요 지성소에서 그 법궤 위를 피로 확 덮어 버리는건 내가 그 밑에 있는 인간의 실수는 안보고 이제 내 아들의 피만 보겠다라는 뜻이니까 나는 옷만 보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에사오의 옷때문에 야곱이 축복받은 거처럼 나는 옷만 보겠다는 거란 말입니다이 옷은 예수라는 옷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입혀졌냐면 이 예수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이 원하는 모든걸 다 충족을 시켰잖아요 그걸 의로움이라고 하잖아요그래서 그 예수의 옷을 내가 입었다라는 걸 믿음으로 그냥 받아들이는걸 내 의로움이라고 하는 거에요 나는 하느님 앞에 진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런자가 됬구나를 인정하는 거가 의로움이에요

인간들은 하느님과 관계없이 얼마든지 먹고 마시는것 그러니까 이게 옳다 저게 옳다라는거 내가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을 행위로 옮기면서 거기에서 내가 높아질려고 하는 그런 노림수를 다 갖고 있는 거죠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사람들 앞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거 그것이 진짜 좋은 것 같니 사람에게 칭찬 받는게 하느님 앞에 미움받는 거다 라고 이야기하는게 뭐냐하면 니가 옳다라고 잘난척 하는거 그거 나쁜거야 교만이야 이 말을 하는게 아니라 인간들은 얼마나 교활한지 내가 옳아요 라는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겸손하고 이런 낮아진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어때요 이만하면 괜찮죠?~ (그러니까 아이 나는 이렇게 잘났어요 이거는 아직도 얼치기고진짜 교활한 놈들은 나는 그냥 낮아지고 겸손해 지면서 그걸로 자기를 옳다 인정함을 받을려고 하는 그게 하느님 앞에 미움받는 거라 그랬단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에요 그거 하지 말라는 거에요 

사람들에게 자꾸 인정받을려고 하다 보면 끊임없이 우리는 연극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는 그게 난 줄 알고 스스로가 자기를 칭찬하게 되어 있다니깐요 그런거 하지 말고 뭐 일은 숨어서 해야지 그러면서도 항상 흔적을 남기죠 눈치는 챌 수 있게 그러면서 나중에 그냥 어떻게 알았냐고 그러면서 아니 그렇게 했는데 어떻게 몰라요 다 알게 해놓고 그런 노림수 그 들킨다니깐요 그냥 먹고 마시는거 그게 아니라 하느님 나라는 의로움이다 그냥 거져 입는 거다 그래요 우리에게 주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거져 입혀 주는 거에요 그냥 거져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나는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 이라도 하느님께서 데려가시면 기쁘게 하느님께 가겠습니다우린 죽음을 참 쉽게들 이야기하죠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유추하고 추론한 그리고 정의한 죽음을 그 예수님의 죽음과 동일시해서 그 분의 죽음도 이런 죽음이였을 것이다 라고 그냥 막연하게 추측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 죽음이 있는데 그게 아들의 죽음이였어요  그 아들보다 그 아들의 목숨을 주고 산 당신의 백성들의 그 죽음에 왜 하느님이 무관심할까 라고 생각했더니 우리가 생각하고 추론하고 있는 죽음은 그건 죽음 아니다 라는 걸 그런 거기에 도달하게 됐죠 우리가 육신의 목숨 하나 끊어지는 거 이건 죽음 아니라는 거죠 우리는 죽음이 뭔지도 지금 모르는 거에요 사실은 예수가 죽은 죽음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숨이 끊어진 죽음 정도의 죽음이 아니라는 거죠 하느님은 그 죽음에 관심이 있었던 거에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의 그 죽음 

