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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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성직자들에 대한 신뢰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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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220.72.245.*]

2016-09-09 ㅣ No.11250

일단 언제 그만두던지 침묵 작전을 병행해보세요. 상처중에 그만 두면 더 큰 마의 교란으로 그것을 답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도피가 아닌 조정, 극복(초월)입니다. 용서는 ((무엇을) 위하여 주다.) 또는 줘 버리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 눈으로 예수님 입으로 성령의 은사로 바치는 성호경이 어렵다면 세 사람 입장에서 온 머리를 다하여 온 마음을 다하여 온 어깨의 힘을 다하여 일하는 모습 가운데 노동력 착취 등에 대하여도 회상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임할 수 있는 방안들로 무엇이 있을까요?

 

가끔은 교회와 세상 빈곤 공동체 가운데 누가 더 노동력 착취를 당할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다 그런것은 아니겠으나 성직자들 역시 세상을 경원시하는 무지가 보이기 마련인데 이것이 과연 하느님 눈인지 내 눈인지 섞갈릴 것입니다. 양자간 기획과 총무 분야 등을 보노라면 저걸 일이라고 하고 있을까?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집착과 군림으로 목에 힘주기 바쁠까?라며 도피에 담쌓기로 답습하는 나를 보기도 합니다. 

 

이때 노동력 착취 안 당해본 사람은 너살고 나살자의 공자론으로 대할 것이고 너살고 나죽자의 예수형 말씀 인색하기도 하겠지요. 필자의 경우는 40회가량 임과 비슷한 성무직을 지원하였으나 낙방을 거듭한 연후 이것저것 오랜 20여년 아마튜어 봉사활동을 접고 소위 프로 선포라 할 수 있는 금번 어떤일을 시작하고 있는데 세후 최저임금과 권리보다 의무 강조 서류들이 가관이더군요. 차비나 식대는 본인 부담이고 이나라 끼리끼리 허가맡은 도둑들의 행태가 가소롭기 그지 없지요. 이 또한 하느님보다 물질주의, 생명경시에 속은 군중들 문제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은 나라의 주인임을 이미 포기한 사람들이기에 그 나물의 그 밥 도둑들이 장애인 복지에 얼마나 개선을 할까요? 그저 공염불 타령일 뿐이지요. 이 모든 것이 내탓임을 보는것 중요합니다.

 

따라서 대중과 다른 심도있는 음악가처럼 임 또한 개성이 엿보이니 드리는 말씀인데 꿈의 단계 - 갈등의 단계 -조정, 극복의 단계로 진화되는 사랑(회심으로 진화하는 생명체)을 위해 기도해 나가십시오.

 

신앙은 결국 위로부터의 영성 정채성도 아니고 인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과 더불어 아래로부터의 영성과 또한 지금의 나를 극복함으로써의 이 뒷 날 하느님 나라로 날개 펴는 초월성이라 보여집니다. 내가 이러니 너도 이래야 해! 하는 위로부터의 영성이 자칫 연옥 정채성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언제 어디서나 흥분은 금물이라 사료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참으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만 줌으로써 받는 보너스라는 복락도 있기에 시나브로 나부터의 평화 전략에 골몰해 온 임의 아름다움을 조율해보자는 이야깁니다.

 

흥분에 따른 명약은 희생을 감내함입니다. 그것이 고통인지 기쁨인지 모를 장애인 부모들의 표정은 지극히 신비합니다. 고통과 기쁨 만나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머리 사랑 편식은 정보화 홍수시대의 일부 청년들보다 더 낙후되기 쉽상일 것입니다. 비복음자들이 평신자들 질타하는 것이나 평신자들이 성직자들 질타하는 것도 역지사지로 대처할 필요가 있을터, 용서는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는 상대보다 먼저 내가 바이러스 옮지 않거나 수시 치료로서 희생을 즐기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봉사력도 결국은 과부가 홀애비 마음 알아주듯 하느님 반드시 허락해주시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스스로 만족하는 품앗이도 이뤄질 것입니다. 그 품앗이 또한 하느님처럼 생명를 창조하지는 못하지만 성모님처럼 기르시는 농부가 하늘에 맡기고 길쌈을 메듯 그냥 조건없이 침묵으로 주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에 카더라 통신이 아닌 피 봉사자가 답례를 하던지 말던지 임 본연의 낙천성으로 대처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 일부 성직자들의 군림하는 태도는 성직자들에게 집착하는 신앙인들이 제일 큰 문제 제공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집착보다 직업병으로 신부님을 하인 다루듯 하고 어떤 사람은 남편보다 더 챙기다 못해 평신자들에게는 말 할 것도 없음입니다. 살다보면 그렇게 꼴보기 싫은 경우들도 일단 하느님 앞에 조건없이 생각을 내려놓는 훈련으로 력하시되 내 안의 죽은 침묵 되살아 날 때 대안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보고 대처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로써 과거와 미래에 도둑맞지 않는 나를 보고 문을 열고 나가면 됩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더 큰 어둠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도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열심히 사는 사람은 그럴 틈도 없어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최후의 심판은 왜 죄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했느냐?를 물으신다니 이에 대한 묵상도 좋고 어디를 가든 용기 잃지 마세요. 상처중에는 세세히 기억하면 충격받기 쉽상이니 지금처럼 신의 아버지 하느님께 대화(기도) 청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문제는 부부싸움 원칙이 왜 절대로 화를 내지않고 상대 손을 잡으며 자기 의견을 조심스럽게 말하는가에 달린지 깨달아야 할 숙제가 따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법칙의 겉만 보고 남중 내편보다 이혼 청구율이 두 배 높기도 합니다. 어려운 숙제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몰라 하느님께 먼저 묻는 자세가 취약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동등한 자격을 갈망하는 장애인들에게도 먼저 묻는 자세는 필수입니다. 따라서 침묵으로 신의 아버지 신부와 하느님 관계를 하느님께 지금처럼 즐겨 묻는것도 한 방법이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처럼 음악처럼 인생을 꿈꿉니다.

그 꿈을 현실화하고 싶다면 시처럼 함축하거나 음악처럼 3단 기어 전략으로 가속을 내는것이 어떨까 합니다.

 

1. 비움 전략으로 박자가 따라오게(허무 전략)

2. 채움 전략으로 가까운 불행한 사람 끌어안기(밀당 전략) 음정이 따라옵니다.

3. 나눔 전략(외공이 아닌 내공으로 쏘거나 날개 접기)으로 발성이 수월해집니다.

 

그리하여 가수들의 흉성 비성 두성 삼위일체 음을 보기도 합니다.

따라서 머리 가슴 소통의 임의 글 또한 박수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너와 나는 가수들보다 더 아름답고 투명한 사랑의 기쁨 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미사 입당시 제대를 먼저 바라보고 그렇게 준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더욱 그것을 멋지고 안의 해로서 맜있게 조율하여 나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이라는 어려운 대상과 결혼한 성직자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세상이라는 어려운 안의 해(아내)와 결혼한 성직자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어차피 죽기전 스스로 청문회에 끌려나갈 요량이라면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위해 기도함이 상책일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라는 어려운 대상과 결혼한 남중 내편(남편)과 하나로써 미사 임하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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