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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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취임미사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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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사목국 [papangelus] 쪽지 캡슐

2005-04-26 ㅣ No.43

교황 베네딕도 16세 취임미사 강론.

베드로 광장 2005년 4월 24일 주일.

 

 

친애하는 추기경들과 주교, 사제,
각국 대표들과 외교사절,
형제 자매 여러분!

  

    요 며칠 사이에 성인호칭성가(litanie)를 세 번이나 들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장례식과 추기경단의 Conclave가 시작 됐을 때와 오늘입니다. 우리는 ‘Tu illum adjuva'(주님 그를 도우소서!)라는 청원을 새롭게 붙여서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성 베드로의 새 후계자를 도와 달라는 의미입니다. 이 성가가 울리는 동안 저는 특별한 위안을 느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떠난 후 우리는 얼마나 좌절해 있었습니까!  그분은 26년 동안 우리의 목자였고, 현세의 인도자였습니다. 그분은 새로운 삶에로 곧,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이 길을 혼자서 이루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믿는 이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혼자가 아닙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온 세대에 거쳐 계시는 성인들을 기억합니다- 신앙안에서 그분의 친구, 형제들이신 그들은 저 너머 하느님 영광에까지 줄지어서 함께 할 것입니다. 그분의 하늘나라 당도는 기다려진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이미 그분이 성인들 가운데 계시고, 그곳이 진정 그분의 집임을 압니다. 우리는 주님이 선택하신 이가 누군지 뽑기 위하여 Conclave에 들어갈 때 다시 위안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115명의 주교가 서로 다른 문화 서로 다른 나라에서 와서 주께서 메고 푸는 사명을 주시고자 하는 이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구나. 우리는 하느님의 친구들로 둘러싸여 이끌어지고 행하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 자신은 하느님의 연약한 종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직무를 받아야만 합니다. 이는 현실적으로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일을 할 능력을 갖출 수 있을까?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수많은 성인들,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 사이에 있었던 위대한 이름들을 불렀습니다. 덕분에 제안에 다시 이런 생각이 살아납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이 감당할 수 없는 짐을 혼자지지 않아도 된다. 그분의 거룩한 성인들의 무리가 나를 보호하실 것이고 나를 돕고, 나를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관대함과 여러분들의 사랑과 여러분들의 신앙 여러분들의 희망이 저와 함께 할 것입니다. 실제로, 앞서간 분들 중에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위대한 분들만 성인들의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성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가 주신 몸과 피로 살고 있는 우리, 주님께서 주신 몸과 피를 통해 당신을 닮아가고 변화되길 원하신 우리가 거룩한 공동체 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살아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기의 기적적인 체험입니다. 교회는 젊습니다. 교회는 그 안에 세상의 미래를 담고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우리 각자에게 미래로 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봅니다: 우리는 부활을 당신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그 기쁨을 체험합니다.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므로, 그분께서 부활하셨으므로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부활절 전후로 성하의 얼굴에 고통이 비칠때 우리는 그리스도 수난의 신비를 관상하고 그분의 상처를 만져보았습니다. 뿐 아니라 지금 우리는 심오한 모습으로 부활을 만져(in un senso profondo, toccare il Risorto)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잠깐의 암흑이 지나간 뒤에 부활의 열매인 약속하신 기쁨을 체험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살아있습니다. -친애하는 추기경님들과 주교님들, 신부님들과 부제님들, 사목자들과 교리교사들 여기 모이신 여러분 모두에게 저는 큰 기쁨과 깊은 감사로 인사드립니다. 하느님의 변화시키시는 현존의 증거자인 수녀님들과 수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광활한 세상과 삶의 자리들에서 하느님 나라 건설에 애쓰는 모든 평신도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저는 세례성사로 다시 났지만 아직 우리와 충만한 친교에 있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도 애정 어린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유다교 여러분, 여러분들과 우리는 하느님의 취하할 수 없는 약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공동의 영적인 선조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끝으로, 저의 생각은 마치 퍼져가는 물결처럼 우리시대의 모든 사람들, 믿는 이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뻗어갑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지금 저는 직무계획(un programma di governo)을 제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지난 수요일 강론 때에 무엇을 저의 임무로 생각하는지에 대한 것을 일부 밝힐 기회를 가졌었고, 다른 기회들도 앞으로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진정한 직무 계획은 저의 뜻을 행하는 것이나 저의 생각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고, 온 교회와 함께, 주님의 말씀과 의지에 귀 기울이는 것, 그분이 저를 이끄시도록 해드리는 것, 그래서 그분 스스로 이 시대의 교회를 이끄시도록 해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대신,다만 저는 전례에서 베드로의 직무의 시작을 알리는 두개의 상징을 설명하고 싶습니다. 