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1일 (수)
(녹)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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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수원 교구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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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2-03 ㅣ No.187794

이병우 신부님_"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5,41) 

 

'날마다 다시 살아나는 믿음이 되자!' 

 

오늘 복음(마르5,21-43)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을 하고 있었던 부인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과 '큰 고통 중에 있는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만납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십시오."(마르5,23)

 

"내가 저분의 옷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5,28)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 두 기적은 '믿음이 낳은 기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기적'입니다.

 

'믿음 안에서 다시 살아나야 하는 기적', '믿음의 힘으로 사랑이 다시 살아나야 하고, 희망이 다시 살아나야 하는 기적'입니다. 

 

'점점 약해지는 믿음'입니다.

 

'조금만 고통과 시련이 찾아와도 넘어지거나 포기하는 믿음'입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라는 세상 가치를 더 중시하는 믿음'입니다.

 

'성당 안에서만, 미사 때에만, 기도할 때에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믿음'이고 '성당 밖에서는, 미사와 기도가 끝나면 죽어버리는 믿음'입니다.

 

'성당 밖에서는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살아나는 희망, 다시 살아나는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오늘도, 아니 날마다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영성체송) 

 

(~ 1마카7,25)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르 5,21-43: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복음은 두 가지 사건을 함께 전한다. 하나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기적, 다른 하나는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을 치유하신 기적이다. 두 이야기는 서로 얽혀 있으며, 모두 믿음이 구원을 가져온다는 동일한 메시지를 전한다. 

 

회당장 야이로는 공적 지위와 체면을 뒤로 하고,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 무릎을 꿇었다. “제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손을 얹어 살려 주십시오.”(23절) 그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차원을 넘어,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고백이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믿음은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의 능력을 붙드는 손이다.”(Homilia in Matthaeum 31) 야이로의 믿음은 가족 사랑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하느님께 대한 절대 신뢰로 자라납니다. 

 

군중 속에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여인이 등장한다. 12년 동안 고통 속에 살며 가진 것을 다 잃은 여인, 그러나 단 하나 희망만은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28절). 여인의 믿음은 단순히 육체적 치유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행위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34절) 여기서 구원은 단순히 질병의 치료가 아니라, 영혼의 회복을 의미한다. 

 

야이로의 집에서 “따님이 죽었습니다.” 소식이 들려왔을 때, 예수님은 결정적인 말씀을 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이것은 단순히 야이로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주시는 복음의 핵심이다. 이 말씀은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말라. 절망 앞에서 주저앉지 말라. 믿음으로 끝까지 주님을 의탁하라는 의미이다. 교리서는 “믿음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 자신을 신뢰하게 한다. 믿음으로 우리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에 참여한다.”(1812항 참조)라고 한다. 

 

예수님은 소녀의 손을 잡고 말씀하신다. “탈리타 쿰! 소녀야, 일어나라.”(41절) 죽음의 자리에 있던 소녀는 다시 일어난다. 성 이레네오는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을 창조하신 그 손길처럼,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내신다.”(Adversus Haereses V,15,2) 오늘도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낙담하여 쓰러진 이들에게: “일어나라.” 죄에 매여 죽어 있는 영혼에게: “일어나라.” 희망을 잃은 교회 공동체에게: “일어나라.”라고 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하혈하는 여인과 같을 수 있다. 세상에서 지치고 상처받았으나, 여전히 주님을 찾고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붙들려는 사람이다. 또 우리는 야이로의 딸과 같을 수 있다. 죄와 절망 속에서 잠들어 있지만, 주님의 목소리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탈리타 쿰!”

 

김건태 신부님_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 두 가지 기적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하나는 회당장의 딸을 다시 살리는 기적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하혈하던 여인의 병을 치유해 주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예수님의 연속적인 놀라운 능력 앞에 감탄과 존경의 마음을 쏟아낼 수도 있으나, 늘 그러하듯이, 우리의 영적 시선은 이 두 기적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에 닿아 있어야 합니다.

