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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 수원 교구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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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폭행 받는 하늘나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는 말씀으로 극찬을 아끼지 않으신 인물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면서 신약의 새로운 장을 연 요한은, 선구자로서 예수님 오심을 준비시켜 나갔으며, 이러한 행적만으로도 그의 위대함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주님 오심을 준비한다는 것은, 요한 세례자가 남긴 말씀과 흔적을 따르는 길을 말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예외적인 놀라운 행동이나 업적을 이루도록 요구하지 않고, 다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날들 속에서 하늘나라 건설에 어떻게 일조할 수 있을지 곰곰이 살피고 실천에 옮길 것을 촉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하는 말씀으로 현실을 진단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 말씀 속에는 세례자 요한이 실지로 겪었던 문자 그대로의 폭력, 특별히 참수로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을 상기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또는 사법적 불의로 말미암아 약자들이나 소시민들이 감수해야 하는 불이익, 억압, 불공정, 수탈이나 약탈 등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더욱 큰 문제는 우리 마음속의 폭력적인 요소들입니다. 하늘나라 폭행은 아마도 외부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폭력을 다스리라는 차원의 명령일 것입니다. 마음속의 폭력이 정리되지 않는 한, 하늘나라는 계속해서 폭행의 대상이 될 것이며, 따라서 하늘나라 건설은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질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하늘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에 앞서, 우리 마음속의 폭력들, 거짓, 시기, 질투, 미움, 모략 등의 잠재적 폭력적 요소들을 정리해 나가는 가운데, 하늘나라가 주님이 설계하신 그대로 빈틈없이 건설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잘 다스리며 준비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1-15).”
1)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 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은, 당신이 바로 ‘메시아’ 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어야 한다.” 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먼저 ‘구원’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루카 4,18).
<“온갖 멍에와 짐에서 벗어나 영원하고 참된 안식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마태 11,28).>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말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구원’은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 생명은 ‘메시아’이신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께 현세적인
복만 빌고 있다면, 또는 세속의 부귀영화만 청하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목적과 방향이 잘못된 것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청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2)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가
다 무의미하고 쓸모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데, ‘일용할 양식’은 분명히 현세의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마태 15,32).
우리가 아플 때 아프다고, 슬플 때 슬프다고, 힘들 때
힘들다고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과 시련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또는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그곳까지 갈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고, 우리와
함께 걸으시면서, 우리를 그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은,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3)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이라는 말은,
‘사람들’이라는 단순한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위대한 예언자’ 라는 뜻입니다.
그가 ‘위대한 예언자’인 것은,
‘메시아의 일’을 준비한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의 구원사업’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지상에서만’ 위대하다는 뜻은
아니고, ‘메시아 시대’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고 ‘메시아의 일’을 미리
준비한 것은 분명히 위대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을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12절의 ‘폭행, 폭력’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포함해서
모든 박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뜻으로는 ‘세상 끝 날까지’입니다.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는,
뜻으로는 “하늘나라를 막으려고 한다.”입니다.
<사탄과 사탄의 추종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끈질기게 방해하고,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 나라가 완성되는 날은, 사탄과 그 추종 세력이
완전히 멸망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0,10-15).>
4)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는, “잘 새겨듣고
실천하여라.”인데, 이 말씀에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어라.
나를 믿는다면 내 뒤를 따라라.”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때문에,
그 길은 ‘편안하고 쉬운 길’이 아니고, ‘좁은 문’을
향해서 가는 ‘좁고 험하고 힘든 길’입니다(마태 7,13-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대림 제2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11,11-15: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위치와 사명을 밝혀주신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말씀하시면서, 요한이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인물임을 선언하신다. 그는 구약에서 예언된 엘리야의 영과 힘으로 와서(루카 1,17 참조) 그리스도의 길을 미리 닦아 놓은 사람이었다. 성 예로니모는 요한을 두고 이렇게 설명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요한보다 큰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끝이며, 구약과 신약의 경계선 같은 인물이다.”(Commentarii in Matthaeum 2,11,11) 즉, 요한은 구약의 완성을 이루는 마지막 예언자이며 동시에 신약의 시작을 열어주는 경계에 선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이렇게 덧붙이신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 이는 단순히 요한을 낮추려는 말씀이 아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주석하듯, “요한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가 그보다 큰 것은, 요한이 아직 하늘의 신비를 완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Homiliae in Matthaeum 36,1) 하늘나라의 은총과 성령의 충만 속에 사는 이는 이미 구약 시대의 가장 큰 인물보다 더 큰 은총을 누린다는 뜻이다. 곧, 우리도 세례와 성령을 통해 요한보다 큰 은총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한다.”(12절) 이 말씀은 종종 오해되곤 하지만,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풀이한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이 그것을 빼앗는다. 이는 곧 큰 열망과 열정으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전환하는 이들이 차지한다는 뜻이다.”(De consensu evangelistarum 2,26,54) 즉, 하느님의 나라는 게으르고 미온적인 태도로는 얻을 수 없다. 오히려 뜨겁고 열렬한 믿음,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끈질긴 노력으로만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예로니모 역시 “하늘나라는 거룩한 이들이 열망과 노력으로 폭력적으로 차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주해, 「마태오 복음」 2,11,12).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가 바로 이 사람이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4-15)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요한은 바로 엘리야 자신은 아니지만,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온 이입니다. 예로니모는 분명히 말한다. “요한은 인격 안에서가 아니라 영과 힘 안에서 엘리야라 불린다.” (Commentarii in Matthaeum 2,11,12)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다리,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 건너가게 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사명은 메시아의 길을 닦는 것이었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셔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나라를 선포하신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살아가야 한다.
