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03. 말씀이 얼굴을 갖추는 시간 / 임신 10–28주 / 대림 3주)
조용히 보호 받아야 할 신비
#되어감 #존재의존엄 #생명존중
생명은 늘 요란하게 시작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새로운 생명은 환호 속이 아니라, 늙은 사제의 떨리는 손과 아이를 기다리다 지쳐 버린 한 여인의 침묵 속에서 잉태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삶에는 오래된 결핍이 있었다. 그 결핍은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고, 쉬운 위로로 채워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결과가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하느님 앞에 머무는 삶을 선택했다.
성소 안에서 즈카르야는 말을 잃는다. 그의 침묵은 벌이 아니라 준비가 된다. 설명하려던 입이 닫히고, 통제하려던 손이 내려놓아질 때 하느님은 인간의 계산을 넘어 일하시기 때문이다.
침묵은 무능력이 아니다. 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존재가 먼저 말을 건다.
그 사이, 엘리사벳의 몸 안에서는 아무 소리 없이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아직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없지만 그 생명은 이미 하느님의 시선 안에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지만 이미 관계 안에 있었다. 임신 초기, 태아의 얼굴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이 시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다. 기쁨을 외치기보다, 설명하기보다, 그 신비를 먼저 지킨다.
생명은 처음부터 평가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조용히 보호받아야 할 신비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시선보다 생명 그 자체의 시간을 존중했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언가를 해내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거기에 있음인가. 태아는 아직 말하지 못한다. 아직 선택하지도, 기여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 존재는 이미 하느님께서 굽어보신 자리에서 존엄으로 불리고 있다.
존엄은 능력에서 오지 않는다. 존엄은 존재 그 자체에 내재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존엄은 사랑받고 있음에서 시작된다. 하느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 그곳에 이미 존엄이 있다. 태아는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존재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와 있다.
대림의 시간은 태아의 시간과 닮아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살아 있고,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하느님의 일이 시작된 시간. 우리는 완성을 기다리지만, 하느님은 이미 그 시작 안에 계신다.
우리는 자주 묻는다. 언제부터 생명인가, 언제부터 존중받아야 하는가. 그러나 복음은 이 질문을 조금 다른 자리로 옮긴다. 나는 아직 보이지 않는 생명 앞에서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직 설명되지 않는 존재를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지켜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생명은 태어날 때 존엄해지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순간부터, 이미 조용히 보호받아야 할 신비로 이 세상에 와 있다.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그 신비를 지켰듯이, 우리도 보이지 않는 얼굴 앞에서 경외로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행위 이전의 자리로 초대받는다.
무엇을 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자리, 말하기 전에 이미 사랑받는 자리, 증명하기 전에 이미 환대받는 자리. 태아는 바로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한때 그 자리에서 시작했다.
대림은 우리에게 묻는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신뢰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생명 앞에서, 당신은 침묵할 줄 아는가.
작은 이의 기도
주님,
아직 말하지 못하는 생명을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보이지 않아도 이미 존엄한 존재를
평가하지 않고 조용히 보호할 수 있는
사랑을 주소서.
침묵 속에서 자라는 생명을
당신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시고,
그 신비 앞에서
경외로 머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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