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
11월 14일 수원교구 묵상글 |
|---|
|
김건태 신부님_‘사람의 아들의 날’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 수행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선포하신 다음(어제 복음 말씀), 이제 이 나라에 대한 보충 설명을 이어 가십니다. 곧 ‘사람의 아들’이 당신의 날에 오실 때에,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성취를 설명하십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눈앞에 두고서도, 삶을 즐기고자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짓고 등, 노아의 때 또는 롯의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활동들은 일상적인 것들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때가 올 때까지 충만하게 산다는 인상을 주는 열정적인 활동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은 은혜로운 날만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을 사는 한편 자연스럽게 회개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불안한 날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그날을 본 적이 없고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날을 내다보고 마음에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역사는 우리에게 최소한 두 가지 인상적인 예를 제공해줍니다. 노아의 때와 롯의 때에, 하느님의 심판이 땅의 사람들과 소돔의 주민들에게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가공할 세력으로 인식되던 물과 불이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습니다.”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물과 불은 여전히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모든 것을 파멸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날, 삶에 아무리 필요한 요소라 하더라도, 포기해야 합니다. 롯의 아내를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녀는 마지못해 남편을 따라나섰으나, 마음은 포기하고 떠난 것들에 매여 있었기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는 운명을 맞이했습니다(창세 19,26).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여 매여 있다면, 그 운명은 파멸일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주는 예입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유일한 사건,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는 주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보장받는 일에 달려 있습니다. 시선을 늘 주님께 두고 일상적인 일들을 성심성의껏 처리해나가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나, 뒤를 돌아보는 일에 마음이 뺏겨 대응해나간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멀어져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끝으로,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한 가르침을 접한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은, 어제 바리사이들이 던진 “언제?”라는 질문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사한 점을 들어 답하십니다. 그날은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하는 심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심판을 받을 것이기에, 누구도 심판을 피해 별도의 안식처를 마련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하루, 당장 그 마지막 때가 내게 닥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정성껏 심는 자제로, 하느님을 마음 한가운데 모시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하루, 이런 날들이 쌓여 지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맛보고 희망하며 살 수 있는, 은혜로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 마음이, 나아가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으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 조욱현 신부님_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노아와 롯의 시대를 예로 들어 “사람의 아들의 날”을 설명하신다. 세상의 종말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도래한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며 일상의 삶에만 몰두했다. 롯 시대에도 사람들은 매매하고 심고 집을 지으며 살다가, 하룻밤 사이에 멸망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종말의 날은 평범한 일상에서 갑작스레 찾아올 것임을 알려준다. 노아가 산 위에 방주를 짓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그 방주는 홍수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오늘날 구원의 방주는 교회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때로는 조롱과 무시를 당하지만, 주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도구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방주를 교회로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방주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Sermo 96,7) 이 말은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몸소 머무시는 구원의 도구임을 강조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32절)라고 경고하신다. 롯의 아내는 구원의 길을 걷다가 과거를 그리워하며 뒤돌아보았고, 결국 소금기둥이 되었다. 이는 결단의 부족과 옛 삶에 대한 미련을 상징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이는 과거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 옛 습관을 붙잡고 있다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Hom. in Gen. 43,3) 우리도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에서 과거의 집착, 세속적 안락을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복음은 또한 종말의 날에는 공동체적 연대보다 개인적 책임이 강조된다고 가르친다.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어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질 것이다.”(34절). 이는 단순히 외적 친분이나 공동생활이 아니라, 각자가 하느님 앞에 책임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교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각 사람은 죽은 뒤 즉시 자신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삶에서 그리스도와 어떻게 일치했는지에 따라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다.”(1021-1022항)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믿는 사람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신앙은 각자의 응답과 회개를 요구한다.