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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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단상: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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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174.52.193.*]

2016-12-24 ㅣ No.11336

 

 단  상

 

 소설 「흑야」의 주인공은

수용소에 갇힌 어린 천사 같은 아이가 빵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하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교수형이란 자기 몸의 중력으로 숨통을 죄어 죽도록 하는 처형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 어린아이는 몸무게가 너무 가벼워 자기 목을 졸라 질식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버둥거리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이의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주인공은 중얼거립니다. “하느님도 저기에서 죽어가고 있어.” 죽어가는 고통을 아이와 함께하고 있는 하느님은 적어도 방관자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또 엔도 슈사쿠의 베스트 셀라 소설 「침묵」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수많은 일본인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고문받고 ‘벌레처럼’ 죽어갈 때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하느님에 대해 혼란스러워합니다. “하느님은 왜 이렇게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당신을 증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냉담한 침묵으로 일관하신단 말인가?”

 로드리고 신부는 그동안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영웅적인 순교의 모습이 한낱 환상이었음을 깨닫고 마음이 더욱 흔들립니다.

 그러나 자신을 따르는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의 표시인 성화를 밟으려는 순간 이런 목소리를 듣습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때 로드리고 신부는 비로소 하느님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은 ‘너무 먼 당신’이 아닙니다. 이제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무관심하게 방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곁에 와서 인간의 고통에 같이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제 고통을 당하고 계신 하느님 입니다. 그래서 의롭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의 뜻을 본받고 있는 사람 입니다. 지금까지 고통은 회피해야 할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더 적극적으로 바뀌어, 고통은 하느님과 친교를 맺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과 같이 여겨집니다.
  이렇게 인간의 아픔에 동참하시는 하느님, 인간의 고통에 같이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고통당하는 우리 인간에게 많은 위안을 줍니다.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너절한 말을 늘어놓는 대신, 손 붙잡으며 같이 울어줄 친구만 있어도 얼마나 마음의 고통을 덜 수 있는가! 하물며 하느님이 자신과 같은 고통을 나누며 눈물 흘리고 계신다면, 얼마나 자신에게 닥친 고통의 의미를 새롭게 볼 수 있을까? 때문에 고통을 부인하는(No!) 대신 고통의 현실을 인정하고(Yes!) 고통에 새로운 의미(New Meaning)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등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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