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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12일 (월)
(녹)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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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 수원 교구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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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09:37 ㅣ No.187370

이병우 신부님_"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회개하는 그리스도인!' 

 

오늘 복음(마르1,14-20)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하시는 말씀과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전례주년으로 성탄시기를 마치고, 오늘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연중시기는 '예수님의 삶 전체를 묵상하는 시기, 세상 구원 활동인 예수님 공생활의 신비를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이 전해집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첫 말씀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구원 활동의 도우미'를 부르십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인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1,17)는 예수님의 이 부르심에 그들은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보다 더(radical)'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아니 매순간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회개는 나의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기쁨'입니다.

 

내 좋을 대로 살지 말고,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제자들, 그래서 날마다 기뻐하는 제자들이 됩시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 에스8,2) 

 

전삼용 신부님_왜 예수님만이 평화의 길일까?  

 

찬미 예수님!

 

우리는 모두 평화를 원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통장을 채우고, 건강을 챙기고, 노후를 대비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존(Survival)'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물어봅시다.

 

내 생존이 완벽하게 보장되면, 그때는 정말 평화로울까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단편 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주인공 '파흠'을 보십시오.

 

어느 날 그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옵니다.

 

"해가 뜨고 나서 해가 질 때까지, 네가 두 발로 걸어서 돌아온 만큼의 땅을 공짜로 주겠다."

 

파흠은 자신의 생존과 부를 늘리기 위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그는 쉬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달립니다.

 

"저기까지만 더, 요기까지만 더." 결국 해가 지기 직전, 그는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습니다. 평생 '생존'을 위해 달렸지만, 그가 얻은 것은 고작 그가 묻힐 3평 남짓한 무덤뿐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의 모든 땅은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비극입니다.

 

더 큰 비극은 그가 달리는 동안 결코 평화롭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평화는 땅을 얻으려는 이가 아닌 땅을 주려는 이의 것입니다. 

 

 

 

평화는 오직 피조물이 아닌 창조자가 되어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의 일입니다. 구조대가 무너진 건물 잔해를 파헤치다가 기이한

 

모습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한 여성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양손으로 땅을 지탱한 채 굳어 있었습니다.

 

건물의 엄청난 무게를 등과 어깨로 버티며 죽어간 것입니다.

 

구조대원이 그녀의 몸 아래를 확인하자, 놀랍게도 갓난아기가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기 옆에 놓인 휴대폰에는 이런 문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가야, 만약 네가 살아남는다면 엄마가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해다오." 

 

 

 

이 어머니에게 죽음이 두려웠을까요?

 

물론 무서웠겠지요.

 

하지만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창조의 본능이

 

죽음의 공포를 삼켜버렸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고 아이의 생명을 창조하는 길을 택했기에, 무너지는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도 가장 숭고한 평화 속에 잠들 수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 감옥의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살려고 발버둥 칠 때, 그는 타인을 대신해 죽겠다고 나섰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한 가장을 살리는 순간,

 

지옥 같은 아사 감방은 찬미가가 울려 퍼지는 천국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것은, "이제 너를 위해 사는 사냥꾼의 삶을 멈추고, 남을 위해 죽어서 그를 살리는 어머니와 같은 창조자의 삶으로 건너오라"는 초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신부님, 예수님을 안 믿어도 훌륭하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까?

 

우리 힘으로도 창조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심리학과 역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는 원숭이를 대상으로 아주 잔인하지만 중요한 실험을 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 원숭이를 어미에게서 떼어놓고, 두 개의 가짜 어미가 있는 우리에 넣었습니다.

 

하나는 우유(생존)를 주지만 차가운 철사로 만든 엄마였고, 다른 하나는 우유는 안 주지만 부드러운 헝겊으로 만든 엄마였습니다. 

 

 

 

아기 원숭이는 배가 고플 때만 철사 엄마에게 갔고, 나머지 시간은 헝겊 엄마에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이 원숭이들이 자라서 새끼를 낳았을 때, 그들은 새끼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젖을 물리지 않고, 때리거나 심지어 바닥에 패대기쳐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생존(우유)만으로는 부모(창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1970년 미국에서 발견된 13세 소녀 '지니(Genie)'의 사례는 우리를 전율케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13년 동안 작은 방에 감금되어 부모와의 대화도, 따뜻한 스킨십도 없이 짐승처럼 길러진 지니는 구조된 후에도 끝내 언어를 온전히 배우지 못했고, 타인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는 데 실패했습니다.

