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7일 여수 문수동 대림 특강을 정리해서 보냅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모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오셨고 내일 오실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오고 계십니다. 오고 계신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이 표현은 단순한 전례 언어가 아닌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며, 예수님의 강생과 육화를 통해서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장일순 님의 「좁쌀 한 알」를 읽고, 저는어둡고 죄 많은 세상에 육신을 취하시고 탄생하신 예수님의 탄생 이유와 신비를 잘 표현하셨다고 느꼈습니다.
『친구가 똥통(물)에 빠지면 우리는 바깥에 서서 욕을 하거나 비난의 말을 하기 쉽습니다. 대개 다 그렇게 하며 살고 있어요. 그러나 그럴 때 우리는 같이 똥통(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서, 여기는 냄새가 나니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면 친구도 알아듣습니다. 바깥에 서서 나오라고 하면 안 나옵니다.』
하느님은 저 하늘 높은 데서 우리더러 빨리 올라오라고 소리치지 않으시고 똥통(물)과 같은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와 모든 것을 함께 나누십니다. 그런 다음 이곳은 냄새가 나니 같이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며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려 지금도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계십니다. 이 하느님이 바로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하신 임마누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하기 위해 강생하시고 육화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우리네 삶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해할 수 없는 재난과 불행이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가 분개하고 분노하는 것은, 어쩌면 이 일로 결코 좌절하지 않겠다라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대형사고 이후에 억울하고 비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합동 추도식을 보면 종교나 종파를 초월해서 조사에 한결같은 표현은 ‘이제 눈물도 슬픔도 없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라’라는 기원 모두가, 다 우리 희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상에서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삶의 부정보다 긍정의 힘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은 우리 희망의 바탕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느끼셨겠지만,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의 핵심 내용은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수난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라고 압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례력에도 가장 으뜸 가는 축제가 바로 성탄과 성삼일 파스카 축제이고, 이를 온전히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시간이 지나면서 대림절과 사순절을 확장해서 지내오고 있습니다. 탄생과 죽음, 이는 단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만이 아니지요. 어떤 면에서 위령성월에 이어서 대림절이 시작되는 게 참으로 의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도 인간으로 태어나셨으며 죽으셨는데, 다만 그분은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지구라는 행성에서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이 다른 모습이고 차원일 뿐, 한 생명이라는 것을 믿음과 희망을 남기신 겁니다. 제가 나이 들면서 자주 묵상하는 말씀은,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지만,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4,16)입니다.
그러기에 대림절과 사순절의 주된 신비는 거듭남의 신비입니다. 조상들의 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들에게서 동지는 아주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시간이며 때입니다. 혹독한 긴 겨울밤이 꺾여서 낮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는 변곡점입니다. 이는 곧 봄이 시작하는, 희망의 싹이 트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동면하던 동물들이 이제 곧 멀지 않아 깨어날 것이고, 식물들도 가까운 시일 내로 잎에서 싹이 그리고 꽃을 피우는 계절이 곧 닥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지구라는 행성의 거듭남, 삶과 죽음의 정선율, 더 나아가서 자연에서 일어나는 파스카의 신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주와 신앙의 신비입니다. 잃었던 본래면목을 회복하는 것, 다시 말해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이처럼 이는 단지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분 안에서 우리의 거듭 태어남에 있습니다.
2025년 성탄을 준비하면서, 여러분을 인도해 줄 길잡이 아니면 모델이 있습니까? 저의 길잡이며 모델은 ‘동방박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동방박사의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누구였으며, 왜 그들은 그토록 멀고 먼 길을 순례하며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으며 아무런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였을까요?
인간이란 본디 어떤 그 무엇을 찾고 있는 존재이지만, 아직 그 무엇을 찾지 못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끊임없이 어떤 그 무엇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동방박사들은 이미 자신들의 삶 안에서 어떤 그 무엇을 찾고, 기다리고 있었으며, 찾고자 하는 그 무엇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견디며 낯설고 새로운 길을 걷고, 마침내 그들은 자신이 찾은 진리 앞에 겸손되이 경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요즘 표현으로 실천하는 지성인,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고 봅니다. 이처럼 동방박사는 곧 진리를 찾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원형이며 모델입니다. 낡은 관습과 인습의 틀에 고착된 채, 진리를 외면하는 당대의 사람들에게나 현재의 우리에게 동방박사들과 같은 열린 마음을 갖고 진리를 찾아 나서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는 안주하려고만 하지 모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신앙이나 사랑이 그렇듯이, 진리란 단지 머리로만이 아니라 존재 전체로 추구하고 탐구하면서 체험하는 것입니다. 체험 신앙을 바탕하지 않은 지적인 주입이나, 전통에 젖은 습관적 신앙은 지속성이나 항구성이 희박하고 실천력이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신앙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하지 못하기에 낡은 관습에 젖어 살아갑니다.