 

먼저, 회당장의 딸 이야기에서 회당장의 믿음의 정도와 과정을 봅니다. 회당장은 유다교 회당에서 거행되는 전례를 이끌고 회당 건물을 관리하던 사람입니다. “그분 앞에 엎드린” 회당장의 몸짓은 예수님이 죽을병에 걸린 딸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고백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잠시나마 흔들릴 수 있는 위기의 시간 앞에 섭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하는 전갈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회당장의 믿음을 잡아주시며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북돋워 주십니다. 예수님을 비웃던 사람들과 달리, 회당장은 주님의 도우심 덕분에 본래의 믿음을 유지합니다. 비웃던 사람들, 죽음의 세력을 파괴할 수 있는 주님의 능력에 이의를 제기했던 사람들은 이 능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장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기에, 예수님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사람들만 그 현장에 초대하십니다.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탈리타 쿰”, 이 한 마디로 꿈같은 일, 넋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일이 현실이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예시하는 이 사건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지금으로서는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한편, 더는 치유의 가능성이 없어 보였던, 하혈하던 여인의 경우는 또 다른 접근을 요구합니다. 이 여인에게서는 회당장의 수준과 같은 믿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저 간절함 하나뿐입니다. 살아온 시간들이 너무 고통스럽고 한스러운 나머지 믿음보다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그분의 옷에 손을 댑니다.” 그 즉시 병이 나은 것을 온몸으로 느낀 이 여인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즉시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믿음의 단계로 접어들며, 모든 것은 주님의 이끄심에서 비롯됩니다. 이제 이 여인도 회당장처럼 “엎드리며”, 사실대로 다 말씀드립니다. 이 여인의 간절한 마음을 받아들이시고, 그 간절함을 믿음의 영역으로 끌어올리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와 같은 만남과 대화가 없었다면, 육체적인 병의 치유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병으로 말미암아 살아오면서 겪은 정신적 고통과 한에 대한 치유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육체는 물론 정신적인 건강을 허락해 주신 주님의 음성은 이 여인의 삶 내내 희망찬 구원의 음성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회당장의 믿음처럼 흔들릴 수 있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병든 이 여인이 지닌 믿음 같지도 않은 믿음도, 주님은 당신을 향한 마음이라면 기꺼이 받아주시고, 그 믿음을 견고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승화시키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 소중한 신앙을 간직하고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도 실은 주님의 그 이끄심 덕분일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온 이 길을 더욱 열심히 걸어가겠다는 다짐으로, 주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신앙생활의 목적은 ‘몸의 건강’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마르 5,35-43).”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이고 선포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는, 또는 주님 안에서는,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긴 잠’일 뿐이고,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는 관문일 뿐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탈리타 쿰!” -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부모들이 아이를 깨울 때 하는 일상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만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죽은 아이를

 

살리신 일이 아니라,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신 일이 되는

 

셈인데,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라는 말은,

 

그 소녀가 죽은 것과,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살리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요한 11,11-15)”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니,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잠든 사람을 깨우는 것만큼이나 예수님께는

 

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요한 5,21-22.24).

 

<우리가 신앙인이 되었을 때, 그때 ‘이미’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원한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2) 누구든지 살다 보면 큰 병에 걸릴 수 있고,

 

그 병 때문에 큰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 치유의 은총을

 

간청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몸의 건강’은 중요하고, 또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건강이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저 몸의 병이나 고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리신 소녀와 라자로가 얼마나 더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다시 죽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소녀와 라자로가 살아난 일은 부활이 아니라,

 

수명이 조금 더 연장된 일입니다.>

 

 

 

3)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어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 때문에 크게 슬퍼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또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믿고 있어도,

 

죽는 것이 무서운 것도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바오로 사도는, 희망 없이 사는 사람들처럼

 

죽음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1테살 4,13).

 

그 말에 대해서, “예수님도 라자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셨다.” 라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요한 11,35),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울고

 

있는 것을 보시고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요한 11,33).

 

<예수님은 내가 울고 있을 때,

 

나를 가엾게 여기시면서 함께 우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 자비와 연민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은, 단순히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가엾게

 

여기셔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일입니다.>

 

 

 

4)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또는 신앙인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만

 

참여할 수 있습니다(루카 20,35).

 

‘지금’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나중에’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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