사실은 오늘 봉독된 독서 안에 이 둘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 상징은 제 어깨 위에 놓여진 순 양모로 짜여진 Pallium입니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상징입니다. 로마의 주교들은 4세기 말부터 이것을 그리스도의 멍에의 이미지로 여겼고, 로마의 주교, 하느님 종들의 종은 자신의 어깨위에 이것을 둘렀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내게 있어서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의 자유를 앗아가는 외적인 무게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아는 것, 어느것이 생명의 길인지 아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의 기쁨이었고, 이것이 그들의 큰 특전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를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때로 고통스러운 방법으로-우리를 정화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우리 자신이 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과 온 역사의 구원을 위해서 봉사합니다. 실제로 빨리움의 상징은 더 구체적입니다: 어린 양의 털은 길 잃은 양, 약하고 병든 양을 상징합니다. 목자는 자기 어깨위에 어린양을 메고 생명의 샘에로 데려갑니다. 잃어버린 어린 양을 목자가 사막에서 찾아다니는 비유는 교부들에게 있어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신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인류-우리 모두-는 사막에서 더 이상 자기 길을 찾지 못하는 길 잃은 양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이것을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인류를 이 비참한 상황에 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먼저 천상의 영광을 버리시고 양을 찾으러, 살리려,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은 양을 어깨에 매고, 우리 인류를 이끄시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를 돌려줍니다. 그분은 좋은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빨리움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리 서로를 짊어지기를 초대합니다. 이처럼 빨리움은 제2독서와 복음이 말하는 목자의 사명을 상징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걱정은 모든 사목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남습니다: 그분은 많은 사람들이 사막에 살고 있다는 것에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사막이 있습니다. 가난의 사막, 배고픔과 목마름의 사막; 버려짐의 사막, 고독의 사막, 파괴된 사랑의 사막.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사막, 텅 빈 영혼으로 인간의 길을 걷는 자신의 존엄성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막이 있습니다. 우리 세계에는 외적인 사막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내적인 사막이 아주 커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의 보물들은 더 이상 하느님의 정원을 꾸미는데 쓰이지 못합니다. 그 안에 모두가 살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정원은 착취와 파괴의 힘에 지배당하고 말았습니다. 온 교회와 그 안의 모든 사목자들은 그리스도처럼 사람들을 사막에서 이끌어내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땅으로 가는 길, 하느님의 아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충만한 생명을 주는 그분과 우정을 맺으러 가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상징은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왕들은 자기 자신을 백성의 목자로 지칭하는 예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굉장히 신랄한 상징입니다: 백성들은 왕에게 마치 양과 같아서 목자는 자신이 원하는 데로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편 인류의 목자, 살아계신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양의 편에 서셨습니다. 그분은 양들에게 멸시당하고 죽임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목자의 표시입니다:<나는 착한 목자이다...나는 내 양들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친다>>(요한 10,14이하). 구원은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징표입니다: 그분 자신이 사랑이십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주께서 더 강력하게 당신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였으며, 강하게 치셔서 악을 쓰러뜨리고, 세상을 더 낫게 만드시기를 원하였습니까! 모든 힘의 이데올로기는 스스로를 그렇게 합리화시키고, 인류의 발전과 해방에 반대되는 것에 대해 파괴하는 것을 합리화 시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인내로우심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분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린 양이 되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십자가에 희생된 이로 인해 구원되는 것이지, 십자가에 매달은 이로 인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il mondo viene salvato dal Crocifisso e non dai crocifissori) 세상은 하느님의 인내로 구원되었으나, 인간의 조급함으로 파괴됩니다.(Il mondo  è redento dalla pazienza di Dio e distrutto dall'impazienza degli uomini)

