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일 (일)
(자) 사순 제2주일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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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2월27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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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2-27 ㅣ No.188201

김건태 신부님_신앙인의 의로움

 

 

마태오 복음 5-7장은 흔히 ‘산상설교’라는 특별한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참 행복의 길을 걸어(5,3-12)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한 다음(5,13-16),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그 첫 말씀이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의로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율법 준수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인식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의로움은 ‘율법에 대한 성실성’을 가리켰으며, 이런 이유로 자신들을 ‘의인’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죄인 또는 무법자였으며, 상종을 꺼리던 대상이었습니다. 상종하는 순간, 자신들의 의로움이 오염되고 손상될 수 있다는 조바심, 의로움의 공동체에서 추출될 수 있다는 극도의 염려에서였습니다. 

이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은 의로움 판단의 척도로 여겨지던 이 율법에 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십계명의 제5계가 대상이 되고 있으나, 이어서 다른 계명들도 새 단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계명의 자구에 얽매인 나머지 잊혀온 그 근본정신과 함께, 율법에 대한 성실성 차원의 의로움을 뛰어넘어야 함을 일깨우십니다. 인간의 잘못된 행위가 있고 난 다음,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율법이 뒤따르는 것이기에, 잘못된 행위의 뿌리가 되는 인간의 마음이 의로울 때 비로소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살인이 결국 불목과 증오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그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하기 위하여 서로 화해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은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바보’와 ‘멍청이’? 사실 번역에 있어 어려움을 주는 경우 가운데 하나가 욕설을 옮기는 일입니다. ‘멍청이’는 ‘바보’보다 강도 높은 욕설이라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고, ‘멍청이’라는 욕설은 유다인 세계에서 ‘하느님도 모르는 놈’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어 매우 심한 욕설로 취급되었던 것 같습니다. 표현이 어떠하든, 살인의 뿌리가 되는 요소를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 올리는 예물조차도 이러한 화해의 마음이 없다면 가치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이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율법에 대한 성실성이라는 차원의 의로움을 뛰어넘어야, 곧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나아가 욕설을 퍼 붙는 못난 모습을 벗어나 그 근본정신에 성실해야, 비로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제생활을 시작하던 초기, 수원 지동 본당에서 보좌로 일하고 있었을 때, 수요일마다 관할 구역에 위치한 수원교도소를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하고 교리를 가르친 적이 있었습니다. 수인들을 만나 면담하면서, 이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이들 자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사회가 이들을 범법자로 만들었구나 하는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 일면식도 없는 타인 상해 또는 살해 소식을 접할 때마다,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가 더욱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일상화된 우리의 무관심, 그냥 내던진 차가운 말 한마디, 나아가 무시와 경멸의 몸짓 등, 이러한 우리의 모습들이 그들의 마음을 피폐화시켰고 결국 큰 잘못을 저질러 영어의 몸이 되게 했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따뜻한 말과 존경의 몸짓으로 다가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맑고 밝은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우 급진적이고도 근본적인 가르침을 주신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절). 주님께서는 단순히 율법의 외적인 준수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비롯된 사랑과 화해의 삶을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21절)는 계명을 넘어, 형제를 향한 분노, 업신여김, 모욕조차도 살인의 씨앗이라고 말씀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는 분노 자체를 뿌리째 뽑아버리신다. 살인은 분노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된다.”(In Matthaeum Hom. 16,6)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의로움이 단순히 행위의 외적 준수에 머무르지 않고, 내적 의도와 마음의 상태까지 포함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화해하여라.”(23-24절)고 하신다. 이는 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과 화해의 삶임을 분명히 하시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만일 네가 형제와 화해하지 않았다면, 네가 제단에 바치는 제물은 아무 소용이 없다. 화해는 제물보다 앞서야 한다. 왜냐하면 화해 자체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제물이기 때문이다.”(Sermo 229D,1) 교회도 전례 안에서 같은 정신을 이어왔다. 영성체 전 ‘평화의 인사’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우리가 화해의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복음적 요청을 반영하는 전례적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하신다. 교부들은 고발자를 양심, 혹은 성령으로 해석했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고발자는 바로 우리 안의 양심이다. 양심의 음성을 억누르지 말고, 지금 당장 그와 화해하라. 그렇지 않으면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고발할 것이다.”(In Matthaeum 14,2) 성령께서도 우리 안에서 죄를 고발하신다. 우리가 회개와 화해를 거부하면, 성령은 결국 최후의 날 우리를 심판대에 서게 할 것이다. 

