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0일 (목)
(녹)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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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예수님의 울음 “주님 평화의 일꾼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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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 [forgod] 쪽지 캡슐

07:40 ㅣ No.186395

2025.11.20.연중 제33주간 목요일                                                  

 

1마카2,15-29 루카19,41-44

 

 

예수님의 울음

“주님 평화의 일꾼이 됩시다”

 

 

예전 예수님이 활짝 웃으시는 그림을 보고 얼마동안 간직하다가 치운 기억이 생각납니다. 복음 어디에서도 이런 예수님의 활짝 웃는 모습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님이 웃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특이하게 예수님이 우셨다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는 대목도 여기에만 나옵니다.

 

역시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에서 루카에만 나오는 고유사료입니다. 아마도 70년 로마군인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루카는 80-90년 경에 위 복음을 엮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공을 초월하여 전하는 진리는 변함없이 영원합니다. 복음 서두부터 인상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서울은 물론 대부분의 도시에 입성하신데도 역시 우실 것이란 생각이며,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아 하나? 화두처럼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요? 다음 탄식이 답을 줍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희에게 닥쳐올 것이다.”

 

당대 예루살렘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무지에 눈이 가려 평화의 주님을 모시지 못함으로 자초한 재앙이요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도시라는 예루살렘의 이름 뜻에 반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평화의 임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지의 어리석음으로 배척함으로 마침내 예루살렘은 깡그리 파멸되고 완전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찾아오시는 것은 오늘 지금 여기에서 평화의 임금으로 오시는 것으로 실현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 예루살렘이 평화의 임금,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 공동체가 상징하는 바,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평화가 답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갈구하는 바도, 하느님이 소원하는 바도 온누리의 평화입니다. 예수님 탄생시 하늘에서 울려온,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찬미도 기억할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가 한셋트입니다. 영광과 평화는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지상에서의 우리의 평화가 하느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간혹 사람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신부님은 좌파입니까? 혹은 우파입니까?” 그러면 저는 지체없이 답합니다.

 

“저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입니다.”

 

바로 제3의 길, 참평화의 길을 가는 예수님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얼마나 강조하신 평화인지요! 세상을 떠나기전, 부활하신후 우선적인 선물이 평화였고 이 미사를 통해서도 당신의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 고백하는 우리는 산상설교의 참행복중 다음 대목도 기억합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그러니 유비무환입니다. 그 재앙의 때가 닥쳐오기전 평화의 주님을 모시고 주님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 수도원처럼 참평화의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수도원에는 “평화의 집”이라는 피정집도 있습니다만, 수도원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집, 기도의 집, 평화의 집, 환대의 집이라 불립니다. 

 

말 그대로 주님의 평화를 살아가는 새 예루살렘 요셉 수도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주님의 평화를, 성 베네딕도의 평화를 찾아 수도원에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유일한 길은 평화의 주님을 모시고 사는 길뿐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평화가 제1독서 마카오베기 상권의 독립투사 마티아스에게 는 결핍되어 있습니다. 바로 다음 마티아스의 살인 대목이 평화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습니다.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자를 쳐 죽였다.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

 

그리고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은 모든 것을 성읍에 남겨둔채 산으로 달아납니다. 평화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살해한 종교역사요 종교전쟁이었는지요! 예수님 이전이기에 마타티아스는 주님의 평화를 알길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목표가 정의롭다 해도 평화가 아닌 폭력으로는 결코 정의를 이룰 수 없고 그런 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보복의 악순환’에서,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평화의 주님 안에서 가능한 상호공존의, 상생의 평화입니다. 오늘날 역설적으로 평화를 갈구하지만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흡사 <인류사>는 <전쟁사>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은 평화의 주님, 주님의 평화뿐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주님 평화의 일꾼으로 사는 것입니다. <평화를 주십사>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가 되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 평화의 사도, 평화의 일꾼, 평화의 전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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