 

   

    목자의 근본적 특성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듯이 그분을 따라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양들의 목자가 되라.>>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리고 지금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목자가 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고통당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양들에게 참으로 좋은 것을 주는것, 거룩한 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과 현존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진리의 양식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제 여러분-지금 저는 다만 제가 항상 주님을 더 잘 사랑할줄 알게 되도록  당신의 양떼를 항상 더 잘 사랑할 줄 알게 되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당부 드립니다. - 여러분 여러분 각자 개인적으로 그리고 여러분 전체가 모여서 거룩한 교회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제가 두려움으로 늑대들 앞에서 도망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또 우리가 서로를 이끌 줄 알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오늘 전례에서 베드로의 직무를 시작하는 것을 드러내는 두 번째 표지는 어부의 반지(anello del pescatore)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은 이야기에 이어 목자가 되도록 베드로가 받은 부르심을 우리는 복음에서 들었습니다: 그물을 쳤지만 아무 것도 못 잡은 그날, 제자들은 밤이 다지나갈 무렵 물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돌아가서 그물을 다시 한번 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물은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가득 차게 됩니다.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잡혔습니다;<<이렇게 많았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습니다.>>(요한 21,11). 이 사건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지상에서 함께한 여정의 마지막 무렵에 있었던 일이면서 동시에 제자들과 처음 시작할 때의 이야기와 상통합니다: (그때도) 제자들은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했었습니다; 예수는 시몬에게 다시한번 더 넓은 데로 나가라고 부릅니다. 그때 시몬은, 아직 베드로라 불리지 않았었는데, 놀랍게 대답합니다: 선생님께서 명하신다면 그물을 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파견의 확증이 있습니다:<<두려워 말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까 5,1-11). 오늘도 계속해서 교회와 사도들의 후계자들은 역사의 대해에 크게 자리를 잡고 그물을 던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하느님께로, 그리스도께로, 참 생명에로 승복시킬 것을 요청 받습니다. 교부들은 이 하나의 사명에 특별한 주석을 달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에 살도록 창조된 물고기를 물에서 나오도록 하는 것은 죽음을 맞게 합니다. 생명에 직결된 요소를 빼앗겨 버리고 인간을 위한 양식으로 쓰여집니다. 하지만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우리 인간은  고통과 죽음의 소금이 가득한 바다; 빛이라곤 찾을수 없는 깜깜한 바다에서 소외된 채 살아갑니다. 복음의 그물은 죽음의 물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빛이신 하느님의 광채, 참 생명 안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사람을 낚는 사명은 그리스도를 따라 모든 소외의 짠 바다 밖으로 사람들을 끌어내어 생명의 땅, 하느님의 빛에로 그들을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느님을 뵐 때만 진정한 삶이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날 때만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 압니다. 우리는 진화로 인한 우연한 산물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사려 깊은 열매들입니다. 우리 각자는 그분이 원하셨고, 사랑하셨고,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와의 만남보다 복음에 경탄함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그분을 알고 그분과의 우정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목자의 직무, 사람 낚는 어부의 직무는 자주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름답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들어오시고자 원하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한가지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목자의 상징과 어부의 상징은 아주 분명하게 일치에로의 소명을 드러냅니다. <<내게는 아직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 역시 이끌어야 합니다. 그들은 내 목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하나의 양떼 하나의 목자가 있을 것입니다.>>(요한 10,16), 예수께서 선한 목자 이야기의 마지막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153마리의 큰 물고기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기쁨에 찬 말로 끝맺습니다:<<그렇게 많았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다>>(요한 21,11). 그러나, 사랑하올 주님, 오늘날 그 그물은 찢어졌습니다. 우리는 슬픔을 안고 삼가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당신의 약속이 있기에 기뻐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약속하신 일치를 향한 길을 달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기도 속에 구걸하는 이와 같이 기억 합니다: 예 주님, 당신께서 하신 약속을 기억하소서. 우리가 단 하나의 목자, 하나의 양떼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그물이 찢어지도록 두지마시고 우리가 일치의 봉사자가 되도록 도와 주소서.

 

 

   지금, 저는 1978년 10월 22일 기억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이곳, 베드로 광장에서 당신의 사도직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아직까지 제 귀에 생생합니다: <<두려워 하지마라, 그리스도께로 문들을 크게 열어라>>(Non abbiate paura, aprite anzi spalancate le porte a Cristo!). 교황께서는 문들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세상의 권력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권력의 한 부분을 빼앗을까봐 겁을 먹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분을 들어가시도록 허락한다면 그들은 신앙의 자유 인정한다면. 그렇습니다. 그분은 분명 어떤 부분 즉, 부패의 지배와 법의 왜곡, 자의적 (해석)을 치우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과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교황께서는 또한 모든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우리는 두렵지 않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도록 한다면, 만일 우리가 그분께 우리자신을 완전히 개방한다면-우리 삶의 한 부분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지 않나?  우리는 어떤 큰 것, 유일하고 삶을 아름답게 해줄 그 어떤 것을 잃어버릴까봐 두렵지 않나? 자유를 빼앗기고 고뇌 속에 빠질 위험이 있지 않나? 교황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도록 허락하는 이는 아무것도 잃지 않습니다. 삶을 자유롭고, 아름답고, 위대하게 하는 아무것도 잃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오직 그 우정 안에서만이 삶의 문들이 활짝 열립니다. 그 우정 안에서 만이 인간적 조건의 위대한 가능성들이 활짝 열립니다. 이 우정 안에서만이 우리는 아름답고 자유로운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저도 커다란 힘과 강한 확신으로 개인적 삶의 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이 여러분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아무것도 빼앗지 않고, 모든 것을 주십시오. 그분께 자신을 내 맡기는 이는 백배로 받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십시오. 그리스도께 문들을 활짝 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참 생명을 찾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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