사실 내용 없는 형식은, 체험 없는 고백은 허례허식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관습이 아닌 진리’이다, 라고 말한 테르뚤리아노의 교부의 가르침은 의미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역시 늘 죽은 개념이나 이론, 낡은 전통과 관습에 익숙하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앵무새처럼 주입된 모범 답변만 반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소설에 보면, 새롭게 부임한 교사 키팅은 학생들에게, “우리는 시가 좋아서 시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시를 통해서 인생의 아름다움, 낭만과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라고 학생들을 일깨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에 관해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사셨던 삶과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그분이 바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며,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과 그분의 인격을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진리를 찾고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우리 자신들이 되어야 할 모습입니다. 신앙의 길, 진리의 삶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고, 또다시 시작할 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다시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됩니다.
대림절의 핵심 주제는 거듭나기 위한 기다림이며, 그러기에 대림 제1주일의 메시지는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며 살라!’는 호출이었습니다. 기다림은 단지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진 현실이 아닙니다. 무릇 모든 인간 존재는 본디 기다리는 존재이고, 인생은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영적 거듭 태어남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기 위하여 인간의 거부와 무시 속에서도 인내하시고 참으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철저한 무능과 무력 안에서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작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개인사를 보면 모두 다 자기 잘난 맛에 빠져 살 때, 매사가 잘 나갈 때에는 눈에 뵈는 것이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고 난 뒤 비로소 보이고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빛을 더 갈망하고, 절망이 깊으면 깊을수록 희망을 갈구하고, 죽음이 목까지 차오르면 비로소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어둠 속에 살다 보면, 때론 사람은 빛을 향해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성서의 인물이 바로 요한복음 3장의 니코데모입니다. <요한 3, 1~21 참조 >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시간은 한밤중이었으며, 밤은 영적 현실을 상징합니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 길을 걷는다는 것은 힘듭니다. 대림 제1주 금요일 복음에 눈먼 두 사람이 예수님은 뒤따른 것은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믿음의 눈은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니코테모처럼 빛이신 예수님은 당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사람의 ‘거듭남’ 곧 ‘위로부터, 영과 진리로 다시 태어나도록 이끌기 위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외양적 차이는 잘 드러나지 않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차이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대림 제1주일 복음, 마태오 24, 40~41의 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들에 있는 두 사람, 맷돌질을 하고 있는 두 여자 가운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둘 것입니다. 판단기준은 외양,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아니라 내적 태도의 차이, 삶의 시선과 지향에 따른 마음가짐의 차이라고 보입니다. 늘 깨어 준비하고 살아가는 삶이 곧, 그 차이입니다. 구원은, 특별한 삶이 아니라 일상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깨닫고 행함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최선을 다하고 집중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나약한 육신을 취하고 오심은 사람을 단죄나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참된 자세는 한 마디로 기다림의 삶과 기다림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다림은 거부될 수 없는 인간의 현실이며 실존입니다.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전 생애가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기다리는 순간은 자연히 생활 리듬을 단절하고 중단하기에 부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미국 유학하러 가서, 제가 맨 처음 배운 표현 하나는 “enjoy yourself!”라는 표현입니다. 기다림마저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기다리는 존재이지만, 그리스도인은 본디 기다리는 존재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근본적으로 기다리는 삶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단지 외적 시간의 지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이는 곧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절박한 희망과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은 약속을 의지하여 기다리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 1, 13. 31절의 즈카리야와 마리아는 그 대표적인 분들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들을 기다리게 하는 어떤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라나기 시작한 씨앗처럼, 자신들의 존재와 삶 안에서 시작된 그 무엇을 약속받았지요. 이게 중요합니다. 기다리는 그 무엇이 이미 시작되었기에 진정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서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약속을 소유하고 살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약속에 길들여진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다 지쳐 잠들 때가 많았습니다. 곧 올게! 이적의 노래 ‘거짓말’처럼 우리는 그렇게 거짓 약속에도 기다리면서 살아왔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능동적인 태도로 기다렸습니다. 조바심에서가 아닌 약속에 대한 철저한 믿음으로 기다리며 사셨습니다. 자신들의 삶 안에 이미 씨가 뿌려졌고 무언가 시작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실에 충실하게 기다렸던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기다림은 약속을 의지하여 희망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희망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탄광에 갇힌 탄광 광부들에게는 출구가 없다는 사실은 절망이며, 절망은 곧 죽음입니다. 하지만 살아날 희망이 있다고 믿고, 구출을 확신하면 그날을 희망으로 기다릴 수 있겠지요. 2010.10.13일 칠레에서 700m 지하갱도에서 69일 만에 구출된 33명 광부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서로 격려하고 배려하면서 구출해 주겠다는 약속을 의지하여 희망으로 기다린 결과 그들은 기적을 만들어 냈잖아요. 기다리는 자체가, 버티는 자체가 바로 희망입니다.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욕구에만 집중하면 이내 실망하기 쉽습니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고 관심을 품고 있을 때 정말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욕구가 아닌 희망을 가득 안고 기다렸습니다.