우리는 지금 묵시의 세계를 사는 거에요 사실은요 우린 지금 한 이레 마지막 한 이레를 사는데 그 한 이레가 뭐냐면 묵시의 세계인 거에요 오는 세대와 지금 현 세대가 오버렙 되어 있는 시대가 지금 시대잖아요 이미 하느님 나라가 들어왔으니까 그게 오는 세대라고 하거든요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에 있어서는 시대라는 단어도 없어요 히브리 단어는 세대라고 하고 그러니까 오는 세대가 영적세대이고 하느님에 의해 완료된 세대 지금 이 세대가 역사거든요 그게 지금 이렇게 오버렙되어 있잖아요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 백성인데 여기 들어와 있잖아요 완료된 상태에서 그러고 하느님 나라를 산다면서요 하느님 나라는 오는 세대거든요 이 세대와 지금 오버렙 되어서 이 세대를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그런 돌연변이들이 있다 말이에요 이렇게오는 세대에서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아서 그냥 거기는 영원한 현재 밖에 없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것은 이 역사속에서 일어나지만 묵시세계 속을 묵시를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삶이 되는 거에요  완료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그 완료된 나라를 설명하고 증거하기 위해 잠시 그림자로 펼쳐진 세상 속에서 사는 건 ....이건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영양가 빠진 똥이라니깐요 이게 말라기에 이 주장 이 그 이야기에요 너희들의 행위는 똥이다 라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인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 죽음같은것도 마찬가지에요 이미 살아있는 존재들은 이 세상에서 죽음을 통과 한다고 할지라도 하느님 에게는 그게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 이제는 이제 영원속으로 들어오는 관문이기 때문에 하느님 같이 헤엄 안쳐주시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관심을 두고 있으니까 하느님 원망하는 거에요 자꾸 

아니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그런 인간들은 우리는 진짜 몰라요 죽음 조차도 뭔지도 모르고 또 산다는게 뭔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하느님 도와주세요 이거 밖에 할게 없어요 그렇게 하느님 앞에 낮아지는게 성도인 거에요 티끌인거라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거를 인정할려고 하지 않아요 언제든지 나로 출발해서 나로 돌아와야 되요 

우리 신앙관 보세요 나 구원받기 전에 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받은 이후에 나 그죠구원받기 이전에 나가 있었고 예수의 십자가가 나에게 개입됐고 구원받은 이후에 나는 어떻게 보냈는가가 우리의 관심사 아닙니까  다 나에요 우리는 하느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됐고 예수 그리스도 이 세상에 잠시 파견된 나 다시 예수 그리스도로 가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어떻게 된게 우리는 항상 변화된 나를 추구하고 앉아 있어요 

그러니까 전부 성당에 그 변화된 나를 추구하기 위해서 무슨 도덕강연이나 뭐 윤리강연 이런 그런데 나와 앉아 있는 그런 모습으로들 앉아서 내가 이 세상에서 좀 착하게 살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에게 어떤 말씀이 필요할까 그 말씀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켜 주실까에 관심을 가져요 여러분이 변화되어서 내 놓는 삶이 하느님 앞에 가치가 없다니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그런 변화된 삶을 여러분 삶 속에서 격발시켜 내는건 하느님이 진짜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시구나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가끔 허락하는 거지 우리가 변화되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냥 교회 안에서 롤모델들을 찾아요 그 롤모델의 실체를 한번 여러분이 이렇게 매스로 갈라서 한번 보면 깜짝 놀랄걸요 

오늘날 교회는 인간부터 거기서부터 어긋나 있는 거에요 인간이 어떤 존재인줄 몰라요 000교회처럼 인간이 타락했지만 그 안에 하느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서 인간은 얼마든지 자기의 힘으로 노력으로 변할 수 있다 라고 가르치거든요 엄밀히 말해서 성선설을 주장하는 거죠 그리스도교는 성악설입니다 인간은 악한 거에요 나면서 부터 그러면 선한게 남아 있고 이 세상이 인간을 점점 자랄수록 악하게 만드는 거라면 왜 유치원에 가면 그 급훈이 바르고 정직하게아니 애들은 선하다면서요 근데 그 애들에게 왜 바르고 정직하게를 가르칩니까 그거 자체가 니들은 악한 놈이야 그러니까 인간들이 그걸 인정하는 거거든요 아니 유치원 애들이...

