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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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수의 난> 시사회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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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연 [wjyhs2] 쪽지 캡슐

1999-06-09 ㅣ No.214

우연한 기회에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한다는 이유로 영화 <이재수의 난> 시사회(6/3/신사동 시네마천국)에 갈 수 있었다. 6월 말 경에 개봉될 예정이라는 이 영화는 그 주된 소재가 100년전 한국 가톨릭 교회의 문제점을 핵심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가톨릭 신자인 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또 일간지 등 세간에 30억원이 넘 는 제작비랑 투여된 기간, 인력 및 주인공 남녀의 열성적인 연기 등으로 해서 화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 사이트에서 한번 쯤 다루어 봄직한 듯하다. 우선 본인이 생각하기로 이 영화는 그 제작자인 박광수 감독이 내 세우고 있는 바,"주인공 이재수로 대표되는 민초(민중)의 힘"이 할리우드의 거작을 능가한다는 희망적 선전과는 달리, 자칫하면 소영웅적 폭력주의와 이로 인한 관객의 군중심리에 편승하여 '집단살인' 이라는 인권의 심각한 유린을 합리화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고 유홍렬(로렌죠) 서울대 교수의 저서인 <증보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1901년 제주도민에게 같은 도내의 천주교인 약 300-700명이 희생된(집단 살해된) 이 사건은 '신축교난' 또는 '제주민란', '제주교안' 등으로 불리어지고 있는데, 그 주된 원인은 본 영화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민중의 고혈을 빨던 봉건 왕조의 절대권력의 말단기구였던 봉세관에게 협조하여 제주도민들에게 각종 명목의 잡세 징수를 강요하고 '양대인'으로 표현되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권위에 의지하여 각종 사회적 폐단을 야기하고 있던 일부 잘못된 천주교 신자들의 옳지 못한 행실이 제주도민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는 당시 제주도를 비롯한 한국의 연근해에 침투하여 이른바 싹쓸이 불법어로에 종사하고 있던 일본인 어부들의 충돌질(예를 들면 일본인 어부 '아라가와'는 이재수 등에게 천주교 선교사들을 살해하라고 했음)과 이들 일본인 어부에게서 총기와 화약류를 대량으로 구매하여 봉기에 사용한 점 등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가볍게 처리되어 조선을 침탈하여 결국 식민지로 만들어간 개항기 일제의 심각한 경제적 침탈과정은 너무나 가볍게 처리되어 버렸다. 사실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되어 1904년까지 자주외교에 입각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해나갈 수 있었던 것도 프랑스, 러시아 등 일제를 견제하는 다른 서구 열강들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당시 교회측의 기록인 <뮈텔주교일기>에 의하면 고종 황제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극진히 대접하면서 한반도에서 프랑스가 일본의 전횡을 견제해줄 것을 직, 간접으로 바라고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선교사를 나와 같이 대하라"는 고종의 표현은 바로 이같은 정치적 실리주의에 입각한 정책이었고, 실재로 프랑스 선교사들은 곳곳에서 일제의 관헌과 군대, 상인들의 침략적 횡포에 맞서 싸우며 천주교 신자들로 대표되는 조선 민중의 권익을 옹호해주려는 노력을 벌여가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1901년 제주도 민란을 대외관계사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사건은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도전이었고, 결국 그 희생물로 조선 민중이 선택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우리가 비록 신자라고 해서 굳이 당시 천주교 선교사들의 모든 행위를 옹호할 필요는 없다고 보지만 조선 민중의 입장에 서서 일제 침략을 일정 정도 견제해주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역활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영화 <이재수의 난>에서는 이 부분이 전혀 드러 나지 않고 있다. 제주도 어민들의 지탄과 원망의 대상이었던 일본인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고 엉뚱하게 일본도가 등장하여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느낌마저 준다. 또 한가지 이 영화에서는 이재수로 대표되는 민란의 과격파 행동대원들의 입장만을 미화 내지는 옹호하고 있으나, 실제 당시 이 민란의 주도층은 대정군수 채귀석과 그곳의 유림 오대현 형제 등이었는데, 이들은 가능한 평화적 방법으로 봉세관의 수탈을 방지할 근본적인 대책과 일부 천주교인들의 횡포를 막는데 주안점을 두면서 최대한 인명 살상을 피했음이, 당시 채귀석을 통해 이 민란의 실상을 소상하게 기록한 김윤식의 <속음청사>에 여러 번 거듭 나타난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1901년의 제주민란을 순수한 민중운동사적인 관점에서 조망한다면, 채귀석, 오대현 등의 민중운동(오늘날의 시민운동)을 높이 평가하여 줄 수는 있으나, 운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무자비한 인명살상의 앞잡이 이재수에 포인트를 맞추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진다. 이재수의 전투행위는 오늘날도, 당시도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군중심리를 이용한 소영웅주의자의 난폭한 행동에 불과 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당시 부패한 사회구조에 의해 민중들이 고통받는 부분이 과감히 삭제되어 있고 (겨우 몇마디 이야기에 축약되어 있고),민중들의 전투장면도 과감하게 축소되어 있다. 또한 대다수 선량한 천주교 신자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장면도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자칫하면 폭력과 파괴에 본능적으로 익숙해져 버린 우리의 젊은 세대들을 호도하여 파괴적 행위를 더욱 일삼게 하고, 천주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어 요즈음 한창 전개되고 있는 선교운동에 뜻하지 않는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시사회에 참석한 일부 지식인은 "감독이 천주교측 눈치를 너무 보느라 영화를 망쳐버렸다"고 평가할 정도로 비신자의 측면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교회측을 옹호하는 듯한 느낌도 주지만, 앞에서 지적한 <일본 제국주의 문제에 대한 경솔한 취급> 이라든가 폭력주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한계점을 명확하게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증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재수가 제주성에 입성할 때 머리에 모자를 쓰고 안경(일종의 썬글라스)을 썼다는 <속음청사>의 기록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전혀 이런 분장이 아니었다는 점과, 천주교 신부님들이 미사를 봉행할 때 신자들에게 돌아서서 의식을 진행시키는 점 (*필자가 알기로는 오늘날과 같은 이런 의례는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일로 알고 있음) 등은 상당한 문제가 있는 장면이 아닌가 여겨진다. 수많은 제작비와 인력을 동원하여 넓고 아름다운 제주의 산록을 그 배경으로 한 이 영화의 좋은 이미지는 주인공 이재수의 무모한 자해행위(가슴에 칼로 피를 내는 일)과 함께 어울려 묘한 착잡함과 아쉬움을 남겨주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난 후 나는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1901년 당시 한국 천주교회가 전반적으로 몇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음은 분명하며, 그 결과 일부 몰지각한 신자들의 패륜적 범법행위가 대다수 민중들에게 가톨릭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었고, 따라서 소위 <이재수의 난>으로 표현되는 1901년의 민란에서 많게는 700여명(최근 연구는 이의 약 절반 정도만 확인되고 있음)의 희생자가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제주도민이 반대하여 싸웠던 대상은 부패한 봉건권력과 결탁한 일부 타락한 천주교 신자들이었지, 대다수 선량한 신자들이나 그들이 몸담고 있는 천주교회 그 자체는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선교운동이 한참 진행되는 이 시점에 우리가 곰곰히 반추해야 할 점은 과연 무엇일까 ? "+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 아멘 **이 글과 관련하여 질문이 있다면 다음 주소로 연락 바랍니다. wjyhs2@snu.ac.kr 원재연 하상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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