셋째, 기다림은 함께 기다려야 합니다. 루카 1, 39~56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약속 이후 두 분은 만남을 통해 힘을 얻게 되었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동질감 그리고 연대감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부 심정 홀아비가 안다고 하듯이 두 분이 함께했기에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기다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원형입니다. 함께 기다리면서 서로를 지지하고 북돋아 주며 긍정해 주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경험적으로 심각한 문제 앞에 함께 해줄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아픔이나 슬픔을 함께 할 때 그 아픔도 슬픔도 작아지고 견디어 나갈 힘을 얻게 됩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표현처럼 함께 아픔을 슬픔을 나눠야 합니다. 예전 물대포로 말미암아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분의 딸은 힘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함께 해 주십시오”라고 눈물로 호소하더군요.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약속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이며 힘의 원동력입니다. 전례와 기도 시간은 바로 약속을 중심으로 함께 모인 것입니다. 특별히 성찬례는 주님 오심을 신앙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다리면서 감사하는 시간이며 공간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지요. 성경의 기다린 인물 중에서 저는
창세기의 요셉이 아닐까 싶습니다. (창39~50장 참조) 그는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 이집트로 팔려 갔습니다. 사실 살다 보면 형제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입니다. 이는 부모의 편애가 이를 자극하게 만듭니다. 아무튼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가서 간수 대장 포티파르의 신뢰를 받지만, 포티파르 부인의 유혹을 거절함으로 감옥에 갖힙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파라오의 시종들과 만나게 되고 마침내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게 되고, 그 해결책을 타개할 전권 부여받게 되잖아요. 그 시간이 무려 13년 동안이나….
모든 일은 다 그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를 앞당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며, 인생을 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악과도 평온하게 지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은총입니다. 좋은 일 나쁜 일이 어디 있나요. 그러기에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묘하게 하신 일들 마음에 품어 생각하라!!”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창세기 50,20)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서 8,28) 그러기에 세상 살면서 너무 서두르지 말고 ‘지둘러야’ 합니다. 기다리는 존재는 무릇 방정맞은 사람이 아닙니다. 무겁고 진득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다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지 기다리기보다 깨어 기다림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며 기다리라고 당부하셨지만 잠들 수밖에 없는 게 사람입니다. 사실 깨어 살아야 하는데, 잠든 척하는 사람을 깨우는 것은 잠자는 사람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3, 11~ 14에서 이렇게 먼저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이어서 1코7, 29~31에서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은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 처럼 살라!’고 강조합니다. 대낮처럼 살라, 부자는 가난한 사람처럼, 가난한 사람은 부자처럼 살라. 이렇게 ~처럼 살아갈 때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며, 자연스럽고 자유스럽게 살아가면서 자기의 길을, 자기 삶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깨어 살고자 다짐합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그분과 단절하고 있다면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대낮처럼 살아가는 삶이란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제 잠든 척하지 말고 깨어 나십시오!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흔들어 깨우는 분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아닐까 싶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소리를 외친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먼저 광야를 체험했습니다. 우리 또한 광야를 체험해야 합니다.
