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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간 금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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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간 금요일] 마태 11,16-19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보여주시는 표징을 보고도 당신을 따르지 않는 이들의 모습을 장터에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모두가 함께 재미있게 놀려면 나와 입장이나 생각이 다른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서로에게 맞춰줄 줄도 알아야 하는데, 상대방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각자 자기 하고 싶은대로만 하려고 들면서, 왜 자기 의견에 따라주지 않느냐고 상대방을 비난만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는 서로 편가르고 싸우느라 시간을 허비하게 될 뿐, 아무도 즐겁게 놀 수 없다는 겁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어 모두가 하늘나라에서 열리는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이끄시는 분들입니다. 그러니 그분들의 가르침이 내 생각과 달라도, 당장은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힘들고 불편해도 따라야만 하지요. 하지만 유다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극기와 고행을 너무 강조하니 힘들어서 싫고, 예수님은 죄인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며 먹고 마시는 모습이 불편해서 싫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요한이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분들을 받아들이면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슬프지 않아도 가슴을 치며 곡을 해야 하고, 내가 즐겁지 않아도 피리를 불며 춤을 추어야 하는데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 ‘자유’를 잃게 될까봐, 그로 인해 손해나 희생까지 감수하게 될까봐 두려운 겁니다.
나와 생각이나 입장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메시아’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온다고 해도 썩 반갑지 않습니다. 진짜 메시아는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이상적인 메시아’의 모습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름 때문에 불편과 손해를 감수할 바에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원하고 바라는 ‘우상’ 이외에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기에, 요한도 예수님도 밀어내고 배척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참된 평화는 흑백논리로 편을 가르지도, 자기만의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지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배척하거나 소외시키지도 않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풍요로운 다양성 안에서 마음을 모아 하나로 어우러져 살아가지요.
우는 이가 있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곁을 지키며 함께 울어주고, 기뻐하는 이가 있으면 마치 내 일인 것처럼 함께 웃어줌으로써 슬픔은 절반으로 기쁨은 몇 배로 만드는 것, 그것이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성숙한 자녀는 기쁨의 춤을 추는데에 장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느리면 느린대로 차분하게, 빠르면 빠른대로 신명나게 춤을 추지요. 그 흥겨운 잔치의 한복판에서 주님이 그 누구보다 기쁘게 춤추고 계실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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