여러분 인간은 나면서부터 거짓말을 하는 존재에요  애기들이요 울고 싶지 않은데도 밥을 먹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면 가짜 울음을 웁니다 인간은 나면서 부터 거짓을 달고 태어나는 거에요 울 일이 없는데 밥을 먹어야 되 혹은 기저귀를 갈아야 되는데 우리 엄마가 저렇게 드라마에 빠져서 나를 보지도 않는구나 울어 그게 거짓이에요 이게 거짓말이거든요 인간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뭘 얻어내기 위해서 나면서 부터 거짓을 하는 저지르는 존재라구요 이게 뭐가 선한 존재입니까  나면서부터 악한 존재가 죽는 날까지 죄만 내 놓다가 하느님의 은혜가 없이는... 어떤 피조물도 존재일 수 없구나 가치일 수 없는 거구나 배우고 가는 거에요 

그 중에 하느님이 내 백성들은 당신이 택하여 그냥 요렇게 당신의 은혜로 싹 옮겨 놓는 거에요 하느님 나라에 그걸 인정하고 가면 되요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를 하느님의 영광과 그 분의 하실 일을 드러내기 위해 맡긴 역할들이 있잖아요 역할이 맡겨지면 그 역할대로 수행하다 가면 되는거지 내가 거기에서 자꾸 드러나선 안된다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버림받는 경험을 하지 못하면 하느님께 버림받는게 어떤 것이다라는걸 경험하지 못하면왜 그분이 내 삶에 필요한가를 몰라요 그래서 여러분은 때때로 하느님이 여러분을 버리셨다라는 그 지경에 처해 져야 되요 그리고 거기에서 땀이 피가 되는 듯한 고통을 느끼셔야 되요 그래야 하느님 없으면 안되는구나를 알죠 그런데 저마다 그냥 자기의 어떤 어줍지 않은 종교행위들을 내놓고.. 자기가 예수 믿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힘든거죠 

어려운 거에요  나라는 존재는 내 유익앞에서 변화되고 움직여요 유동적이에요 나는 근데 이 나라는 존재가 이미 유동적이고 이렇게 갈팡질팡 하고 있는데 얘가 어떻게 한 방향으로 변화되고 성숙되어 질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합니까 말도 안되는 거에요  여러분은 안변한다니깐요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가 좀더 많이 나오느냐 들 나오는냐 거기에 달린 거에요 

수많은 위인들이 그렇게 착해 보이는 사람들이 그렇게 실수를 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런 모습들을 하느님이 우리에게 특히 성경안에서 많이 보여주는건 하느님의 그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도드라지게 오롯이 보여주기 위함이란 말입니다 다윗같은 사람도 뭐 하느님 마음에 합한 자가 아니 우리가 생각하기엔 참 말도 안되는 살인교사까지 그래놓고도 자기가 무슨 죄를 졌는지도 모르는 그 상태에 있는데 많은 이들이 다윗을 칭찬하고 그의 삶을 동경했다구요 롤모델로 삼았다구요 어떻게 자기를 죽일려고 수 많은 군대를 동원해서 쫓아오는 사람을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는데 어떻게 안죽이냐구요 여러분 부하들이 그걸 봤을때 다윗을 얼마나 존경했겠습니까 이걸 살려주면 자기가 언제 그 칼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데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겠다고 하느님이 기름부음 받은 부은자는 내가 못죽이겠다고 갔다 말입니다 옷만 살짝 베고 멋지죠 영웅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도 안을 요렇게 싹 베어서 뒤집어 보니까 시커먼 썩은 고기로 가득차 있더라는 것이죠 하느님이 그거 들추어 내시는 거에요 모든 인간은 무죄한 자의 죽음으로 밖에 구원받을 수 없다 를 보여주는게 그거에요 

왜 모세를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보내면서 왜 모세를 하느님이 죽일라 그랬는줄 아세요 아 내가 그렇게 설득했는데도 계속 거부해  생각해보니까 더 열받아 죽겠다 라고 보내서 막 가는데 쫓아가서 막 죽일라 그러는 거에요? 가라 그랬더니 모세가 안간다 그러니까 그래도 가야 된다고 ....아이 그래 알았어요 갈게요 갔는데 쫓아가서 죽일라 그러잖아요 아이 하느님이 삐졌나 갑자기, 모세가 누군가에게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서 그들을 건져내는 역할로 부름을 받았어도 그가 뭐가 잘나서 선택된게 아니라 그 조차도 할례 하느님이 스스로 쪼개지는 그 하느님의 언약 창세전 언약이 그거잖아요 그리스도의 피로 인간이 의로워지는거 에페소서 1그 은혜의 구원 받지 않으면 너도 죽을 놈이다 라는걸 먼저 가르쳐 주고 보내는 거에요 그래서 피남편이라고 하는 거에요 