광야란 단지 지리적 영역이나 장소가 아닌 심리적 차원에서 “우리 각자의 고유한 무의식적인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심층 세계”를 지칭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깊은 심연, 무의식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서 기존의 거짓된 정체성이 가져다준 보호막, 울타리 안에 안주한 채 머물러 버립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광야가 있고 자기만의 내적인 투쟁이 있으며, 그러기에 그 어떤 누구도 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광야는 그러기에 참된 경험, 산 체험, 성장통의 장소이며 시간이기도 합니다. 내가 계획하고 계산했던 모든 것, 나 자신만 생각했던 삶이 덧없이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광야는 끊임없이 물음이 일어나고 답이 뒤따르는 곳입니다. 그 답은 침묵이며, 고독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됨으로써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 소리는 단지 내적 소음일 뿐입니다. 이를 위해, 가속 운동에서 감속 운동으로 전환이 요구됩니다. 곧 ‘빨리 빨리’에서 느리게 더디게, 이를 통해 우리는 결과만을 중시했던 관점에서 과정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비움 운동을 할 때, 자연스럽게 채움 운동을 성취하게 됩니다. 사막의 첫 느낌은 아무것 없음 無, 텅빔을 느낍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느껴지는 느낌은 꽉 참, 충만함으로 넘쳐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세례자 요한은 광야 생활을 통해 이미 하느님 안에서 이기적 자기중심에서 죽었기에,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기에 세상을 향하여 거침없이 외친 것입니다. 자신은 소리이지 말씀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소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자기 인정과 수용의 겸손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리를 알고 그 자리에 만족하면서 살았던 분이셨습니다.
우리 시대는 역사상 가장 수다스러운 시대입니다. 이 세대는 끊임없이, 쉬지 않고, 발설하고는 있지만 정작 참다운 말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제대로 들을 때, 참된 말이 입술에 올라옵니다. 들음이 전제하고, 침묵과 고독 속에서 들은 말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미지는 정호승 시인의 「봄길」에서 노래한 길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이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처럼 이사야 예언자의 소리를 광야에서 외친 세례자 요한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었던 분이셨고,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었던 분이라고 느껴집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신 존재였고, ‘우리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라고 외치신 분이십니다. 길이란 본디 두 곳을 연결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 준 매듭과 같은 존재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외친 내용은 이사야 40, 3~5절의 예언의 메아리이며 공명입니다. 첫째, 황폐한 사막에 곧은 길을 내어라! 길은 한 지역과 다른 지역을 연결해 주며, 이는 단지 길이 새롭게 나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 두 지역이 상호 개방과 소통을 통해 신뢰 회복이 가능해집니다. 이를 증명했던 단적인 예가 바로 남과 북의 도로 연결과 왕래가 참된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의 소통의 단절로 남북 대화는 물론 도로마저 단절되었는데, 언제 다시 소통되고 연결될지 막막합니다. 때론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가 잘 되는데,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과 대화가 단절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사고와 감정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모든 관계의 문제는 바로 소통의 문제입니다.
둘째,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아져라! 상처는 마음에 깊은 골과 흠집을 남깁니다. 열등의식과 피해의식 그리고 자격지심으로 어둠에 갇히게 됩니다. 또한 자기 속임의 자만심과 우월감은 본의 아니게 자아란 담과 벽을 높이 쌓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을 가두게도 합니다. 마음의 주름살과 부풀려진 담장, 거짓과 허영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헤쳐나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골짜기와 언덕은 길을 내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입니다. 이 장애를 없애는 것이 곧 척박한 광야를 기름진 광야로 바꾸는 것입니다. 마음은 자기 자신과 하느님이 만나는 자리,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자리인데, 생명이 자라지 않은 척박한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밭농사의 경우, 새 밭을 일구는 것보다 묵혀진 밭을 다시 일구는 게 훨씬 어렵습니다. 이렇게 한번 굳어버린 마음을 옥답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은 쉽지 않습니다. 살아온 삶의 시간을 통해 깨달은 것은 머리가 아닌 마음의 문제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명시하고 있듯이, 바로 씨앗이나 씨뿌리는 사람의 문제라기보다, 씨가 떨어진 토양, 토양의 상태에 달려 있지 않나요? 마음이 문제입니다. 은총의 햇빛과 비를 끊임없이 충분히 내려주시지만, 철저한 자기 죽음으로서 응답하지 않으면 옥토로 변화하기 쉽지 않습니다. 부식토가 되기 위한 과정은 나뭇잎과 동물들의 기름과 뒤섞이고, 습기와 세균에 먹힐 때 부식토가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여정, 회개 곧 내적 회심은 마음 비우기이며 마음 바꾸기의 다른 이름입니다.
