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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님_관객에 자유로워지려면, 감독의 시선을 의식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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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손을 씻고, 잔을 닦고, 겉모습을 꾸미는 것. 그들의 관심사는 단 하나였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우리 인생도 마치 연극 무대와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때로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 연기를 합니다. 여기서 연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현대 연기론의 아버지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주창한 ‘제4의 벽(The Fourth Wall)’입니다. 무대는 3면이 막혀 있고 관객석 쪽은 뚫려 있지만, 배우는 그곳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고 상상해야 합니다. 관객이 없다고 믿고 배역에만 몰입해야 진짜 연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벽이 무너지는 순간, 연기는 코미디가 됩니다.
어느 아마추어 연극배우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비장한 독백을 하며 눈물을 흘려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관객석 맨 앞줄에 앉은 어머니가 자꾸 이상한 손짓을 보냅니다. 손을 바지춤에 대고 위로 올리는 시늉을 반복하는 겁니다. 배우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아, 내 남대문이 열렸구나!’ 그때부터 그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바지 지퍼를 사수하려는 코미디언이 되었습니다. 대사는 꼬이고, 시선은 불안하고, 관객들은 킥킥거립니다.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그는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무대 위에서 길을 잃은 것입니다.
우리 삶도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연출자가 주신 대본대로 살아야 하는데, 자꾸만 세상이라는 관객석의 눈치를 봅니다.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면 어쩌지?”, “이 옷을 입으면 촌스럽다고 할까?” 관객의 반응에 갇히면, 우리는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엉뚱한 삼류 연기를 하게 됩니다.
관객의 시선에 중독되어 인생을 망친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19세기 영국 사교계의 제왕 ‘보 브러멜(Beau Brummell)’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패셔니스타였습니다. 매일 아침 목에 넥타이를 매는 데만 5시간을 썼고, 구두를 샴페인으로 닦아 광을 냈습니다. 오직 사람들에게 “멋지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그는 막대한 빚을 졌고, 왕세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영혼을 팔았습니다.
그의 인생 목표는 ‘남들에게 보이는 나’였습니다. 하지만 유행이 지나고 빚더미에 앉게 되자, 관객들은 냉정하게 등을 돌렸습니다. 그는 결국 프랑스의 허름한 정신병원에서 넥타이도 매지 못한 채, 자신의 똥오줌을 뒤집어쓰고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타인의 시선은 변덕스러운 날씨와 같습니다. 거기에 내 인생의 닻을 내리면, 우리는 난파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라는 감독의 ‘컷(Cut)!’ 소리는 무시하고, 사람들 박수 소리에만 취해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위선자’라는 꼬리표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지독한 관객의 시선에서 탈출하여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정체성’의 확립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명확해야 합니다. 로마의 사도’라 불리는 성 필립보 네리입니다.
그는 늘 기쁨에 차 있었고 유머가 넘쳤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성인이다!”라고 칭송하자, 그는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기상천외한 행동을 합니다. 수염을 딱 절반만 깎고 거리를 활보하고, 커다란 쿠션을 머리에 이고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사람들은 “저 신부님이 미쳤나 봐” 하며 수군거리고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필립보 네리는 싱글벙글 웃었습니다. 그는 세상이라는 관객을 조롱하고, 오직 자신의
연출자이신 하느님과 눈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람들이 저를 바보라 하니 참 좋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관객이 야유를 보내든 환호를 보내든, 감독의 “OK” 사인 하나면 족하다는 배짱. 이 배짱이 우리를 진실되고 거룩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초대 교회의 교부 성 그레고리오는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그 대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시선, 돈, 명예라는 더러운 유리창 얼룩만 바라보면, 우리 마음도 얼룩덜룩해집니다. 하지만 유리창 너머에 계신 하느님, 그분이 만드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닮은 존재가 됩니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그렇게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성당 안에서도 이런 것을 잘 느낍니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시끄럽게 떠들고, 심지어 코를 골면서 조시는 분이 있어도 좀처럼 감정이 동요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이 아니라 감실 안의 예수님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앨리스 워커의 소설 『컬러 퍼플』에 아주 멋진 대사가 나옵니다. 등장인물 슈그는 억압받는 여성 셀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말이야, 우리가 어느 들판을 지나가다가 거기 피어 있는 보라색 꽃(Color Purple)을 보고도 눈길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치면, 하느님이 몹시 화를 내실 거라고 생각해.”
하느님은 우리를 기쁘게 하려고 그 꽃을 거기 두셨는데, 우리가 무관심하게 지나치면 그분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깔아놓은 이 아름다운 옷자락의 주름 하나하나를 기쁘게 감상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선택하십시오. 변덕스러운 관객(세상)의 눈치를 보며 주눅 들어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우리를 위해 들판에 보라색 꽃을 피워두신 감독(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기쁘게 사시겠습니까? 믿음은 선택과 결단입니다. 그리고 실천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참 믿음이 생겨납니다.
오늘 하루, 사람들의 평가라는 제4의 벽을 과감히 세우십시오. 그리고 내 마음의 창문을 닦으며, 길가에 핀 작은 꽃 한 송이에서 나를 향해 웃고 계신 하느님의 시선을 발견하십시오. 그 시선과 마주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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