전삼용 신부님_모호한 개념은 사랑받지만, 구체적 진리는 폭행을 부른다
엘살바도르의 성인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였습니다. 그가 강론대에서 서로 사랑하십시오, 평화를 이루십시오라고 추상적인 사랑을 이야기할 때, 독재 정부는 그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듣기 좋은 모호한 사랑 노래에는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을 구체적인 정의로 바꾸어 선포한 날, 상황은 변했습니다. 그는 군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사격을 중지하시오! 형제 살인을 멈추시오!"
이것은 모호한 권고가 아니라, 악을 정확히 지목한 명령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 그는 미사를 집전하다가 제대 위에서 암살당했습니다. 추상적인 사랑은 환영받지만, 구체적인 정의는 총알을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 나라가 당하는 폭력"의 실체입니다.
진리가 모호할 때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 진리가 나를 향해 손가락을 펴고 "바로 당신이 문제다, 지금 멈춰라"고 지목할 때, 세상은 그 입을 막기 위해 폭력을 휘두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극찬하십니다. 왜 그토록 칭찬하셨을까요? 바로 뒤이어 나오는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이 말씀은 비난이 아닙니다. 요한이 진리를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냈기에, 어둠 속에 있던 세상이 발작하며 하늘 나라(예수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숨어 계신 하느님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고 지목했습니다. 또한 헤로데 왕의 죄를 향해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정확히 찔렀습니다.
요한이 적당히 두리뭉실하게 말했다면 그는 존경받는 원로로 늙어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진리를 구체적으로 지목했기에 그는 감옥에 갇히고 목이 잘리는 폭행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하늘 나라가 세상의 표적이 되도록 만든 요한의 이 거룩한 용기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폭행당하는 운명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분의 은총로운 말씀에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책을 덮으시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선포하시자 분위기가 돌변했습니다. 즉, "내가 바로 그 메시아다"라고 진리의 실체를 드러내시자, 사람들은 그분을 동네 밖 벼랑까지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옛날이야기 속의 메시아는 환영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서서 내 삶의 주권을 요구하는 구체적인 메시아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드러나는 순간,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고 했다면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는 그를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가 카르멜 산에서 불을 내려 참 하느님을 명확히 증명하고, "바알은 가짜다"라고 악을 지목했을 때, 이제벨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겠다"며 살의를 드러냈습니다.
저의 부끄러운 경험도 그렇습니다. 제가 사제로서 듣기 좋은 위로의 말이나 보편적인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아무도 저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책을 통해 "우리도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신화 교리)"라고 가톨릭의 핵심 진리를 선포하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했을 때, 거센 반대와 박해가 찾아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말이 너무나 명확하고 구체적이라서, 듣는 이들에게 결단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 말이 너무 모호해서 아무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리는 날선 검과 같아서, 드러나면 반드시 어둠을 찌르게 되고, 찔린 어둠은 비명을 지르며 폭력을 행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폭력을 당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저 좋은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대림 시기를 맞아 냉담 교우들을 방문하려 합니다. 만약 제가 성당 안에서 "냉담 교우를 위해 기도합시다"라고만 한다면 저는 안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형제님, 주님이 기다리십니다. 나오십시오"라고 구체적으로 호소한다면, 저는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욕설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가 당하는 폭행입니다. 하지만 그 폭행을 감수하고 초인종을 누를 때에만, 누군가는 구원됩니다.
초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를 보십시오. 그가 구약의 역사를 길게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조용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설교의 마지막에 "너희가 바로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인 자들이다!" 라고 죄를 지목하자,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그에게 달려들어 돌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몰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너무나 명확한 진리가 뼈아팠기에, 귀를 막고 돌을 던진 것입니다.
여러분,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하게 하십시오. 점잖게 믿지 마십시오.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의 죄를 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선포하십시오. 우리가 세상에서 신앙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거나 미움을 받는다면 기뻐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가진 신앙이 모호한 액세서리가 아니라, 세상의 어둠을 찌르는 진짜 빛이라는 증거입니다.
병자를 위한 기도
병자를 위한 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이병우 신부님_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11,11)
'또 하나의 세례자 요한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11,11-15)은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어느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마태11,9)이라고 높이 평가하시면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ㄷ)고 하십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말라3,1)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메시아를 위해 파견된 예언자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아 놓는 사명을 갖고 파견된 하느님의 예언자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 예수님에 앞서 태어났고, 예수님에 앞서 순교했습니다.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우리의 시간은 '세례자 요한의 시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일을 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또 하나의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교회는 지금 '사회교리주간'(12.7-12.13)을 보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복음의 기쁨'에서 하신 권고 말씀이 떠올라 함께 나누어 봅니다.
"오늘날 우리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제는 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배척'입니다. 한쪽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음식이 버려지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것은 '사회적 불평등'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이 경쟁 논리와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놓이게 되면서 힘없는 이는 힘센 자에게 먹히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배척되고 소외되고 있습니다. ..."(53항)
우리의 현실을 깊이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에즈9,1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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