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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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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9-08-24 ㅣ No.131959

 


2019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제1독서 묵시 21,9ㄴ-14

천사가 나에게

9 말하였습니다.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10 이어서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3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복음 요한 1,45-51

그때에 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지나친 욕심은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널리 퍼져 있는

 불만족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욕심은 불만족을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 놓습니다.

 어떤 형제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주식 투자를 해서

큰 이득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는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도 빌딩

하나씩이라도 마련해주려면

더 공격적으로 투자해야 할 것 같았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는 아주 최악이었지요.

주가의 폭락으로 오히려

큰 빚까지 떠안게 된 것입니다.
이 상황을 형제님께서는 만족해할까요?

아니지요. 최고로 불만족한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폭락한 주식의 회사가 미웠고,

주식시장을 움직인다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미웠고, 이런 상황을 국가가

만든 것 같아 미웠습니다.

계속해서 불만족한 대상이

그의 곁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누구는 “많이 벌었을 때 멈췄어야지

누구를 탓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욕심의 끝이

과연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지 않는 한 계속되는 것이

욕심일 것입니다. 자기라는 틀에

매여 있으면 절대로 욕심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은 자기를 벗어나

새로운 것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지금 이 순간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은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나타나엘은 자기 형 필립보와

 마찬가지로 예언서에 정통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언서 어디에도 '

나자렛이라는 지명도 나오지 않으며,

따라서 그곳에서 특별한 인물이

나온다는 구절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지식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필립보의 “와서 보시오”라는 말을

따랐다는 사실에서 그의 열려있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형님의 제안이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비록

예언서에 나오지 않는 나자렛

출신이지만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예수님께로 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믿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나타나엘을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사실 당시 이러한 선입견에

쌓여 있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바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 밖의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 세상의 기준 안에 갇혀 사는,

그래서 끊임없는 불만족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 열린 마음으로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을 통해서만 진정한 만족의 길,

바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미래는 자신이 가진 꿈의

아름다움을 믿는 자의 것이다.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사도 성 바르톨로메오의 순교)


상대방의 공간 인정하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시는

 분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많은 공간을

허용해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입니다.

 문제는 상대방 역시 행복해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나의 공간만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공간으로 들어와.

내 공간이 얼마나 행복한데?”
자신에게 행복한 공간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남에게는 가장 불편한

공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부부 안에서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웃과의 모든 만남에서

 해당하는 말입니다.

싸움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은

나만의 행복 공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공간을 인정해주고

허용하는 것이 우리가 함께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늘 우리의 공간을 마련해주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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