보세요 이 세상에 바오로같은 사람 봤어요? 아니 점도 없고 흠도 없다는 자기는 자부하면서 사는 인간이 어떤 존재가 무죄한 존재가 죽어가는데 그 옷을 맡아갖고 있었잖아요 스테파노가 죽을 때, 그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겁니까도덕과 윤리로 무장하여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들에게도 이 비판의 소리를 한번도 들어보지도 않는 사람을 쪽 쪼개보니까 살인자라고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죽일 수 있다는 것이죠 죽는 날까지 그럴거에요 그러니까 마지막에 사도 바오로가 난 죄인 중에 죄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악마를 그려낼 수 없어요 ...신앙안에서 이 성경안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은  인간속에 있는 악마를 절대 그려낼 수 없어요 악마는 그정도가 아닙니다 사람 몇명 죽이고 그거 고기 뜯어 먹고 그 정도가 인간의 악마성이라고 안해요 우리 안에 그거보다 더 악한 것이 들어있다니깐요 지금도 그래서 때때로 우리가 그거 폭로당하면서 하느님 앞에 하느님 은혜를 부어주세요 하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수시로 그러면 되요 

인간이 수줍어 하고 부끄러워하는것도 다 죄입니다 뭐에요 나는 이정도인데 당신들이 내가 이런 행위를 함으로 말미암아 나를 이 정도로 안봐줄까봐 수줍음이라는게 생기는 거거든요  그 부끄러운게 그런거 아니에요아니 그런 여기 와서 사람들과 친해져갖고 거기에서 행복 얻을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과의 그 관계 속에서 기쁘고 평강한 것을 얻을려고 해야지 왜 내가 이 속에서 좀 더 두드러지고 돋보이기를 원하냐구요 

그런거 아닌거에요  계속 죽어야 되요 여러분 계속 죽다가 결국 진짜 죽음이 뭔지 우리가 알게 되는날 우리는 가는 거에요 우리는 아직 죽음조차도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존재들이에요 함부로 죽고 싶다 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건 진짜 죽음 아니라니까요 

진짜 죽음을 죽으신 분은 예수 밖에 없어요  그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덮쳐서 우리를 살려내는 거에요 그냥 살아계세요 하느님이 그냥 무슨 뜻이 있어서 이렇게 살려 놓으셨겠지하고 그냥 살아계시면 하느님이 알아서 하느님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거에요 그 동안에 여러분 겪어야 할 것들 다 겪게 하시고 고통총량의 법칙이라고 아세요? 모든 인간의 고통의 총량은 동일하다 

어떤 교수님이 지랄총량의 법칙이라는 책을 써갖고 제가 그걸 보다가 아 고통총량의 법칙 이게 우리 교회에 딱 맞는 말이구나 지랄총량의 법칙이 뭐냐하면 자기 딸내미를 키우다 보니까 애가 이제 사춘기가 되면서 너무 지랄을 떨어서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아하 어떤 애는 이렇게 사춘기때 지랄을 다 떨고 어떤 사람들은 많이 늙어서 지랄을 떨고 그런데 합쳐보니까 지랄의 총량은 같더라는 거죠 그래서 지랄총량의 법칙이란 책을 썼더라구요 

마찬가지로 고통총량의 법칙 모든 인간은요 똑같은 고통 ...그 겪어야 할 분량의 고통을 다 겪게 되어 있어요 돈 많은 사람들은요 돈이 많은데로 그 고통이 우리가 볼때 무슨 걱정이 있을까 하지만 있어요 그 안에 그런데 고걸 합쳐보면 내가 없는 가운데서 망한 가운데서 당하는 고통과 똑같은 거에요 그걸 자꾸 내가 선악의 구조로 내가 판단을 해갖고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내가 이 세상에 제일 불행한 사람처럼 보이는 거야 아닙니다 잘 견디시고 이기시면은 좋은 날이 옵니다 기다리세요 그 날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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