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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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36.38.239.*]

2021-04-21 ㅣ No.12487

피조물인 사람이 하느님을 죽이다니, 구원의 방법이 너무 과격한 거 아닌가? 


포도밭 주인은 아들을 보내면서 생각합니다. 소작농들이 내 아들은 존중해 주겠지 하고요. 하지만 하느님은 아드님을 희생 제물로 삼아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저는 여기서 의문에 빠집니다. 하느님은 왜 인간들의 손에 예수님을 죽게 하셨을까? 인간들의 손에 (우리의 손에)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죽게 만드셨을까? 그런 우리에게 너무 극약 처방이 아닌가 하고요. 

 

그게 정말 하느님의 사랑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세상 어느 부모가 다른 자녀를 위해서 한 자녀를 희생할까 하는 생각이오. 다른 자녀에게도 한 자녀에게도 그게 사랑이 될 수 있나요? 제 생각이 너무 인간적인가요? 

 

사람들은 계속 "우리를 위하여 외아드님까지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얘기하는데 저는 "그 외아드님을 인간인 우리 손으로 죽게 하시고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구원을 받도록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을 죽게 만들다니 ... 피조물인 사람이 하느님을 죽이게 되다니 ... 구원의 방법이 너무 과격한 거 아니가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먼저 이사야서 42장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49장 둘째 노래, 50장 셋째 노래, 52장 넷째 노래를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은 창세기 3장 15절 원복음에 나와 있는 내용은 이미 아실 것이고, 이사야서 7장 14절의 임마누엘의 표징에 관해서도 아실 것입니다. 아무튼 구약 성경 곳곳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에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시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이라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왜 그 방법을 택하셨을까요? 성자께서도 끝내 당신이 어떻게 되실 거라는 걸 아시면서도 스스로 오시겠다고 선택하셨을까요?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죽는 건 누구나 어쩔 수 없이 죽습니다. 수명이 다해서 어쩔 수 없이 죽든, 사고로 어쩔 수 없이 죽든 사람은 다 그렇게 죽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지 않으면 그를 살릴 수 없을 경우,

 

정말 그 경우에 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사랑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십자가의 길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드러났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사랑을 이해하시려면 구약성경의 대속 제물에 관해서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에 보시면 사람이 어떤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속죄하려면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 제물은 반드시 흠이 없어야 하고요.

 

그래서 우리 죄를 사해 주시려면 흠 없으신 분이 필요하기에 참으로 흠 없으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삶인지 말씀과 행동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빛이신 그 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지요. 그리고 결국 포도밭 소작농들이 주인의 아들을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듯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죽였지요. 

 

그러나 성경의 말씀대로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마태 21,42) 곧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일 뿐이지만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지요. 

 

아무튼 죄인들이 죄 없으신 분을 죽여 십자가에 매달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드님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상의 죽음을 선택하신 것을 그것을 의롭게 봐 주시고 그 덕분에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으심이 어쩔 수 없는 죽음이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셨기에 그렇게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으실 수도 있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 나와 있듯이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6-7 참조)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실 때에 당신의 가르침 대로 사셨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어땠는가? 결국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다가 사람들의 손에 죽음을 맞았지만 그 죽으심을 귀하고 높이 보사 다시 살리셨으니 그것이 주님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주님의 가르침 대로 살다가 비록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아 순교를 한다면 바로 순교자가 되어 성인품에 오르시지 않는지요? 하느님께서는  외아드님을 세상 사람의 제물이 되어 죽으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보내셨는데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외아드님을 죽일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보내셨고, 그걸 아셨음에도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렇게 사셨기에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으심을 보고 백인대장이 외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마르 16,39)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가르치심 대로 사시다가 그렇게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것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의 부활로 예수님께서 사셨던 방식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이라는 걸 증명하셨다는 점입니다. 내용이 두서없어 이해에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이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랑 덕분에 모든 죄를 용서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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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속제물,구원,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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