 

사랑은 입력 없이는 출력이 불가능합니다.

 

사랑받지 못한 존재는 결코 사랑을 창조해 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인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오직 창조자만이 피조물에게 "너는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사랑을 창조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닉 부이치치를 보십시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10살에

 

욕조에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생존'의 관점에서 그는 실패작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에게 희망을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자신이 실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 창조된 '걸작'임을 깨달았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전 세계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창조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왜 예수님만이 평화의 길일까요?

 

창조자를 만들 수 있는 분은 창조자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떤 위인도 우리를 다른 생명을 살리는 존재, 영혼을 구원하는 존재로 만들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창조자로서, 마치 어머니처럼 자녀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며 그 모범을 몸소 보인 신(神)은

 

예수님 외에 없습니다. 

 

 

 

어머니가 아니면 누가 감히 아이에게 "너도 나중에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어.

 

내가 꼭 그렇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울 거야."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아니면, 창조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이 말씀은 빈말이 아닙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창조적인 사랑을 우리에게도 심어주어, 우리 또한 누군가를 살리는 '작은 창조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창조주의 보증수표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런 면에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초대하시는 그분만이 유일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널 훌륭한 엄마가 되게 할게”라고 아기에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어머니뿐인 것처럼, “‘너를 창조자로 만들겠다.’라는 말은 오직 창조자만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물을 버리고 생명을 구하는 존재가 되게 하겠다는 바로 그분을 따르십시오.

 

그분만이 우리를 생존의 허무에서 건져내어, 영원히 사는 창조의 기쁨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예수님의 첫 말씀은 단순한 초대가 아니라, 구원의 결정적인 시간이 이미 도래했음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나라가 문을 열었고, 모든 이는 회개와 믿음으로, 이 나라 안으로 들어오도록 부름을 받는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평범한 어부들을 부르신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사회적으로 뛰어난 지위나 학문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의 지혜와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당신의 나라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 

 

예수님은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17절)로 부르셨다. 이제 그들의 삶은 단순히 생계 수단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으로 이끄는 사도로 변화되었다. 그 부르심 앞에서 제자들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8절)고 복음은 증언한다. 회개와 믿음은 단순한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방향 전환, 곧 과거의 집착과 안락함을 버리고 새로운 길로 나서는 결단을 뜻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배까지 버리고”(20절) 따랐다. 이는 단순히 가족을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모든 관계가 새롭게 정립된다는 의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을 따르는 이는 세상에서 잃는 것을 통하여 오히려 더 큰 것을 얻는다. 그는 땅의 아버지를 떠나 하늘의 아버지를 만나며, 작은 그물을 버리고 온 세상을 끌어올릴 그물을 받는다.”(Serm. 100) 

 

사도의 소명은 단지 과거를 버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그 안에 당신의 말씀과 능력을 불어넣으시고, 평범한 이들을 복음의 증거자로 변화시키신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가 되려면, 나를 얽매는 집착과 불필요한 애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태오가 세리의 자리를 버리고, 바오로가 율법 학자의 열심을 버렸듯이, 우리도 주님을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도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물을 버리고 곧장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직 붙들고 있는 집착은 무엇인가? 주님을 더 가까이 따르기 위해 나는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제자의 길은 버림과 따름의 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세상의 것을 잃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되찾는 길이다.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곧바로” 응답했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지체하지 않고 그분을 따르는 믿음의 용기를 청하자. 

 

 

 

김건태 신부님_나를 따라오너라!

 