주님 오심을 깨어 기다림과 기다리시는 그분에게로 향한 순례의 끝은 주님과의 만남과 경배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참된 경배로 귀결됩니다. 경배의 사전적인 의미처럼 겸손하게 그분께 깊이 절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빛이요 생명이신 존재 앞에 무릎을 깊이 꿇고 그분께 경배하러 나가야 합니다. ‘깊이 무릎을 꿇는다’라는 표현은 성무일도 아침 찬미가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깊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경솔하게 혹은 건성으로 꿇는 게 아니라 참으로 겸손하게, 공손하게 ‘아기 예수님’께 깊이 꿇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형식처럼 느껴지던 것이 다시금 보이고 느껴졌습니다. 곧 의식, 예식은 단지 행위 그 자체만이 아니라 내적인 마음의 표현이며 표출입니다.
세상의 중심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존재,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로 태어나시어 구유에 누워 계신 예수님께’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깊이 절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의 탄생 성당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인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자리에 가려면, 상징적이지만 계단을 통해 내려가야 하고, 좁은 통로를 지나가려면 본의 아니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이를 통해 제가 느낀 점은, 겸손은 겸손하고 싶다고 해서 겸손해지는 게 아니라, 인간 실존이,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시고 가난해지신 것처럼 그런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선 우리 역시 그렇게 낮아지고 가난해질 때, 그분께 경배할 수 있을뿐더러 그분의 강생과 육화하신 신비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난 자리에 도달하는 과정이 그렇듯이 구유 앞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무릎을 깊이 꿇어야 합니다.
모든 세상의 중심으로 자부하던 동방박사들이, 무력한 아기 예수에게 깊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은 그분을 참된 주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 신앙의 고백이며, 그분께 선물을 바치는 것은 그분처럼 다함 없는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이며 고백이라고 느껴집니다. 동방박사들의 선물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고 하는데, 이는 참으로 당대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선물의 내용물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값진 것은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훨씬 더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선물은 단지 눈에 보이는 보물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인 자기 자신을 되찾음, 회복이야말로 하느님의 눈에 가장 귀한 선물이며 보물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보시기에 참된 선물은 기다림과 순례를 통해서 마련됩니다. 진정한 경배와 선물은 오히려 그분께서 가장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루카 15장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오히려 ‘죽었던 아들이 돌아온 그 자체’가 아버지에겐 가장 고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께 드릴 선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주님의 성탄으로 거듭나고 새로운 존재와 삶으로 살겠다는 우리의 마음가짐 하나면 충분하고도 충분합니다.
대림 시기와 성탄 시기는 우리로 하여금 거친 광야를 거슬러 질러가는 순례 여정을 통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참된 자신으로 이 길을 걷고 살아야 하는 가를 깨우치는 시기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인생의 해답을 찾기까지 부단히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의 삶을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 자신과 삶이 바로 주님께 드리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섬김의 삶을, 자신의 만족을 위함이 아니라 타인에게 베푸는 삶을, 남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삶을 사는 게 바로 자기답고 자유로운 삶이며 이런 삶이 참으로 축복받은 삶입니다. 또 다른 동방박사들처럼 거듭날 때 진정한 순례는 그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이고 참된 경배로 그 순례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참으로 잘 깨어 기다리셨으며, 거친 내적 광야를 주저하지 않고 통과해 오셨고, 깊이 무릎 꿇으셨습니다. 이제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일본의 ‘미쓰하라 유리’라는 분이 쓴 시 「길을 만든 사람들」을 낭송하고자 합니다. 「봄길」과 잘 어우러지는 시입니다. 『맨 처음 길을 걷는 사람 훌륭해 험한 길 처음으로 걸은 사람 이름을 외울 가치가 있을 만큼 훌륭해 그 오롯한 자세 정말 아름다워. 허나 그 뒤이어 이름 따위 안 남을 줄 알면서도 꾸준히 길을 밟아 다지며 걸어간 이들의 소박한 걸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워. 』 기도를 대신해서 노리치의 율리아나의 표현으로 기도를 대신하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