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도 모여든다.”(35절) 성 예로니모는 이를 “시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린 몸을 상징하고, 독수리는 그분을 향해 모이는 선택된 이들을 가리킨다.”(Commentarium in Matthaeum 24,28) 즉, 종말의 날 선택된 이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로 모이는 독수리처럼 주님께 이끌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뒤돌아보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32절) 신앙은 단호한 결단과 꾸준한 전진을 요구한다. 세상은 여전히 교회를 조롱할지라도,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 우리를 당신 품에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 전삼용 신부님_성무일도 끝기도 진짜 양심 성찰 방법 찬미 예수님!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매일 하루를 마감하며 성무일도 '끝기도'를 바칩니다. 이 기도의 시작 부분에는 잠시 '양심성찰'을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 시간이 단순히 "오늘 내가 누구를 미워했나? 거짓말을 했나?" 하는 식으로 '죄목'을 나열하는 데 그치곤 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전제되지 않은 양심성찰은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 물속에 앉아 있는 개구리가, 자신이 삶아져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거울을 보며 "오늘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하고 외모만 신경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한순간에 잿더미가 된 고대 도시 폼페이.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 그곳의 화석들이 발굴되었을 때, 우리는 아주 대조적인 두 가지 죽음의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금화와 보석이 가득 든 무거운 자루를 움켜쥐고 죽어간 사람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일의 생존'을 위해 재물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아기를 품에 꼭 껴안고, 자신의 온몸으로 쏟아지는 화산재를 막아내려 했던 어머니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내가 무엇을 껴안고 있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내가 꽉 붙잡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의 나침반이 가리키던 방향이었습니다. 하나는 '나의 생존'을 향했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생명'을 향했습니다. 양심성찰은 바로 이 '죽음의 순간'을 매일 밤 미리 체험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납치된 비행기가 뉴욕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충돌했습니다. 죽음을 직감한 그 짧은 순간, 건물 안에 갇힌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음성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 수많은 마지막 메시지들 중에 "내 통장에 돈이 얼마 있다"거나 "나 승진 못해서 억울하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말은 모두 똑같았습니다. "여보, 사랑해. 아이들 잘 부탁해." "엄마, 아빠, 사랑해요. 고마웠어요." 죽음 앞에서는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너무나 명확해집니다. 거품은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이 남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대부분 옳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경고하십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비비고" 있었습니다. 이 일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 일상에 빠져 다가올 심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긴장감을 잃어버렸기에, '자기 생존'에만 몰두하다 멸망했습니다. 롯의 아내 역시 두고 온 재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의 행복 점수'를 매겨보곤 했습니다. 그때는 참 충실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습관을 잃어버리자, 어느새 세속과 육신, 마귀의 유혹에 치우쳐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되더군요. 그러다 마리아 발토르타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으며 다시금 인생의 마지막 때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삶이 그토록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 순간에 후회 없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의 방향이 잡히고, 생각하지 않으면 방향을 잃게 됩니다. 잠자리는 '죽음'의 상징입니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여러분의 인생 나침반을 확인하십시오.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었다면, 나의 오늘 하루는 몇 점인가?" 이 질문이 여러분을 참된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돈 보스코 성인의 질문에 활짝 웃으며 "저는 그냥 계속 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던 도미니코 사비오처럼,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후회 없을 기쁜 하루하루를 살아가시길 빕니다. 아멘. ============================================================================================================ 이병우 신부님_"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17,30) '희망과 회개의 메시지인 그리스도의 재림!' 오늘 복음(루카17,26-37)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인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모두 마치고 하늘로 오르실 때, 하느님의 천사가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고 있는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1,11) 그래서 교회는 미사를 드릴 때마다 '주님의 기도 후'에 이렇게 사제의 입으로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노아 때에 일어난 일과 롯 때에 일어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합니다. 그 일은 의인이었던 노아와 롯을 제외한 악인들이 멸망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멸망과 죽음이 전하는 공포와 불안'이 아닙니다. 오히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희망인 '영원한 생명'을 다시금 기억하게 해 주고, 이에 '합당한 자세'를 일깨워줍니다. 저 세상의 모습인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묵시성경(다니엘서와 요한묵시록)'이 전하는 메시지가 바로 '희망과 회개'입니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13,9) 오늘 독서인 지혜서의 말씀(13,1-9)은 '하느님에 대한 무지', '눈에 보이는 것 안에만 갇혀 있는 이들의 무지'를 전하면서, '희망과 회개'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게시판 운영원칙
Help Des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