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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어떻게 살 것인가? “회개와 배움, 섬김의 여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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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8.토요일 성 루카 복음 사가 축일 2티모4,10-17ㄴ 루카10,1-9
어떻게 살 것인가? “회개와 배움, 섬김의 여정에 충실합시다”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시편145,17)
길을, 희망을, 꿈을 잃고 방황하며 표류하며 헛되이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느때 보다 기도하고 회개하며 하느님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살아갈수록 회개할 것도, 배울 것도, 섬길 것도 점점 늘어납니다. “인생에 허물을 남기지 마라”, 새벽 유투브에서 언뜻 눈에 띈 말마디입니다. 회개하라, 보속하라, 찬미하라, 감사하라, 사랑하라, 공부하라 연장되는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해야 할 일이 끝이 없습니다. 어제 공부한 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일부를 나눕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우리 행실로써 당신의 이 거룩한 훈계에 마땅히 응답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 때문에 우리가 우리 악행을 고칠 수 있도록 이 세상의 날들이 연장되는 것이다. 사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를 회개시키려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인내를 깨닫지 못하느냐?’하시고, 또 어지신 주께서는 ‘나는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고 오히려 회개하여 살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다.”(머리35-37)
눈만 열리면 온통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새벽에 읽은 현자 다산의 말마디도 회개의 삶에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말 한 마디로 천량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천냥 빚을 질 수도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은혜와 원한은 말 한마디에서 생기고, 화와 복은 한 글자에서 비롯된다. 지혜로운 선비라면 마땅히 부지런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오늘은 성 루카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성인들이야말로 참 좋은 회개의 표징이자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고 우리가 배워야 할 삶의 좌표가 됩니다. 성 루카 사가의 생애 역시 우리에게는 좋은 회개의 계기가 되며 대략적 내용을 나눕니다.
우리는 그의 출생지나 날짜를 모릅니다. 그는 바오로의 선교여정중 일부와 로마로 가는 마지막 여정의 동료였던 듯 합니다. 사도행전과 루카복음은 모두 그의 작품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2세기 자료에 그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안디옥 출신으로 직업은 의사였던 루카는 사도들의 제자가 되었고, 후에 바오로가 순교할 때까지 그를 따랐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바오로와 함께 한 루카가 나옵니다.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이런 모두가 떠난 외롭고 고독한 환경에서도 바오로의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고백은 우리의 믿음에 큰 자극이 됩니다.
루카는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도 없이 주님을 섬기다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입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루카는 신약성경을 쓴 유일한 비유다인 저자로 드러나며, 기도하는 예수님을 많이 강조하였고 이방인들에게도 열린 마음을 보여줍니다.
다른 어떤 복음보다도 루카에서는 여성들이 많이 등장하며, 가난한 자들과 소외자들에 대한 애정도 깊었으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가장 감동적인 예화들을 소개합니다. 어느 평신도 신학자는 제 강론 스타일이 "쉽고, 깊고, 감동적이고, 아름답기가" 루카를 닮았다 하는데 만족합니다. 또 루카는 역사가로서 세속학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가가 아니라 복음사가로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그가 화가였다는 전승도 있고, 유명한 성모 마리아 성화상중 하나가 그의 작품으로 여겨지나 역사적 정확성은 없습니다. 이런 점이 감안되어 루카는 예술가와 의사의 수호성인으로 추대됩니다. 네 복음사가의 상징으로 마태오는 사람, 마르코는 사자, 요한은 독수리, 루카는 황소입니다. 우보천리의 자세로 충실히 바오로를 따랐으며 평생 초지일관, 복음선포자의 삶을 살았음을 봅니다. 이런 루카복음의 삶자체가 영원히 빛나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저는 참 좋은 이상적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여러 측면에 걸쳐 회개하는 마음으로 배웁니다.
첫째, 그 비전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나 이제나 믿는 이들의 비전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전생애가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에 있었고 오늘 복음에서도 “하느님의 나라가 여라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라는 말마디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평생 공부하고 추구할 바 하느님의 나라요 우리 하나하나가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회개의 표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공동체의 영원한 중심인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 됩니다. 평생 보고 듣고 배워야 할 평생 주님이자 스승은 길이자 생명이자 진리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오늘 일흔 두 제자들도 주님이자 스승으로부터 파견되듯 우리 역시 매일 주님으로부터 삶의 현장에 파견됩니다. 이리떼 세상으로 파견되는 양같은 우리들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셋째는 우리의 신원과 사명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라는 이중 신원입니다. 이중신원에 걸맞는 무소유의 영성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최소한의 의식주로 이웃의 자발적 환대에 의지하면서 결코 이웃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아니 선물이 되도록 하는 제자요 사도로서의 삶입니다.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참으로 부수적인 모든 짐들을 덜어낸 주님만이 투명히 드러나는 본질적 깊이의 삶이요,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하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평화의 사도로서 복음선포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인 우리가 이웃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주님의 평화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실현은 평화로 입증됩니다. 말그대로 가난 사랑이 훈련되어 일상화되고 습관화된 삶입니다.
소유에서 자유로워진 존재의 삶이요 자발적 가난의 자유로운 삶입니다. 과소비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기후위기로 공동의 집인 지구가 위협받는 총체적 복합적 위기에 시대에 참으로 절박한 생태적 회개요, 회복해야할 단순소박한 자연친화적 삶입니다. 이어지는 권고도 좋은 삶의 지침이 됩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는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참으로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민폐를 최소화하는 주님 제자요 사도로서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짐이 아닌 선물같은, 당당하고 겸손한 품위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궁극의 목적이 드러납니다.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오늘 복음 말씀 전체가 우리의 삶을 거울처럼 비춰주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자발적 가난의 본질적 삶에 충실할 것을, 소유의 삶에서 기쁨과 자유의 존재의 삶에, 회개의 삶에 충실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런 단순소박한 삶자체가 이웃에 치유가 될 수 있습니다. 답은 회개뿐입니다. 회개하라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배움, 섬김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8).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