 

교회는 이 복음 말씀을 화해 성사와 연결하여 전통적으로 해석해 왔다. 교리서는 “화해의 성사”가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와의 일치를 회복하는 것임을 가르친다(1424). 또한 성체성사에 참여하기 전에 죄를 고백하고 화해할 것을 강조한다(1385). 따라서 오늘 복음은 단순히 인간관계에서 화해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화해를 말한다. 

 

이병우 신부님_"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오늘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자!' 

 

오늘 복음(마태5,20ㄴ-26)은 '능가하는 의로움에 대한 말씀과 화해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생명과도 같은 율법 그 자체를 철저하게 지키고 준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은 '율법 규정이라는 문자에만 머물러 있고, 그 율법이 지향하는 율법의 본질인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함에 대한 지적'입니다. 

 

'미사를 했네, 기도를 했네. 말씀을 필사했네.'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미사와 기도와 말씀의 본질인 사랑으로 나아가야 하고, 지금 여기에서(삶의 자리에서) 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가르침의 본질'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능가하는 의로움의 의미'입니다. 

 

생각과 말로만 떠들어대는 그런 믿음과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인 사랑, 손과 발이 움직이는 몸으로 하는 사랑'을 원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5,23-24) 

 

"내가 정말로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18,23) 

 

진실되게 믿읍시다!

진실되게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시다!

진실되게 사랑합시다!

오늘도 가짜가 아닌 진짜 사랑을 합시다!

그래서 오늘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갑시다! 

 

송영진 신부님_<“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26).”

1) ‘성인전’을 읽다 보면, 성인들 사이에서도 다툼과 갈등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그런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오로가 바르나바에게, ‘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고을로 형제들을 찾아가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바르나바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도 같이 데려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팜필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 함께 일하러 다니지

않은 그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감정이 격해져서 서로 갈라졌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갔다.

바오로는 실라스를 선택하여 떠났는데, 형제들은 바오로를

주님의 은총에 맡긴다고 기도해 주었다(사도 15,36-40).”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마르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감정이 격해질 정도로 다투다가 서로 갈라진 것은,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에 바르나바와 마르코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부분들을 종합해 보면, 그 세 사람은

나중에 화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세 사람의 다툼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연상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2)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에 바로 연결됩니다.

공동체의 일치와 사랑은, 그 자체로 복음 선포가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은,

예수님의 ‘새 계명’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고,

또 복음을 부정하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공동체가 분열되어서 서로 싸우고 있는 상태에서

선교활동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하느님의 평화와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있는 ‘먼저’ 라는 말은,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이기도 하고, ‘네가 먼저’이기도 합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로 생각하면,

형제와 화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치는 예물은

주님께서 안 받으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 예물은, ‘사랑 없는’ 예물이고, ‘거짓’ 예물입니다.

‘네가 먼저’로 생각하면, 사랑과 화해를 실천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됩니다.

사랑과 화해는 언제나 ‘상대방보다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먼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과 화해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입니다.

3) 우리는 남을 용서하는 일만 생각하면서, 자신도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평생 ‘용서할 일’만 있고, ‘용서받을 일’은 하나도 없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혹시라도 “나는 하느님께는 죄를 지었지만, 사람에게는

잘못한 일이 없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사제와 레위인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강도짓을 하지 않았고,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경우에, “선행과 사랑 실천은 안 했지만

죄는 안 지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선행과 사랑 실천을 안 한 것이 죄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는 죄를 지었지만,

사람에게는 잘못한 일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강도당해서 초주검이 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가해자는 분명히 강도들이지만,

도와주지 않고 그냥 지나가버린 사제와 레위인에게도

‘원망’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 사제와 레위인은 하느님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해야 하고, 강도당한 사람에게 가서 사과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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