“요한이 잡힌 뒤에”, 곧 주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이 세상에 파견된 세례자 요한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 본격적인 구원의 시대가 열립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는 첫 말씀으로 복음을,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하십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착수하시는 첫 번째 작업은 협조자들, 곧 제자들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다른 공관(共觀)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르코 복음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 곁에는 늘 제자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늘 끼고 다니시면서 당신의 말씀을 두 귀로 직접 듣게 하고, 당신의 행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하십니다. 바로 이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귀와 눈으로 직접 듣고 본 것을 전하며, 지상 교회를 맡아 구원사업을 펼쳐나갈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 양성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며,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 제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부분이 상당수라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최대 역점 사업이 제자 양성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에 대해 많은 관심을 쏟지만, 실은 그것만큼이나 부르심 자체도 매우 간결하며 빠르게 진행됩니다. 마치 아무나 부르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를 지나가심이 바로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이며,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이 세상 개입은 즉각적이며 절박한 부르심과 대등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첫 제자들의 응답 역시 즉각적이며 적극적일 수밖에 없던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응답을 위해서는 높은 차원의 회개가 필요했습니다. 그물을 버려야 했고, 인간적인 관계 또한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다르게 행동하는 행동의 변화를 넘어, 다른 지점 곧 하느님이 원하시는 지점을 향해 마음을 곧게 하는 자세가 전제되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차원의 응답으로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부족함이 아직 너무 많지만, 당신의 ‘제자’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나가시리라는 믿음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사람들을 불러 당신의 제자로 양성해 나가셨다는 사실 자체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더욱 귀 기울이며, 지체 없이 응답만 한다면,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 그러하셨던 것처럼, 사랑과 인내로 우리를 키워 하느님 나라와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신앙인, 나아가 하느님 나라 건설에 꼭 필요한 일꾼으로 만들어나가시리라는 믿음으로, 오늘 하루를 힘차게 걸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송영진 신부님_<세속적으로는 평범하지만, 영적으로는 비범하고 특별한...>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4-20).”

 

1)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을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최고의회 의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사도 4,13-14).”

 

세속의 기준으로는, 사도들은 무식하고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비범하고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은,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로 보이는

 

사도들에게서 ‘영적인 비범함과 특별함’을 느꼈고,

 

그래서 놀라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실 때, 눈에 뜨이는 대로

 

‘아무나’ 뽑으신 것이 아니라, 먼저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심사숙고 하신 뒤에,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두 명을 뽑으셨습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루카 6,12-13)”

 

사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점은 무엇이었을까?

 

믿음, 사랑, 열정, 헌신, 충성심 등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났을 것이라고 보통 생각하는데, 우리가 모르는,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시는, 어떤 비범함과 특별함이

 

더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에 대해서 말할 때, 사도들의 평범함만 말하고

 

비범함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공평하고 부당한

 

일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세속의 눈으로만 보고

 

판단하는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2) ‘미르얌’과 ‘아론’이 ‘모세’를 시기했던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미르얌과 아론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주님께서 이 말을 들으셨다(민수 12,2).”

 

아마도 미르얌과 아론의 눈에는, 모세가 ‘하느님께서 특별히

 

뽑으신 지도자’로는 보이지 않고, 자기들의 막내 동생으로만

 

보였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르얌과 아론에게 진노하셨고,

 

“모세는 내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특별히 뽑은

 

사람이다.” 라고 강조하셨습니다(민수 12,4-9).

 

민수기에는 모세의 특별한 점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든 하느님께서 모세를

 

‘민족 지도자’로 뽑으신 것은 ‘모세만’ 뽑으신 일입니다.

 

아무나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신 일도 같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하신 일은(마태 16,18), ‘베드로 사도’ 라는

 

바로 그 사람을 임명하신 일입니다.

 

그 일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신 일’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기록을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부르시기 전에,

 

어부들이 먼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요한 1,37).

 

<정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몇 달 후’로 추정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요한 1,38).

 

이 말씀은, “무엇을 희망하느냐?(무엇을 원하느냐?)”입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한 것은,

 

첫 번째로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희망......

 

그들은 물고기나 잡아서 먹고사는 인생이 아닌 새로운

 

인생을 희망했고, 그것을 예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곧바로 응답하고 따라나섰습니다.

 

<사도들의 첫 번째 희망은 ‘자기 자신의 구원’이었고,

 

예수님께서 그 희망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4) ‘믿음, 희망, 사랑’이 똑같이 위대하고 중요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은,

 

누구든지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특별한 점입니다.

 

희망이 잘못되면 믿음도 잘못되고 사랑도 잘못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도, 또 교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을 때에도, 항상 ‘희망’이 먼저이고,

 

그 희망은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한 희망이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명예나 부귀영화 같은 것을

 

희망한다면, 모든 것이 어긋나게 됩니다.

 

지난 이천여 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보면,

 

명예욕으로 교회의 고위직을 욕심낸 사람들 때문에

 

교회 전체가 불행해진 일들이 있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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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1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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